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6

..

“자유와 파격, 아날로그 멋을 입혀요”

첫 남성 스타일리스트 정윤기씨 … “옷 입는 사람 캐릭터 사회 분위기 적극 반영”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3-10-16 10:2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자유와 파격, 아날로그 멋을 입혀요”

    정윤기씨가 스타일링한 연예인들은 예외 없이 패션리더가 됐고, 드라마와 광고는 수많은 유행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보면 자신의 겉모습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경우가 적지 않다. 혹은 자신의 외모가 행여 아름답거나 깔끔해 보일까 봐 걱정한 건 아닐까 싶은 차림으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일에 전념하는 그 각오에 존경의 염도 솟아오르지만 감상자로선 한편 실망스런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남자 스타일리스트 정윤기씨(33)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과연 남자의 단조로운 양복과 넥타이를 이렇게 입고 맬 수도 있다! 그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다웠다.

    솔직히 그의 몸매는 모델이나 연예인의 늘씬한 체격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갈색과 붉은 포도주색으로 맞춘 슈트, 넥타이를 살짝 선만 드러나게 이용한 스타일링은 몸매의 단점을 보완해주고도 남았다. 그는 한 번도 후줄근한 청바지 차림으로 집 밖을 나선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매일 다음날 입고 신을 속옷에서 구두까지 완벽하게 스타일링해 놓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정윤기씨의 공식 직함은 스타일링과 패션브랜드 홍보 회사인 인트렌드대표이사다. 프라다, 발리, 이세이 미야케, 송지오옴므 등 국내외 패션브랜드들의 홍보를 대행하고 불가리, 쇼메 등의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한다. 또 서울예대 스타일링 학과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이자 GTV ‘정윤기의 인트렌드’를 진행하는 방송인이기도 하다.

    손댄 연예인들 ‘패션리더’로 변신



    하지만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그가 처음 시작한 일, 즉 스타와 모델들의 스타일링이다. 드라마, 광고, 영화 등에 가장 어울리는 ‘옷을 입히는 일’이다. 그는 황신혜, 김희애, 이병헌, 고소영 등 톱스타들의 스타일리스트이며, 삼성카드 등 150편의 광고에서 의상을 담당했고 드라마 ‘올인’ ‘요조숙녀’ ‘아내’ 등에선 주인공들의 캐릭터에 맞는 의상들을 기획했다. 열거한 이름들이 증명하듯, 그가 스타일링한 스타들은 금세 패션리더로 떠올랐고 드라마와 광고는 수많은 유행을 만들어냈다.

    샤넬 슈트에 동대문시장에서 산 머플러를 두르고, 아르마니 셔츠에 이태원에서 구입한 가죽점퍼를 매치하는 것, 적어도 옷 입히는 일에 있어서 그에겐 모든 것이 가능하다.

    “4녀1남의 외아들이었고 자유분방한 교복 자율화 세대였어요. 집이 인천이었는데 거의 매일 지하철을 타고 서울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까지 왔지요. 참고서 산다고 집에서 받은 돈으로 옷이나 신발 산 건 수도 없고, 양말이 옷과 어울리지 않으면 그날은 학교에 가지 못했어요. 남자 고등학생이 이렇게 유난을 떠니 전학도 두 번이나 했지요.”

    길은 일찌감치 정해진 셈이었다. 의상학을 전공하고 파리에서의 패션디자인 연수가 끝나자마자 그는 무작정 광고기획사를 찾아갔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스타일링이라는 말도 거의 쓰이지 않던 시절이다. 스타일링이라고 해도 패션브랜드 몇 곳에서 모델의 몸에 맞는 옷을 빌려오는 일 정도를 의미했다. 그는 기획사 AD에게 모델의 연출을 통해 광고 효과를 최대로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참을 웃던 AD는 모 전자회사의 광고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델은 지금 톱가수가 된 박지윤이었다. 정씨는 의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지만, 그 옷들을 마련할 길이 막막했다. 파리에서 막 돌아와 머리를 파랗게 염색한 젊은 남자에게 옷을 ‘협찬’해줄 디자이너는 없었다. 결국 어머니에게서 ‘사업자금’으로 500만원을 빌려 필요한 옷을 다 사버렸고, 이 당돌한 남자는 곧 ‘옷 잘 입히는 남자’로 업계에서 유명해졌다. 때마침 국내에 상륙하기 시작한 명품 브랜드들 덕분에 그는 모든 잡지의 패션면을 도맡다시피 했다. 까다로운 명품 브랜드의 아트디렉터들도 그의 감각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자유와 파격, 아날로그 멋을 입혀요”

    정윤기씨 그가 스타일링한 스타들의 화보 사진.

