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전 청와대비서실장이 6월18일 오전 대북송금과 관련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법에 들어서고 있다.
“동교동(DJ)에 대한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지금 거기를 가면 오히려 어른에게 해가 된다. 어른이 한 일을 내가 알고, 내가 한 일을 어른이 아는데 굳이 동교동에 가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검찰 소환 전 측근들과 대응책 모색
‘지금은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어른을 모셔야 한다’는 박 전 실장의 판단은 실상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마포 사무실에서 측근들과 수십 차례나 대책회의를 하며 대응책을 모색했지만 언론에 ‘DJ-박지원’ 커넥션에 대한 보도는 단 한 줄도 나지 않은 것이 그 방증이다.
박 전 실장은 검찰 소환 전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를 했다고 한다. 대책회의 흐름을 읽고 있던 한 동교동 인사는 “박 전 실장이 검찰에 가기 전 ‘오랜만에 내 시간을 가질 것 같다’며 측근에게 ‘한강’과 ‘태백산맥’ 등 장편 대하소설을 구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전했다. 박 전 실장이 구속되기 직전 입에 담은 ‘꽃잎론’의 배경도 비슷하다. 앞의 동교동 인사에 따르면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가 전화를 해 ‘정상회담과 DJ는 역사가 지켜줄 것’이라며 위로하자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하며 흘러간 권력에 대한 순명(順命)의 자세를 보였다”는 것.
노무현 대통령이 6월22일 서울 명륜동을 방문, 주민들과 담소하고 있다.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 연장 거부를 결정하자 한 동교동 인사가 “박 전 실장에게 빨리 알려야겠다”며 종종걸음을 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박 전 실장측은 노대통령의 특검 연장 거부 결정을 일정 부분 알고 있는 분위기였다. 박 전 실장측의 한 관계자는 “연장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며 “박 전 실장이 구속되기 전 이미 대책회의에서 일정 부분 논의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정치적 복선을 깔지 않는다면 특검의 활동을 연장할 이유가 없다”며 “돌출한 150억원 수뢰 의혹은 검찰에서 수사할 사안”이라며 논리적 명분을 제시했다.
동교동과 당내 구주류 인사들은 민주당 내 각 세력과 치열한 기(氣) 싸움을 펼치며 특검 무력화 작업에 나섰다. 반격의 선봉에 선 사람은 DJ였다. 그는 박 전 실장의 구속설, DJ 특검 조사설 등이 퍼진 6월10일경,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언론회견을 계획했다고 한다. 이런 계획은 6·15 남북 정상회담 3주년을 맞아 KBS와 한 인터뷰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동교동 핵심 관계자는 “우리가 말리지 않았다면 훨씬 강경한 표현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말리지 않았다면 참여정부의 대북정책과 외교에 대해 DJ식 비판이 가해질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 인사는 “DJ가 ‘특검 소환에 출석하겠다, 남북 정상회담 등 통치행위에 대한 이 정부의 인식이 부족하다’ 등 메가톤급 발언을 던졌다면 민주당은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내년 총선 결과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것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의 두 주역인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과 박지원 전 실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송두환 특별검사,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왼쪽부터)
그러나 노대통령의 특검 연장 거부는 필연적으로 여야의 정쟁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이미 제2의 특검을 예고하고 있다. 당 지도부가 정비되면 치열한 대여투쟁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공격 소재와 포인트도 이미 일정 부분 정리했다. 당의 한 관계자는 13일 이성헌 의원이 제기한 제2의 대북송금 사건을 주시하라고 주문한다. 이의원은 13일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 “남북 정상회담 대가로 우리측에서 북측에 보낸 돈은 모두 10억 달러”라면서 “현대가 5억 달러를, 나머지 5억 달러는 국내 굴지의 회사가 보냈다는 제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당시 현대 이외 기업의 모금에도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이의원은 22일 통화에서 “당 지도부와 의견을 교환,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이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DJ 손을 들어주었지만 정작 DJ와 동교동은 생각 밖으로 시큰둥한 반응이다. 이미 6·15 정상회담이 폄훼되고 관련자들이 범죄집단으로 치부되는 분위기에 대해 마음이 상할 대로 상했다는 것. 동교동 인사인 정균환 민주당 총무가 청와대의 DJ 특검수사 제외 발언에 대해 “DJ에 대한 모욕”이라며 반박한 것도 이런 기류와 관련이 있다. 특검 연장 반대로 당내 화합을 꾀했지만 DJ와 노대통령의 관계는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박 전 실장의 150억원 수뢰 혐의와 관련, 검찰의 수사 방향과 수위를 놓고 노대통령과 동교동은 또 한 번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 그 과정에 하나의 뇌관만 터져도 살얼음판처럼 위태로운 양 진영의 한집 살림은 쪼개질 수밖에 없다.
한숨을 돌린 박 전 실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실장측은 대북송금과 관련, 명분도 내용도 모든 게 유리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제기된 의혹을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나가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광석화 같은 특검 회오리로 인해 수세에 몰렸지만 이제 바닥부터 하나씩 치고 올라오겠다는 입장이라는 것. ‘마포팀’과 수차례 도상에서 검토했던 시나리오를 가동할 것이라는 게 한 측근의 설명이다. 박 전 실장의 첫번째 반격은 정상회담의 주역에서 하루아침에 파렴치범으로 몰고 간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의 전면전이다. 예정에 없던 상황이지만 그에 대한 조치 없이 반격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전 회장은 150억원 정치자금 지원설을 특검에 흘린 장본인이다. 박 전 실장은 19일 이 전 회장을 명예훼손과 공무집행방해, 횡령 등 혐의로 고소 고발했다. 박 전 실장이 담당 재판부에 ‘괘씸죄’로 찍힐 위험을 무릅쓰면서 고소장을 제출한 것은 ‘나름대로의’ 자신감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 전 실장측은 배달사고설을 언급하고 있다. 당에서는 최종 귀착지로 권력실세였던 K씨의 이름이 거론된다. 이 문제가 공론화되는 것은 여권으로서는 뼈아픈 상황의 도래를 의미한다. 따로 굴러가는 것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특검과 신당 창당, 그리고 2004년 총선은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박 전 실장은 그 한가운데에 서서 청와대와 정치권을 응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