민주당의 간 나오토 대표가 이번 총선의 ‘일등공신’인 오자와 이치로 이름에 당선 축하 꽃을 달아주며 활짝 웃고 있다(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왼쪽)와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아사히신문
일본에서 11월9일 실시된 중의원 총선거 결과를 놓고 집권 여당인 자민당과 야당인 민주당이 각자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민당은 의회가 해산되기 전 의석보다 10석이 줄었다. 정원 480석 중 237석을 차지해 단독과반수에 못 미쳤다. 그러나 연립여당인 공명당(34석)과 보수신당(4석) 의석을 합하면 안정의석을 확보한다. 따라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좀 쑥스럽긴 하지만 이긴 것은 틀림없다는 것이 자민당의 논리다. 반면 민주당은 의회 해산 전 의석보다 40석이 늘었다. 일본 야당 사상 최다 의석인 177석을 확보해 기세가 오른 민주당측은 사실상 자민당이 패배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해산 전 의석보다 10석 준 237석
그도 그럴 것이 지역구의원을 뽑을 때 함께 정당에 투표해 결정하는 비례대표 의원 수에서는 자민당을 꺾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 총 180석 가운데 자민당은 69석을 차지한 데 비해 민주당은 72석을 얻었다. 전체 득표수로는 자민당이 2066만여 표, 민주당이 2209만여 표로 민주당이 137만여 표를 더 얻었다.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는 사실 말이 필요 없다. 개표 결과가 나온 직후 보인 자민당 고이즈미 총재와 민주당 간 나오토 대표,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면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인지 금세 알 수 있다.
평소 TV 매체를 갖고 놀다시피 하며 ‘퍼포먼스’ 정치를 해 인기를 얻었던 고이즈미 총리는 이를 악문 굳은 표정이었다. 반면 간대표는 지원연설로 목이 잠겨 선거 결과에 대한 코멘트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얼굴만큼은 정권을 손에 넣은 양 웃음기가 가득했다.
개표 결과를 전한 10일자 일본의 주요 신문들은 여권이 정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점을 평가하면서도 ‘고이즈미 신화 붕괴’ 등 부제를 달아 사실상 자민당의 패배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보수우익을 대변하는 요미우리신문조차 ‘고이즈미-아베 간판이 제 기능을 못했다’고 지적했다. 자민당 선거 포스터에 실린 두 명의 주인공은 개헌과 재무장을 주장해온 대표적인 보수정객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과 고이즈미 총리였다. 두 사람이 당초 기대했던 바람을 일으키는 데 실패했다는 분석이다. 자민당은 의회가 해산될 무렵만 해도 의석을 대폭 늘려 단독과반수 확보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단독과반수를 확보하기는커녕 해산 전 의석보다 10석이나 줄어들고 말았다.
과연 고이즈미 총리의 ‘신통력 상실’은 날씨까지 흐려 사상 두 번째로 낮았던 투표율만의 탓일까. 정가 주변에서는 퍼포먼스 정치의 한계, 맹우를 쉽게 저버리는 가벼운 사람, 정치 도의를 저버리고 약육강식 논리에만 집착하는 성격, 말과 다른 행동 등 그간 총리로 재직하면서 보여준 결점에서 고이즈미 신화의 붕괴 원인을 찾고 있다.
“일본 국민 중 상당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고이즈미의 실체를 조금은 알아차렸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일본 언론계의 중진인사는 이번 선거를 사실상 자민당의 패배라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2001년 4월 총리에 오를 때 개혁과 변화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던 고이즈미 총리. 물론 지금도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그래도 고이즈미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속이 텅 빈 사람이라고 믿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개혁과 변화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배반당했다는 느낌을 가진 계층이 당내외에서 증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보수성향이 강한 지방에서는 자민당이 승리했으나 각 지방의 행정중심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1구’에서는 민주당이 우세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당내외 불신은 추후 자민당 운영 능력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져 정국 불안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도 있다. 몇몇 친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남의 말을 도통 귀담아듣지 않는 특유의, ‘안방 퉁소’ 같은 정치 스타일이 문제로 지적된다.
