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마우스(사진), 톰과 제리, 도널드 덕, 프루토, 곰돌이 푸….
어린이들한테 인기 있는 디즈니 만화영화 주인공들이다. 대개 말을 배우기 전부터 접하게 되는 이 만화들을 보고 자라는 어린이들은 아무래도 이 동물들한테 유난히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 오리나 개, 곰, 생쥐까지 있는데 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 닭은 없을까.
몇 년 전 닭을 주인공으로 한 ‘치킨 런’이라는 클레이애니메이션(clayanimation)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양계장을 배경으로 했을 뿐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을 다뤘다는 점에서 어린이용 만화영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동물의 습성을 치밀히 관찰해 의인화하는 디즈니가 보기에 소와 닭은 캐릭터화하기엔 모자란 탓이었을 수 있겠지만 혹시 서구의 육식문화에 한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쇠고기와 닭고기는 서구인의 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식이다. 애완견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어린이가 보신탕을 맛있게 먹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늘 영화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아침저녁으로 식탁에 오르는 걸 보고 혹시 식사를 거부하는 사태가 생기지는 않을까. 아니면 영악하게 쇠고기는 맛있게 먹되 만화 속 소 친구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을는지.
어린이들이 ‘단식’도 불사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즐겁게 자기 만화영화에 빠져들기를 바란 디즈니의 심사숙고? 그건 필자의 괜한 추측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디즈니가 이들 캐릭터를 창안한 20세기 초는 서구 육식문화의 절정기였다.
서구문명은 어떤 면에서는 쇠고기를 맘껏 먹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근대에는 어떤 음식을 먹느냐가 사회적 차별과 계급 불평등의 상징이었다. 의복처럼 음식도 일종의 피라미드 식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그 정점에 있었던 것이 바로 쇠고기였고 가장 하층을 차지한 것이 야채와 곡물이었다. 영국 등 유럽에서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쇠고기는 귀족과 상인층만 먹던 음식이었다. 그만큼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서구 사람들이 처음으로 쇠고기를 마음놓고 포식할 수 있게 된 건 19세기 중반 이후 신대륙 미국에서였다. 그 오랜 숙원을 해결해준 것이 바로 미국 서부의 넓은 목초지대였다. 그러나 그 목초지대를 확보하는 과정은 그 풍경처럼 전원적이거나 평화롭지는 않았다. 이 평원에는 그 평원의 오랜 주인, 즉 1만5000년 동안 풀을 뜯어 먹으며 번식해온 아메리칸 버팔로들이 있었다. 버팔로는 유럽의 소와 달리 쉽게 길들일 수 없었고, 결국 서구 사람들은 버팔로 멸종 작전에 들어갔다. 이는 두 가지 목표를 겨냥한 것이었다. 버팔로를 없애면 버팔로로부터 식량과 의복 등을 얻던 인디언의 생존기반을 함께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주인공이 백인들의 버팔로 학살 장면을 보고 분노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이는 철저히 계획된 학살이었다. 우리에겐 친숙하게 들리는 ‘버팔로 빌’은 버팔로를 잔인하게 살육한 전문 사냥꾼들이다. 아메리칸 버팔로는 한 종의 완벽한 멸종 사례로 기록될 만큼 완전히 사라졌다.
백인들은 버팔로가 없는 평원에 롱혼과 숏혼이라는 유럽 소를 풀어놓았다. 이들은 미 대륙 서부의 풍부한 목초를 배불리 먹으면서 급속히 번식해 값싼 쇠고기의 공급을 가능케 했다. 제러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에게 미국에서의 성공의 징표는 구운 쇠고기나 스테이크를 먹는 것이었고 최소한 이 점에서는 신분상승을 이뤘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요즘, 서구사회에선 채식주의가 유행하고 있다. 이를 ‘자연에 대한 정복과 파괴’로 점철돼온 서구문명의 자기반성의 한 흐름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본질은 그게 아니다. 채식주의자들은 대개 교육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돼 있다. 고기가 훨씬 싸진 지금 고기는 서민의 음식이다. 음식의 계층구조에서 상하가 바뀐 것이다. ‘나의 그리스식 웨딩’이라는 영화에서 명문가인 남자 집안 사람들 모두가 채식주의자이듯이 채식주의는 상류층의 정신적 우월감의 표현인 측면이 강하다. 적어도 죽어간 버팔로에 대한 동정심 차원은 아닌 듯하다.
