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대 경영체제에 돌입한 을유문화사의 정상준 실장, 현암사의 형난옥 대표, 범문사 유영권 사장(왼쪽부터).
을유는 1945년 12월1일 ‘민족문화의 선양과 선진 세계문화의 섭취’를 사시로 내걸고 설립됐다. 한국출판문화협회장, ‘출판저널’ 발행인 등을 지낸 창업자 정진숙 회장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사무실로 출근한다. 하지만 을유는 70년대를 지나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95년 창립 50주년을 맞았을 때도 한국출판 1세대라는 자부심보다 당장 후계구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현대적 감각으로 기획 ‘대박’
3년 전 정회장의 손자인 정상준씨(35)가 합류했다. 할아버지가 회장, 큰아버지(정낙영·미국 거주)가 사장인 층층시하에서 기획실장 직함을 받은 정씨는 원래 광고기획사에서 영화 수입·배급 업무를 했고 일신창투에서 영화 투자를 담당해온 영화통.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을유에 합류하면서 ‘딴따라’ 출신이 출판계 물을 흐려놓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고백한다. 창립 60년을 바라보는 회사지만 그가 부임했을 때 속사정은 더없이 어려웠다. 과감한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첫 작품으로 90년대 을유의 히트작 ‘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를 꺼내 리메이크했다. 공교롭게도 “유서 깊은 을유가 처세술 관련 서적 출판사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바로 그 책이었다.
을유는 최근 미국 랜덤하우스의 ‘유니버설 히스토리’ 시리즈를 한국 실정에 맞게 선별해 ‘크로노스’ 총서로 발간하고 있다. 또 2001년부터 ‘고문진보’ ‘사기열전’ ‘삼국유사’ 등 을유의 방대한 출판목록에서 찾아낸 고전 완역본을 재출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삼국유사’가 MBC ‘느낌표’ 캠페인 도서로 선정된 것을 놓고 혹자는 “순전히 운이 좋아서”라고 말하지만 58년 역사의 출판사만이 보유할 수 있는 콘텐츠를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린 기획의 승리였다. 을유와 함께 해방둥이인 현암사도 지난해 3세대 경영체제에 돌입했다. 창업주인 고 조상원 회장은 1980년 아들 근태씨에게 경영을 맡겼고, 22년 뒤 조사장은 전문편집인 출신인 형난옥 주간(44)에게 대표이사 자리를 물려주었다.
현암사는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장 부침 없이 전통과 명성을 유지해온 출판사로 꼽힌다. 조회장은 법전이라는 영원한 스테디셀러를 물려주었고, 조사장은 ‘장길산’ ‘어둠의 자식들’ ‘빙벽’ 등의 소설과 한국학 분야의 ‘현암신서’를 개척했다. 90년대 형난옥 주간 체제에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100가지’ 시리즈가 추가됐다.
형난옥 대표는 “돌아가신 회장님이나 사장님 모두 경영자이기 이전에 훌륭한 편집자였다”며 “가업을 잇는 문제가 아니라 현암사의 출판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좋은 책 만들기 96년’. 현존하는 최고령 출판사 동명사의 자부심을 말해주는 문구다. 1907년 육당 최남선 선생이 설립한 ‘신문관’이 1922년 동명사로 개명해 오늘에 이른다. 해방 후 둘째아들 최한웅(전 서울대 의대 교수) 사장이 부임해 민족의 흥망이 과학입국과 경제재건에 있다며 출판방향을 과학기술로 전환했다. 91년에는 피부과 전문의로 이름을 날리던 육당의 손자 국주씨가 가업을 이어받았으나 발행인 직함만 남기고 사실상 경영권을 아내 이은주 사장(48)에게 넘겼다. 이사장 부임 후 최대 수확이라면 육당 선생의 ‘금강예찬’을 새롭게 펴낸 것을 꼽을 수 있다.
한국 현대사와 함께 해온 유서 깊은 출판사들이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특히 3세대 경영체제에 접어들면서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최근 가장 화려한 변신을 하고 있는 곳이 범문사. 1999년 설립자(유영국)의 손자인 유영권 사장(40)이 부임한 후 범문사는 해외서적 유통에서 출판과 서점 경영을 아우르는 종합미디어그룹으로 도약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할아버지가 한국이 발전하려면 서둘러 서구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범문사를 설립하셨다. 10년 뒤 ‘사상계’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한국출판문화협회 부회장까지 지내신 아버지(유익형)가 맡으셨다가 IMF 외환위기 때 경영이 어려워진 출판사를 물려주고 돌아가셨다. 하늘에 대고 ‘왜 제게 이런 짐을 주셨느냐’고 원망한 적도 있다.”
유사장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제일기획에 입사해 8년 동안 광고전문가로 일했고, 삼성 비서실에서 1년 동안 기획홍보 업무를 해왔다. 평소 출판과 유통 분야를 고리타분하게 여겨 쳐다보지도 않았던 그는 출판사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업을 잇게 됐다. 하지만 유사장은 공격적인 전략으로 지난해 종로에 있는 범문사 본사를 영어 전문서점 ‘잉글리시 플러스’로 바꾸고 목동에 마련한 신사옥 1층에 서점을 여는 등 지금까지 15군데에 영어 전문서점을 열었다. 또 2000년 어린이 교재 전문 자회사인 ‘언어세상’을 설립했다.
유사장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음반업계가 고전하듯이 출판도 새로운 트렌드에 대비해야 한다”며 독일의 출판재벌 베텔스만처럼 음반, 방송, 출판을 아우르는 미디어그룹을 꿈꾼다.
옛말에 ‘부자 3대 못 간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출판계의 3세대 경영체제는 낙관적이다. “돈 벌려면 뭐 하러 책 만들겠냐”는 출판쟁이의 고집이 이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현암사 형난옥 대표는 “문화는 하루아침에 숙성되지 않는다. 큰 나무가 되기 위해 튼튼한 뿌리가 필요하다”고 전통의 힘을 강조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비즈니스는 망한다”는 유영권 사장의 말도 출판계가 놓쳐서는 안 된다. 학원사, 정음사, 계몽사 등 전통의 출판사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