일본 정가에는 ‘YKK’라는 말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 신인에게 무릎을 꿇은 야마사키 다쿠, 금전 스캔들로 의원직을 사직했다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기에 성공한 가토 고이치 부총재(전 자민당 간사장), 고이즈미 총리 등 세 사람의 영문 이름 첫 글자를 따 만든 말로 ‘3인방’을 일컫는다. 그런데 새 국회에서는 3인방의 협조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먼저 가토 전 간사장은 1년 반 이상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낸 끝에 국회에 다시 등장했지만 이 기간 동안 고이즈미 총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생겼다. 고이즈미 총리가 맹우였던 자신을 굳이 감싸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쉽게 사람을 버린다’는 말을 듣는다. 2001년 총선시 단짝을 이뤄 전국을 돌며 돌풍을 일으켰던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딸 다나카 마키코와 서먹해진 관계를 보아도 그렇다. 다나카는 외상 시절 비서급여 부정 문제로 의원직을 사직하고 이번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지만 고이즈미 총리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다.
맹우였던 야마사키 역시 지역구에서 불의의 패배를 당해 부총재직을 사임하고 고이즈미 총리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는 고이즈미 총리의 최측근으로 자민당 내 각종 동향을 파악, 고이즈미에게 전달하고 이를 조정해왔다. 또한 연립정당인 공명당과의 정책 이견 등을 신속히 조율하는 중재 역할을 해왔는데 이 자리를 메워줄 마땅한 인사가 고이즈미 총리 주변에 보이지 않는다.
자민당은 원래 공명당과 손잡기 전인 1994년에서 96년 사이에는 공명당 세력을 증오했다. 당시 공명당 세력은 정권 탈취를 기도하는 제1야당 신진당에 소속된 상태였다. 공명당은 창가학회라는 종교단체의 신도와 자금을 배경으로 성장한 정당이다. 당시 자민당은 제1야당인 신진당을 비판하면서 공명당 세력이 가담해 있는 것을 겨눠 “종교색이 강한 정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맹렬히 비판했다. 공명당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종교법인법 개정까지 검토할 정도였다.
쉽게 사람을 버린다는 평을 듣는 고이즈미 총리. 그는 원래 약육강식의 논리에만 집착할 뿐 의리가 없다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 3당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보수신당이 끝내 해체되고 흡수통합된 과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보수신당은 선거 후 의석이 9석에서 4석으로 크게 줄었다. 더구나 당 대표가 낙선해 선거 후 하루 만에 해당을 선언하고 자민당에 흡수통합됐다. 이 과정이 고이즈미 총리의 ‘교활함’을 입증한다는 것이 고이즈미 비판론자의 주장이다.
구마가이 히로시 보수신당 대표가 출마한 시즈오카 7구에서는 자민당 후보가 나서지 않았다. 자민당은 독자후보를 내지 않고 연립여권인 보수신당 후보를 공동추천했다. 하지만 무소속 후보가 문제였다. 무소속 후보는 모리 요시로 전 총리 시절 외무관료를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를 지원하기 위해 모리 전 총리까지 직접 지역구를 방문한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원래 모리파 소속이었다. 보수신당의 구마가이 대표는 자민당이 자신을 미는 대신 엉뚱한 무소속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자 자민당측에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결국 구마가이 대표의 아성은 자민당의 지원사격을 받은 모리파 무소속 후보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보수신당의 다른 두 후보도 자민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필요에 의해 보수신당과 손을 잡았지만 ‘배신’한 것이다. 선거운동에 돌입하기 직전 여론조사 결과로는 단독과반수 확보 가능성도 컸기 때문에 보수신당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분석이다. 보수신당이 당 대표의 낙선으로 비틀거리자 선거 후 불과 하루 만에 통째로 꿀꺽 삼키고 말았다.
고이즈미 총리 체제는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합으로 안정의석을 확보한 이상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실체 없는 ‘퍼포먼스 정치’가 이대로 이어진다면 내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지지표는 더욱 이탈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