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약사가 휴가를 가도 의원과 약국은 문을 닫지 않는다. 아르바이트 의사, 약사가 있기 때문이다.
동네 의원 앞을 지나다가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1년 사계절이 다 지나도록 동네 의원 앞에 ‘금일 휴업’이나 ‘휴가중’이란 안내문이 붙은 것을 좀처럼 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네 의원에 의사가 한 명밖에 없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라며 그들의 ‘고단한 인생’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반면 동네 의원을 자주 찾는 환자들은 일반인들의 이런 걱정이 ‘기우’임을 이미 알고 있다. 여름 휴가철은 물론, 평상시에도 ‘선생님’이 바쁘면 대학을 갓 졸업한 듯한 젊은 의사가 대신 진료를 하고 있기 때문. 휴가를 안 가는 게 아니라 휴가를 간 사실을 일반인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동네 의원 원장들이야 “같은 의사인데 뭐가 문제냐”고 하겠지만 환자 입장에서 보면 ‘휴가 간 원장을 대신해 잠시 진료를 해주는’ 이들이 무척 의심스럽다. 의원 어디를 보아도 이들의 의사면허증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에 관한 간단한 소개도 없다. 의원을 운영하거나 정식으로 고용된 의사는 반드시 의사면허증을 환자들이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두도록 돼 있지만 이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환자 입장에선 이들이 의사인지 아닌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이들은 속칭 ‘알바 의사’, 즉 시간제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의사들로 종합병원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나 공중보건의들이 대부분이다.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공중보건의가 된 사람도 일부 있지만 알바 의사의 대다수는 의사면허증만 가지고 있는 비전문의들이다.
문제는 이들의 대체진료(이하 대진)가 불법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 의료법은 의원 대표자의 부재시 ‘대진 의사’를 보건소에, 건강보험법은 약국 대표자의 부재시 ‘대진 약사’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의 동네 의원과 약국은 신고도 하지 않은 채 이들을 ‘대진의’로 쓰고 있는 실정이다.
“조사 기관 10곳 중 3곳 적발”
하지만 전문성이 떨어지는 비전문의의 미신고 진료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불거졌다. 휴가나 입원 등의 이유로 대진의를 쓰는 원장들 중 상당수가 의원을 비운 기간에도 자신이 진료를 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보험급여(진료비)를 청구해 돈을 타 간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
실제로 지난해 8월10일부터 18일까지 외국으로 휴가를 가 의원을 비운 경기도 S시 P의원 원장 김모씨는 해당 기간 동안 S대병원 전공의에게 진료를 맡겼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진료한 것처럼 서류를 꾸며 보험급여를 청구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376만원의 진료비를 지급받았다. 공단이 밝힌 김씨의 부당 청구 진료 건수는 8일 동안 무려 147건. 같은 지역의 L의원 이모원장 역시 지난해 2월, 4일의 출국 기간 동안 대학병원의 전공의를 대진의로 쓴 후 이 기간 동안 진료한 104건에 대한 127만원 상당의 보험급여를 청구해 타냈다. 심지어 이 지역 H의원 원장은 출국 기간 동안 관할지역 밖의 공중보건의로 하여금 대진토록 한 뒤 보험급여를 청구했다.
‘주간동아’가 사회보험노동조합(위원장 박표균)으로부터 입수한 건강보험공단 내부자료를 보면 이런 현상이 극소수 의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의료계 전반의 관행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동네 의원 가운데 일반의원보다는 치과의원이 더욱 심각하고, 약사와 한의사도 이런 류의 부당 청구에 동참한 것으로 밝혀졌다.
2002년 전공의 파업 당시 모습. 열악한 전공의의 근무환경은 그들이 시간제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위).2000년 의사파업 때 휴진 안내문을 붙이고 문을 닫은 의원. 혹 아르바이트 의사를 구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이는 총 조사 대상 보험요양기관의 24%에 해당하는 수치로, 건강보험공단의 주장에 따르면 치과의원, 일반의원, 약국, 한의원을 통틀어 10곳 중 3곳은 국민이 낸 건강보험료를 부당하게 편취한 셈이다. 부당 청구 행위가 적발된 635개 보험요양기관 가운데 치과의원이 228개소(35.9%), 일반의원이 193개소(30.4%), 약국이 133개소(20.9%), 한의원이 81개소(12.8%)였다.