어린이들한테 인기 있는 디즈니 만화영화 주인공들이다. 대개 말을 배우기 전부터 접하게 되는 이 만화들을 보고 자라는 어린이들은 아무래도 이 동물들한테 유난히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 오리나 개, 곰, 생쥐까지 있는데 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 닭은 없을까.
몇 년 전 닭을 주인공으로 한 ‘치킨 런’이라는 클레이애니메이션(clayanimation)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양계장을 배경으로 했을 뿐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을 다뤘다는 점에서 어린이용 만화영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동물의 습성을 치밀히 관찰해 의인화하는 디즈니가 보기에 소와 닭은 캐릭터화하기엔 모자란 탓이었을 수 있겠지만 혹시 서구의 육식문화에 한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쇠고기와 닭고기는 서구인의 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식이다. 애완견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어린이가 보신탕을 맛있게 먹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늘 영화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아침저녁으로 식탁에 오르는 걸 보고 혹시 식사를 거부하는 사태가 생기지는 않을까. 아니면 영악하게 쇠고기는 맛있게 먹되 만화 속 소 친구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을는지.
어린이들이 ‘단식’도 불사하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즐겁게 자기 만화영화에 빠져들기를 바란 디즈니의 심사숙고? 그건 필자의 괜한 추측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디즈니가 이들 캐릭터를 창안한 20세기 초는 서구 육식문화의 절정기였다.
서구문명은 어떤 면에서는 쇠고기를 맘껏 먹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근대에는 어떤 음식을 먹느냐가 사회적 차별과 계급 불평등의 상징이었다. 의복처럼 음식도 일종의 피라미드 식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그 정점에 있었던 것이 바로 쇠고기였고 가장 하층을 차지한 것이 야채와 곡물이었다. 영국 등 유럽에서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쇠고기는 귀족과 상인층만 먹던 음식이었다. 그만큼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서구 사람들이 처음으로 쇠고기를 마음놓고 포식할 수 있게 된 건 19세기 중반 이후 신대륙 미국에서였다. 그 오랜 숙원을 해결해준 것이 바로 미국 서부의 넓은 목초지대였다. 그러나 그 목초지대를 확보하는 과정은 그 풍경처럼 전원적이거나 평화롭지는 않았다. 이 평원에는 그 평원의 오랜 주인, 즉 1만5000년 동안 풀을 뜯어 먹으며 번식해온 아메리칸 버팔로들이 있었다. 버팔로는 유럽의 소와 달리 쉽게 길들일 수 없었고, 결국 서구 사람들은 버팔로 멸종 작전에 들어갔다. 이는 두 가지 목표를 겨냥한 것이었다. 버팔로를 없애면 버팔로로부터 식량과 의복 등을 얻던 인디언의 생존기반을 함께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주인공이 백인들의 버팔로 학살 장면을 보고 분노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이는 철저히 계획된 학살이었다. 우리에겐 친숙하게 들리는 ‘버팔로 빌’은 버팔로를 잔인하게 살육한 전문 사냥꾼들이다. 아메리칸 버팔로는 한 종의 완벽한 멸종 사례로 기록될 만큼 완전히 사라졌다.
백인들은 버팔로가 없는 평원에 롱혼과 숏혼이라는 유럽 소를 풀어놓았다. 이들은 미 대륙 서부의 풍부한 목초를 배불리 먹으면서 급속히 번식해 값싼 쇠고기의 공급을 가능케 했다. 제러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에게 미국에서의 성공의 징표는 구운 쇠고기나 스테이크를 먹는 것이었고 최소한 이 점에서는 신분상승을 이뤘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요즘, 서구사회에선 채식주의가 유행하고 있다. 이를 ‘자연에 대한 정복과 파괴’로 점철돼온 서구문명의 자기반성의 한 흐름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본질은 그게 아니다. 채식주의자들은 대개 교육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돼 있다. 고기가 훨씬 싸진 지금 고기는 서민의 음식이다. 음식의 계층구조에서 상하가 바뀐 것이다. ‘나의 그리스식 웨딩’이라는 영화에서 명문가인 남자 집안 사람들 모두가 채식주의자이듯이 채식주의는 상류층의 정신적 우월감의 표현인 측면이 강하다. 적어도 죽어간 버팔로에 대한 동정심 차원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