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9일 서울 여의도 종합전시장에서 열린 채용박람회 현장.
“저는 연봉 1800만원이면 충분합니다.”
지난 6월 서울 강남의 한 외국계 호텔 신입사원 면접장. 서류심사를 통과한 3명의 여성 지원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면접관들과 몸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호텔경영학을 전공해 호텔리어가 되길 꿈꿔온 이모씨(26·여)는 ‘겸손하게’ 연봉 2000만원을 받겠다고 얘기했다. 호텔에 대한 관심도나 외국어 실력에 비하면 낮은 금액이라고 생각한 것. 그러자 1년간 은행에서 경력을 쌓았다는 다른 지원자가 연봉 1800만원도 괜찮다고 나섰다. 호텔측은 결국 면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이씨를 포기하고 연봉 1800만원을 제시한 지원자를 선택했다. 이씨는 “나보다 경력도 많은 사람이 더 낮은 연봉을 불러 놀랐다”며 “호텔리어가 되겠다는 일념 때문에 고학력자들도 경쟁적으로 몸값을 낮추는 상황이 씁쓸했다”고 말했다.
‘소수 수시채용’ 외국계 은행 치열한 경쟁
고학력자 인력 공급이 늘어나는 반면 상응하는 일자리 공급이 충분치 않아 구직자들이 ‘자신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현상이 최근 들어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은 낮은 임금과 불안한 고용 상태를 감수하고 이름 있는 회사를 택하거나, 하향 취업을 통해 인생역전을 꿈꾼다. 주로 일용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이뤄져 왔던 인력 경매가 고학력 노동자로까지 대상을 확대하고 있는 것. 치열한 구직 경쟁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경매 시장에 나온 상품이나 다름없다.
주한 외국계 은행의 대표격인 HSBC(왼쪽)와 씨티은행.
서울의 한 명문대를 졸업한 이나래씨(24·가명)는 올해 계약직으로 HSBC에 입사했다. 대학 동기들이 3000만원이 넘는 연봉을 받으며 국내 은행에 입사했지만, 이씨는 세계적 규모의 외국계 은행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더 매력적으로 느꼈고 특히 이 경력이 해외 유학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유명 금융인들 중 외국계 은행 근무 경력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입사 후 그가 경험한 현실은 달랐다. 계약직으로 채용된 이씨의 연봉은 1800만원 수준. 그나마 2년 후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얼마 전 두 선배가 2년 계약 만료로 회사를 떠나는 것을 보자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더 큰 고민은 자신이 맡은 일이 고졸사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단순 반복업무’란 점이었다. 단지 업무를 영어로 처리하기 때문에 대졸사원을 채용한다는 걸 알았다. 이씨는 “회사에 들어온 대졸 신입사원들이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거나 해외유학파”라며 “그러나 이들이 처리하는 일 대부분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업무”라고 불만을 털어놨다. 그를 더욱 난감하게 한 일은 얼마 전 들어온 신입사원이 1800만원보다 더 낮은 연봉을 받기로 하고 입사한 것. 문제는 회사가 임금을 더 낮게 책정해도 구직자의 이력서가 산더미같이 쌓인다는 점이다.
1994년 씨티은행 노동조합원들이 근로복지기금 출연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모습.
그러나 HSBC측은 “시중은행에 비해 연봉이 낮다고 주장하지만 이 때문에 오버타임 근무 수당을 정확하게 지급한다”고 밝혔다. 또 신입사원을 계약직으로만 선발하는 제도에 대해서도 “대졸 신입사원들이 업무에 무지한 만큼 능력 정도를 파악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정규직이 필요 없는 자리에 구태여 정규직 사원들을 둘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씨티은행의 김정은씨(25·가명)는 3년째 계약직 행원으로 근무 중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2001년 여름 1년 계약으로 이 은행에 입사했다. 좀 임금이 많은 한국계 회사보다 훨씬 끌리는 직장이었다. 처음 입사 땐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좋겠다’는 주변의 부러움도 많이 샀다. 하지만 환상이 지속된 것은 6개월뿐. 은연중 존재하는 정규직과의 차별 문제와 국내 은행에 비해 낮은 처우가 점차 직장에 대한 환상을 깨게 만들었다. 2001년 주5일 근무 결정 이후 비정규직 사원의 퇴근시간이 정규직 사원의 퇴근시간보다 1시간 늦은 오후 6시 반으로 조정되자 김씨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연봉이 정규직 노동자의 80~90% 수준인 1600만~1800만원인 건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경조사비 지급이나 생일축하 행사에서 제외될 땐 서운함이 컸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극히 드문 데다 계약 갱신은 두 번을 넘을 수 없어 김씨는 수개월 후 회사를 나가야 한다. 회사 차원에서도 아예 ‘정규직 전환’에 대한 허튼 희망을 심어주지 않는다. 김씨는 회사 이름에 너무 쉽게 목맨 게 아닌가 후회하고 있다.
경험·전문성 쌓아놓으면 ‘귀하신 몸’ 가능
‘아모제 마르쉐’ 신촌점에 근무하는 유재혁씨. 그는 ‘하향 취업’을 통해 구직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그러나 ‘하향 취업’이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외식업체 ‘아모제 마르쉐’ 신촌점의 조리 파트에 근무하는 유재혁씨(31)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2000년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그는 고시를 준비하다 일반 회사에 취업할 기회를 놓쳤다. 진로를 고민하다가 눈을 돌린 곳이 ‘아모제 마르쉐’의 홀서빙 아르바이트. 그는 2001년 여름, 시간당 3000원씩 받는 식당의 홀서빙 업무를 시작했다. 카드사나 은행에 입사한 대학 동기들이 3000만원을 훌쩍 넘는 연봉을 받는 것을 보며 한 달에 고작 50만~60만원을 버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외식업체의 최고경영인이 되겠다’는 의지는 그를 1년 만에 정규직 사원으로, 그것도 ‘캡틴’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그는 지금 대학원에서 ‘조리외식산업학’을 공부하며 전문성 쌓기에 여념이 없다.
같은 기업의 인재개발팀에 근무하는 권영일씨 역시 홀서빙 아르바이트에서 출발해 정규직 직원이 됐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친구들이 2300만원 이상의 연봉을 받고 제약회사나 병원에 취업하는 것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1500만원에 불과한 자신의 연봉에 실망한 것은 잠시, 오히려 일의 즐거움을 발견하기 시작한 뒤 그는 항상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한편 서강대 남성일 교수(경제학과)는 “하향 취업이나 개별적인 연봉근로 계약이 늘어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며,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구직자들은 자신의 ‘가격경쟁력’을 내세운다”고 설명했다. 남교수는 또 “고학력자들이 선호하는 전문직의 경우 업무의 특수성과 개별성이 강하고, 업무 내용도 달라 차별적인 연봉근로 계약이 필요하다”면서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권장하고, 구직 경쟁이 치열해지는 여건 속에서 ‘몸값 낮추기’ 경쟁은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