이는 건강보험공단이 대표자가 1인인 해당 지역 보험요양기관 대표들의 출입국 날짜와 병원 입원 상황을 출입국관리소와 각 종합병원에 일일이 확인한 결과 드러난 것으로, 건강보험공단측은 국내여행이나 다른 개인적인 이유로 의원을 비운 경우까지 합치면 부당 청구 규모가 엄청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건강보험공단 급여관리실의 한 관계자는 “아르바이트 의사나 약사를 쓴다 해도 보건소나 심사평가원에 정식으로 신고하고 해당 의사의 이름으로 처방전을 발행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한다.
“어쨌든 의사가 진료” 소송 불사
하지만 이들 의원들이 아르바이트 의사와 약사를 고용하고도 정식으로 신고를 하지 못하는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의원들이 전공의와 공중보건의를 대진 의사로 많이 쓰는 이유는 전문의를 쓰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데다, 후배 의사에게 용돈이라도 벌게 해주겠다는 배려 차원. 하지만 전공의가 정식으로 대진 의사로 신고하기 위해서는 현재 수련을 받고 있는 병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식 신고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대진 의사 생활을 하고 있는 S대학 전공의 박모씨는 “전공의의 봉급 수준이 워낙 낮아 시간외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어렵다”며 “자신이 속한 병원에서도 인력이 모자라 난리인데 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개인의원 대진 허락을 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공중보건의는 상황이 좀더 심각하다. 농어촌특별세법, 병역법 등은 ‘공중보건의는 공중보건 업무에 종사하는 기간 동안 근무 지역 안에 거주해야 하고, 그 지역의 시장, 군수 또는 구청장의 허가 없이 근무지역을 이탈해서는 안 되며, 공중보건업무 외의 업무, 특히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업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 물론 기초단체장의 허가를 받고 대진의로 나설 수도 있지만 공중보건의가 국가에서 봉급을 받고 있고,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중이라는 점에서 이를 허락할 기초단체장은 드물다고 보아야 한다. 사회보험노조 송상호 선전국장은 “이번 조사 결과 밝혀진 부당 청구 사례 중 많은 경우가 공중보건의가 대진의로 근무한 경우”라며 “이들은 신분 자체가 군인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영리를 목적으로 한 대진의로 근무한 자체가 불법이므로 이들에 대한 정식 처벌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대한의사협회(이하 의사협회)의 반응은 “건강보험 재정 확보에 혈안이 된 공단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다”는 것. 의사협회 김선욱 법제이사(변호사)는 “신고 절차를 어긴 것일 뿐, 어쨌든 의사가 진료를 한 것인데 이를 부당 청구로 인정해 진료비를 환수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고 법 규정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처사”라며 “절차를 어긴 부분에 대해선 각급 보건소, 보건복지부 등 감시 부서에서 행정처분을 할 사안이지 보험급여를 삭감할 내용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의사협회 권용진 부대변인은 또 “전공의와 공중보건의의 지위 및 처우에 관련된 기본 법 규정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고, 이런 일이 관행처럼 이루어져오던 현실을 무시하고 홍보와 교육 절차 없이 갑자기 전공의와 공중보건의의 대진을 부당 청구로 몰고 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부당 지급된 진료비를 환수하고 있지만 논란이 많아서 법을 위반한 공중보건의에 대한 형사고발은 고려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건강보험공단 김병선 급여관리2부장) “법을 위반한 의사를 왜 고발하지 않느냐”는 사회보험노조와 “보험급여 환수에 대해 행정소송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사협회의 갈등 사이에서 보험 가입자의 대표격인 건강보험공단의 공신력이 도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