    “오늘 외국 브랜드의 지사장을 만나요. 저희 회사에 홍보를 맡겨달라는 프레젠테이션을 위해서죠. 제 이력서와 회사소개서는 미리 서류로 냈지만, 직접 만나면 경력 같은 거 내세우지 않고 진실하게 ‘하고 싶다’고 말해요. 누구든 성실하고 진실하게 대할 것, 그게 제 사업의 노하우예요. 십중팔구는 설득당하지요.”(웃음)

    정윤기씨는 개그맨 홍록기에게 화려하고 독특한 디자인의 옷을 스타일링해 그를 ‘베스트 드레서’로 만들고 김혜수에게 몸매를 파격적으로 드러내는 옷을 입혀 아역배우 출신인 김혜수의 이미지를 바꿔놓는 데 큰 몫을 했다.

    “연예인들과는 틈틈이 만나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상의하죠. 스타일링은 옷 입는 사람의 성격을 드러내고 사회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에요. 드라마나 영화인 경우 내용과 인물 분석이 필수고요. 옷이 파격적이어서 가끔 신문에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앞서가려면 이런 말 저런 말 듣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스타들과 일하는 게 늘 쉽진 않았다. 그가 남자라는 점이 스타일링에 대한 수요가 많은 여자 연예인들에게 ‘단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장르 독서로 영감 얻어

    “1995년 김희선씨와 처음 같이 일할 기회가 왔어요. 그런데 매니저가 전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남자라서요. 얼마나 상처가 됐는지 다시 여자 연예인과 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스타일리스트로서 독보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후 김희선의 촬영 스타일링을 맡기도 했고 더 이상 누구도 그에게 “남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옷이 필요한 스타들과 패션 기자들은 어려울 때 반드시 그를 찾았다.

    그는 최근 스타일리스트의 화려한 면만 조명되면서 청소년들에게 인기 직종으로 떠오르고 있는 데 대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듯하다고 반성한다. 돌아보면 자신도 공부할 때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다고, 지금 스타일리스트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는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인문적인 교양도 넓혀놓으라고 충고한다. ‘21세기 인간으로서 당연히’ 만화와 영화를 좋아하지만 한때 국어 선생님이 꿈이었던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다. 많은 책을 한번 훑어보고 마는 게 아니라 옛날 책이나 잡지들도 여러 번씩 보는 편이라고 한다. 옛날 책을 다시 볼 때마다 옷과 그 옷을 입었던 시대에 대해 새로운 면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카메라 앞에서 스타 대접을 받을 때도 많지만 그는 여전히 뒤에서 혹독할 만큼 많은 일을 직접 챙긴다. 거의 매일 저녁 촬영과 행사가 있기 때문에 저녁식사는 밤 11시나 되어야 할 때가 많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 보이죠? 저는 정말 백조예요. 몇 초 단위로 쇼가 차질 없이 진행되는지, 손님들은 음식을 좋아하는지 무대 앞뒤로 뛰어다니며 확인하고, 손님들과 클라이언트 모두 돌아간 뒤에야 우리 직원들하고 허겁지겁 저녁을 먹어요. 살이 찌는 것도 당연하죠. 정말 이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이런 생활을 감당하지 못해요.”

    그는 가끔 운다. 그는 ‘엉엉’ 운다고 말한다. 운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누구든 너무 힘들 때, 무례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 울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남자는, 또 여자는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든지, 입지 말아야 한다든지 하는 게 없다. 이렇게 사는 게 남자다운 삶이라거나 여자다운 삶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이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이 이 ‘옷 잘 입히는 남자’의 성공 비결이다. 그가 끄덕끄덕 동의한 결론이다.



    사람과 삶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