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17일 국회에서 열린 신당창당주비위 회의 모습.
추석연휴가 끝난 뒤 민주당 이정일 의원이 당 잔류파 의원 모임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당파 K의원은 “어, 그리 가면 안 되는데…”라며 무릎을 쳤다. 이의원은 지난 대선 때 노무현 후보의 선거대책위 재정위원장을 맡아 50억원의 대선자금을 빌려주는 등 친노(親盧) 인사로 분류된 인물. 그런 전력을 잘 알고 있는 신당파 인사들 중에는 창당 과정에서의 이의원의 역할에 나름대로 기대를 건 이들이 많았다. K의원도 그 가운데 한 사람. 그는 이의원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것보다 그가 빠짐으로써 창당 과정이 매우 춥고 배고픈 여정이 될 것을 우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의원은 “추석연휴 지역여론을 들어보니 신당으로 못 가겠더라”고 잔류 배경을 설명했지만 한 사석에서 “돈 얘기를 자꾸 해서…”라며 부담을 토로했다는 후문이다.
9월20일, 신당파는 민주당을 탈당한 37명과 한나라당 탈당파 5명을 포함한 42명으로 ‘국민참여통합신당(약칭 통합신당)’이란 명칭의 교섭단체를 국회에 공식 등록했다. 개혁당 김원웅 유시민 의원이 합류할 경우 통합신당의 세는 44명으로, ‘넘버2’를 넘볼 수 있는 입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통합신당파들은 외형적 여건 확보에도 불구하고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다. 창당자금 문제는 가장 큰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
당사 규모 최소화·창당대회도 검소하게
당사 마련, 각종 모임 경비, 지구당 창당비 등 돈 들어갈 곳은 많지만 나올 곳은 꽉 막혀 있는 게 통합신당의 현실이다. 무엇보다 자금을 끌어오는 사람도, 장기적 플랜도 없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민주당 사무처에서 통합신당으로 자리를 옮긴 한 인사는 “YS(김영삼 전 대통령)나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정치할 때처럼 돈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상수 총무위원장(내정)과 김원기 창당주비위원장 등이 동분서주하며 자금 확보에 나서고 있으나 신당에 대한 바깥공기는 좋지 않다는 게 통합신당 내부의 판단이다. 통합신당 인사들은 이 문제를 놓고 수시로 의견을 교환했다. “없는 대로 가자”는 현실파의 주장과 “재력이 있는 ○ ○○의원을 영입, 도움을 청하자”는 적극론이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왔지만 뾰족한 수단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통합신당 인사들은 아쉬운 대로 자기 주머니를 털고 있다. 의원 1인당 1000만원 이내의 특별회비와 매월 50만원씩 당비를 거둬 살림살이에 보탤 예정이다. 당사 규모를 최소화하고 창당대회도 검소하게 치르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3억~4억원 정도의 보증금을 주고 임대할 수 있는 웬만한 빌딩 1∼2개층을 빌려 일단 버티겠다는 생각이다. 통합신당측은 1차로 핵심 참여의원 29명으로부터 400만∼2000만원씩 4억3000만원을 거둬 여의도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자금을 마련하는 데도 몹시 고생했다는 후문이다. 강제성이 없는 ‘십시일반’ 모금에 큰돈을 쾌척한 인사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내년 총선을 준비해야 하는 의원들은 적은 돈도 쉽게 내놓기를 꺼린다는 얘기도 흘러 나온다.
민주당 한 인사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 과정에 들어간 창당자금은 100억원+α”라고 말했다. 지구당 창당에 50억원, 중앙당 창당에 10억원, 당사 마련에 20억원 등이 소요됐다는 것. 그렇지만 이 금액은 보이지 않는 지출에 해당하는 +α를 제외한 것이다. “사람을 모으고 또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하는 창당자금은 보이지 않는 곳에 큰돈이 들어간다”는 게 이 인사의 설명이다. 신당파 한 인사는 이런 설명에 대해 “과거와 다른 정치를 준비하기 때문에 그런 거액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창당자금이 발목을 잡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2001년 1월 새천년민주당의 현판식 모습(왼쪽).2001년 4월 민주당 중앙당 후원회 모습. 민주당은 지난 대선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후원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신당 참여의원들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함으로써 통합신당은 4·4분기 국고보조금으로 11억여원(교섭단체에 균등 분할되는 기본액수)을 받을 수 있다. 의석수에 따라 3억원 가량의+α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이 돈도 그림의 떡이다. 국고보조금은 매 분기의 마지막 달 15일에 나온다. 따라서 12월15일까지는 자체적으로 살림을 꾸려야 한다.
