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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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과학기술’로 SF 세상 만든다

BT·IT 등 신기술융합사업 본격 추진 … 인간 수행능력 향상 엄청난 변화 예고

  • 박미용/ 동아사이언스 기자 pmiyong@donga.com

    입력2003-07-24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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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퓨전 과학기술’로 SF 세상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로봇(왼쪽), 현재의 슈퍼컴퓨터가 휴대전화 정도의 크기로 작아지려면 NT와 IT의 결합이 필수적이다.

    혈관 속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로봇이 사고나 노화로 손상된 신체 일부분을 되살리는 의료혁명, 현재의 슈퍼컴퓨터가 휴대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아져 언제 어디서나 통신할 수 있는 정보통신혁명, 그리고 수많은 인파 속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려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사회안전시스템의 확보.

    SF(공상과학)영화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부가 새로운 과학기술사업을 추진중이다. 나노기술(Nano Technology·NT), 생명공학기술(Bio Technology·BT),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Technology·IT) 등 3대 첨단 신기술은 물론 항공우주기술(Space Technology·ST), 환경기술(Environment Technology·ET), 심지어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소외돼왔던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CS)까지 동원되는 신기술융합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는 앞으로 10년 이상 이 사업에 약 1조5000억원의 예산을 들일 계획이다. 현재 신기술융합사업의 30여개 세부과제를 선정했고 이중 5개 과제를 올해 추진하기 위해 단장을 공모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과학기술융합사업은 지난 2~3년 사이에 새롭게 선보인 선진국의 과학기술 정책 흐름과 맞물린다.

    미래를 여는 21세기 새 도구

    2001년 12월 미국 대통령의 과학기술 정책 자문기구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인간의 수행능력 향상을 위한 기술의 융합’이라는 주제로 워크숍을 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가들은 NBIC(NT, BT, IT, CS의 첫 글자를 딴 신조어)가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열 21세기의 도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NBIC는 미국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 나노기술 정책 전문가인 미하일 로코 박사가 2000년 처음으로 제안한 것으로, 이 아이디어가 2001년 12월의 워크숍을 통해 발전한 것이다.



    로코 박사는 이들 4개 분야가 원자나 분자의 세계인 ‘나노’ 수준에 모아진다는 데 주목했다. 1나노미터(nm)는 10억분의 1m로, 수소원자 5개가 한 줄로 늘어섰을 때의 길이다. BT는 너비가 2nm인 DNA 이중가닥이 주요 연구대상이고, IT의 경우 반도체 칩의 회로선 폭을 수십nm 또는 그 이하로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NT의 경우 나노 단위에서 비롯된 기술 분야이므로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인지과학도 연구대상이 마이크론(10-6m) 단위의 신경세포에서 나노 단위의 구체적인 생체전달분자로 내려와 있다.

    2001년 12월의 워크숍을 마치고 만들어진 보고서에는 NBIC가 ‘인간의 수행능력 향상’을 목표로 한다고 돼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부각된 인지과학과 첨단과학기술의 만남이 보여주는 미래상은 SF적이다. 초소형 센서와 옷처럼 입을 수 있는 컴퓨터가 개발돼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건강상태을 체크할 수 있고, 주변의 위험물질에 대한 지각능력을 높일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의 정신을 컴퓨터에 다운로드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개발돼 한 사람의 생각을 화성과 같은 다른 세계로 전송하거나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길 수도 있다.

    ‘퓨전 과학기술’로 SF 세상 만든다

    NT, BT, IT가 융합돼 혈관 속을 지나다닐 정도로 작은 로봇이 만들어지면 노화나 사고로 인한 신체 일부의 손상이나 기능 저하를 막을 수 있다(왼쪽).나노세포의 구조.

    융합기술은 개별 인간의 능력을 높이는 데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안전보장에도 이용된다. 미국 과학자들은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고 진화하는지를 예측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등장해 파시즘이나 테러를 일으키는 과격단체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NBIC는 인간의 수행능력 향상이라는 기본목표를 달성함과 동시에 과학기술을 포함한 사회, 경제 등에 전반적으로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일본에서도 신기술 융합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01년 12월 ‘새로운 가치와 시스템 창출을 위한 횡단적 연구개발’이란 제목의 건의안이 일본 종합과학기술회의에 제출됐다. 미국의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 해당하는 일본 종합과학기술회의의 회의 결과에 따라 지난해 ‘횡단적 과학에 의한 유비쿼터스 정보사회 연구’란 선도적 연구과제가 추진됐다. 횡단적 과학은 여러 분야가 함께 참여해 언제 어디서나 정보통신이 가능한 사회를 연구한다는 말이다. 일본의 경우 융합을 통해 구체적으로 IT 분야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전략이다. 이 과제는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까지도 융합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부는 지난해부터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신기술 융합과 관련한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리고 올 1월 말부터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과 20여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구개발정책연구회를 운영하고 있다. 이 연구회에서는 융합기술을 크게 4가지로 나눴다. BT와 IT가 결합한 BIT, NT와 IT가 결합한 NIT, NT와 BT가 결합한 NBT, 그리고 ST, ET, CS와 세 가지 첨단 신기술이 결합하는 시스템통합기술(System Integration Technology ·SIT)이 그것이다. 연구개발정책연구회는 이들 4개 분야에 해당하는 유망 기술 31가지를 선정했다.

    국내 연구기반 걸음마 단계

    그런데 국내에서 추진중인 과학기술의 융합은 여러 면에서 미국의 그것과 다르다. 우선 미국은 신기술 간 융합의 목적을 인간의 수행능력 향상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즉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여러 과학기술이 융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이와 달리 개별 과학기술 분야들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을 과학기술의 융합으로 극복한다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융합기술은 1990년대 후반 들어 본격화한 학제간 연구개발에 바탕을 둔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학제간 연구나 교육이 이미 보편화됐다. 미국의 융합기술 주창자들은 나아가 교육의 전면적인 개편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나노 단위에서 우주 단위까지 물질세계의 통합적 이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르네상스식 인간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를 위해 대학이나 대학원이 아니라 초등학교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융합기술은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연구기술의 융합에 바탕이 되는 학제간 교육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따라서 융합기술과 관련한 교육도 미흡하다. 정부가 추진하는 신기술융합사업은 의도적으로 다른 분야의 과학기술자들이 함께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융합기술 전문인력도 이 사업을 통해 양성할 계획이다. 즉 구체적인 기술융합 과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인력을 양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10년 이상 추진할 연구과제라면 지금부터라도 학제간 연구개발과 기술융합시대에 대비한 새로운 과학기술교육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융합전문가 양성기관으로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바이오시스템학과가 있다. 정부는 신기술융합사업을 추진하면서 정부 출연 연구소와 대학이 연합한 정부 출연 연구소 연합대학원 대학을 설립할 것이라는 계획도 발표한 바 있다. 과학기술 정책의 기본이 연구자들을 양성하는 데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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