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사진)이 내년 1월16일로 예정된 민주노총 4기 임원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최근 단위원장은 노사관계 전문 일간지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민주노총에서 내 역할은 (현 임기인) 내년 1월31일까지이며, 이제 새로운 사람들이 민주노총을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위원장이 우리나라 노동운동계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노동계는 이번 선언을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민주노조운동이 본격화한 1987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동운동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해 동아건설 창동공장에서 노조를 만들어 초대 위원장을 지낸 것을 시작으로, 88년 서울지역노조협의회 의장, 90∼94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민주노총 2, 3기 위원장을 거치는 등 언제나 ‘투쟁의 선봉’에 서 있었다. 올가을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노-노(盧勞) 전쟁’의 중심에도 여전히 단위원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불출마 선언은 만 16년간 이어져온 민주노조운동의 한 시대가 마무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세대 노동운동의 대부 … 16년간 6차례 구속돼
사실 지난 세월 동안 이어져온 단위원장의 삶은 우리나라 민주노조운동의 격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지역노조협의회 의장이던 89년 서울지하철 파업에 개입한 혐의로 처음 수감된 그는 올 4월, 1년8개월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만기출소할 때까지 모두 6차례나 구속과 석방을 반복했다.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면 수배자가 되고, 다시 붙들리고, 들어가고, 나오는’ 생활이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출소한 그를 두고 사람들은 “더 이상은 구속될 일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그는 최근의 투쟁으로 또다시 사법당국의 소환장을 받았다. 최악의 경우 7번째 구속을 맞이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단병호=강성 노동운동가’라는 인상을 각인시킨 그의 이러한 이력은 그러나 실은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극한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1세대 노동운동가의 현실을 웅변하는 것이라는 평도 있다.
실제로 단위원장은 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평범한 노동자로 일하다 ‘전태일 평전’을 통해 사회의 모순에 눈뜨고, 현장 노동자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1세대 노동운동가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자생적 노동운동가’들의 투쟁은 민주노조의 양적, 질적 성장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민주노총 출범 당시인 95년 11월 862개 노조 41만8154명에 불과했던 민주노총 가입 노조가 2001년 말 현재 1513개 노조 64만3506명으로 성장한 것은 구속과 탄압을 피하지 않고 싸워온 이들 덕분이라는 게 대체적 평가다. 또 70∼80년대에 ‘빨갱이’ ‘사회 위해 세력’으로 몰렸던 노동자들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요소로 인정받게 된 것이나, 노동기본권 보장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의제 가운데 하나로 격상된 것도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대기업 노동자와 영세사업장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에서 나타나듯 이 투쟁이 노동자의 기업별 의식을 강화하고 노동자 내 계층화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면이 없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이 때문에 ‘단병호’로 상징되던 1세대 민주노조운동이 마무리된 후 2세대 민주노조운동의 방향과 의제가 어떻게 모색되어야 하는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단위원장은 “요즘 지역순회 간담회를 다니면서 노동운동이 투쟁의 새로운 의제,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지 못하면 노동운동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얘기한다”며 “사회공공성 확대를 중심으로 한 투쟁과제를 중심에 놓아야 하며, 또한 운동의 존속 차원에서도 비정규직 문제를 전 조직이 합심해 풀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이후 거취에 대해서는 “구체적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민주노동당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뛸 것임을 시사했다.
어쨌든 이번 투쟁은 단위원장이 노동운동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피워내는 불꽃인 셈이다.
단위원장이 우리나라 노동운동계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노동계는 이번 선언을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민주노조운동이 본격화한 1987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동운동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해 동아건설 창동공장에서 노조를 만들어 초대 위원장을 지낸 것을 시작으로, 88년 서울지역노조협의회 의장, 90∼94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민주노총 2, 3기 위원장을 거치는 등 언제나 ‘투쟁의 선봉’에 서 있었다. 올가을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노-노(盧勞) 전쟁’의 중심에도 여전히 단위원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불출마 선언은 만 16년간 이어져온 민주노조운동의 한 시대가 마무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세대 노동운동의 대부 … 16년간 6차례 구속돼
사실 지난 세월 동안 이어져온 단위원장의 삶은 우리나라 민주노조운동의 격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지역노조협의회 의장이던 89년 서울지하철 파업에 개입한 혐의로 처음 수감된 그는 올 4월, 1년8개월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만기출소할 때까지 모두 6차례나 구속과 석방을 반복했다.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면 수배자가 되고, 다시 붙들리고, 들어가고, 나오는’ 생활이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출소한 그를 두고 사람들은 “더 이상은 구속될 일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그는 최근의 투쟁으로 또다시 사법당국의 소환장을 받았다. 최악의 경우 7번째 구속을 맞이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단병호=강성 노동운동가’라는 인상을 각인시킨 그의 이러한 이력은 그러나 실은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극한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1세대 노동운동가의 현실을 웅변하는 것이라는 평도 있다.
실제로 단위원장은 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평범한 노동자로 일하다 ‘전태일 평전’을 통해 사회의 모순에 눈뜨고, 현장 노동자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1세대 노동운동가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자생적 노동운동가’들의 투쟁은 민주노조의 양적, 질적 성장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민주노총 출범 당시인 95년 11월 862개 노조 41만8154명에 불과했던 민주노총 가입 노조가 2001년 말 현재 1513개 노조 64만3506명으로 성장한 것은 구속과 탄압을 피하지 않고 싸워온 이들 덕분이라는 게 대체적 평가다. 또 70∼80년대에 ‘빨갱이’ ‘사회 위해 세력’으로 몰렸던 노동자들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요소로 인정받게 된 것이나, 노동기본권 보장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의제 가운데 하나로 격상된 것도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대기업 노동자와 영세사업장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에서 나타나듯 이 투쟁이 노동자의 기업별 의식을 강화하고 노동자 내 계층화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면이 없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이 때문에 ‘단병호’로 상징되던 1세대 민주노조운동이 마무리된 후 2세대 민주노조운동의 방향과 의제가 어떻게 모색되어야 하는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단위원장은 “요즘 지역순회 간담회를 다니면서 노동운동이 투쟁의 새로운 의제,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지 못하면 노동운동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얘기한다”며 “사회공공성 확대를 중심으로 한 투쟁과제를 중심에 놓아야 하며, 또한 운동의 존속 차원에서도 비정규직 문제를 전 조직이 합심해 풀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이후 거취에 대해서는 “구체적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며 말을 아끼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민주노동당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뛸 것임을 시사했다.
어쨌든 이번 투쟁은 단위원장이 노동운동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피워내는 불꽃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