9월21일 민주당 대표직을 사퇴한 정대철 의원이 대표직 사퇴를 놓고 ‘장고’에 들어간 것도 자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뒷말이 따른다. 정의원은 대선 이후 한 번도 당 후원회를 열지 않아 열악한 민주당 재정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지난 8월 10억원대의 급전을 빌려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 돈은 8월 직원 봉급 등 당 운영비로 사용됐다고. 동료의원 몇 명한테서도 3·4분기 국고보조금을 담보로 1억원에서 5억원까지 빌려 썼다고 한다. 정의원측은 9월15일 선거관리위원회가 27억5400여만원의 국고보조금을 지급하자 즉시 부채 청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굿모닝시티 윤창열 대표한테서 받은) 정치자금 문제가 걸려 있는데 (부채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야 뒤탈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의원은 결재를 끝낸 뒤 대표직을 사퇴했다. 이에 앞서 민주당 사무처 인사들은 9월18일, 이상수 전 사무총장에게 공개질의서를 제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대선 자금이 40억원이나 남았는데도 10개월치 당사 임대료를 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며 이 전 총장을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 이 전 총장은 “지난 8개월 동안 사무총장을 하면서 영세기업 등으로부터 빌린 100만원 이하의 소규모 부채를 모두 갚는 등 많은 빚을 정리했으며 15일 받은 국고보조금 27억원으로 추석 전에 빌린 8억원을 갚고 19억원의 부채를 남겨놓고 물러났다”고 민주당 국고보조금의 전용 가능성을 일축했다.
국고보조금도 연말에나 지급 ‘그림의 떡’
통합신당측은 조만간 후원회를 열 계획이다. 그렇지만 전망은 어둡다. 검찰이 어느 때보다 정치자금과 관련해 각을 세우며 정치인들의 검은 돈 수사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당파에 합류한 K의원은 “이런 분위기에서 어느 기업이 자금을 지원하겠느냐”며 비관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신당파 주변에서는 S그룹 L씨의 역할설이 흘러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인 L씨가 신당 창당자금의 반을 책임지고 있다는 말이 정치권 주변에 흘러 다닌다. 그 뒤를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후원그룹들이 움직일 것이란 희망 섞인 전망도 나온다. 지난 대선 당시 노대통령을 지원했던 부산의 한 기업인은 “신당이 창당되면 지원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민주당 잔류파인 K의원은 “다들 엄살을 떨고 있지만 노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모여 당을 만드는 만큼 돈가뭄 현상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통합신당측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특히 노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들이다. 노대통령의 입당 여부도 결정되지 않았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돈’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 통합신당 한 인사는 “리틀 노무현이라는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한번 보라”고 말한다. 신당행이 예상되는 김 전 장관은 요즘 정치 행로보다 가정사로 인해 고민이 더 많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서울 생활에 적응한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3학년인 딸과 아들의 학교 문제 때문에 가족들은 당분간 서울 생활을 해야 하는 모양인데, 공직을 사퇴하면서 아파트 전세를 얻으면서 빌린 1억원의 융자금을 갚으라는 금융기관의 요구에 난감한 입장에 빠진 것 같다.”
이 인사는 “노대통령 주변 사람들이이 이처럼 돈과는 담을 쌓고 살고 있다”며 창당자금과 관련 “애초부터 손을 내밀 생각도 없었다”고 말했다. 민주당 김옥두 전 사무총장은 당 잔류파와 신당파가 갈등을 보이던 9월 초, “2000년 총선 때 권노갑 전 고문이 구해온 돈을 수도권과 영남 후보에게 다 지원했다”고 말했다. 신당파들은 “구태이며 협박”이라고 반발했지만 “의혹만 제기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나선 사람은 없다. 통합신당파들이 잘못 움직일 경우 2000년의 검은 그림자가 부각될 수 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래저래 통합신당의 행로가 피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