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9일로 미군이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이라크는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한 달 동안 점령국인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는 전후 이라크 재건을 누가 지휘하느냐를 놓고 국무부와 국방부의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5월6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직업 외교관이자 테러 전문가인 폴 브레머 전 대사(61)를 이라크 최고행정관으로 임명했다. 이미 제이 가너 전 예비역 중장이 행정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의 임명은 뜻밖이었다.
지금 이라크에 필요한 것은 재건 작업의 사령탑이라기보다는 치안을 담당할 보다 많은 수의 병사와 전기 기술자, 건설 기술자들이다. 압도적인 화력의 지원 하에 기동력 있는 정예부대를 투입해 전쟁을 조기에 끝낸다는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전략은 전쟁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전후 이라크의 안정을 지키는 데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전후 주도권 전투 파월의 판정승 대내외 과시
미 국방부의 재건인도지원처 처장인 가너 행정관이 이끄는 팀은 바그다드가 함락된 지 12일 만에 바그다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전에 대한 우려 때문에 도착을 미룬 탓이었지만 신속히 대응할 기회를 놓침으로써 수습에 더 많은 시일이 걸리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브레머 전 대사의 임명이 이처럼 초기 대응을 잘못한 가너 처장에 대한 문책의 성격은 아니다. 그보다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럼스펠드 장관이 전후 이라크 재건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2차 전투의 결과다.
1차전은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와 국방부 산하 재건인도지원처의 대결이었다.
국제개발처는 해외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를 주 임무로 하는 부서여서 이라크에 대한 24억 달러의 원조를 자신들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부처가 어느 부처인데 왜 끼어드느냐고 반발하면서 재건인도지원처를 앞세웠다. 이 승부는 파월 장관이 국제개발처가 재건인도지원처 산하로 들어가는 데 동의함으로써 럼스펠드 장관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가만있을 파월 장관이 아니다. 재건의 최고책임자 자리를 놓고 뒤집기에 들어갔다. 브레머 전 대사는 완벽한 캐스팅이었다. 그는 파월 장관의 비둘기파가 아니어서 그의 임명을 둘러싸고 오히려 럼스펠드 장관의 승리라고 전하는 미국 언론도 있을 만큼 워싱턴에서 폭넓은 인맥을 쌓고 있다. 파월 장관과 럼스펠드 장관의 갈등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부시 대통령은 이번에는 파월 장관의 손을 들어줄 차례라고 판단, 파월 장관이 추천한 브레머 전 대사를 받아들였다.
이 같은 움직임을 알고 럼스펠드 장관은 발표하기 며칠 전 이례적으로 “가너 처장이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으며 다른 인사 발표는 없을 것”이라는 성명까지 냈지만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럼스펠드 장관으로서도 브레머 전 대사라면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다. 브레머 전 대사는 럼스펠드 장관과 교분이 있고 이슬람 무장단체 지도자들의 암살을 지지하는 등 테러리즘에 대한 강경대응 입장도 서로 일치한다.
하버드대와 예일대 등에서 공부했으며, 국무부에서 23년간 재직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 말라위, 노르웨이 근무를 거쳐 1983년 네덜란드 대사, 86년 대(對)테러 담당 무임소대사를 역임했다. 국무부를 떠난 뒤에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컨설팅 회사에 합류했다가 99년 하원에서 전국테러위원회 의장에 선출돼 미국의 대테러 정책을 평가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특히 2000년 6월 미 의회 증언을 통해 1941년 12월7일의 진주만공격과 같은 대규모 테러 위협이 있을 거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2000년 10월 마시 앤드 맥클레난사의 정치 위기 부문 책임자로 영입돼 위기 자문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6월 그를 국토안보자문위원회 위원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라크전쟁 직전에는 유럽 내 우방들이 사담 후세인 축출을 위한 연합군에 가담할 것이라는 파월 장관의 오판을 지지한 전력이 있다.
5월6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직업 외교관이자 테러 전문가인 폴 브레머 전 대사(61)를 이라크 최고행정관으로 임명했다. 이미 제이 가너 전 예비역 중장이 행정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의 임명은 뜻밖이었다.
지금 이라크에 필요한 것은 재건 작업의 사령탑이라기보다는 치안을 담당할 보다 많은 수의 병사와 전기 기술자, 건설 기술자들이다. 압도적인 화력의 지원 하에 기동력 있는 정예부대를 투입해 전쟁을 조기에 끝낸다는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전략은 전쟁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전후 이라크의 안정을 지키는 데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전후 주도권 전투 파월의 판정승 대내외 과시
미 국방부의 재건인도지원처 처장인 가너 행정관이 이끄는 팀은 바그다드가 함락된 지 12일 만에 바그다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전에 대한 우려 때문에 도착을 미룬 탓이었지만 신속히 대응할 기회를 놓침으로써 수습에 더 많은 시일이 걸리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브레머 전 대사의 임명이 이처럼 초기 대응을 잘못한 가너 처장에 대한 문책의 성격은 아니다. 그보다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럼스펠드 장관이 전후 이라크 재건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2차 전투의 결과다.
1차전은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와 국방부 산하 재건인도지원처의 대결이었다.
국제개발처는 해외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를 주 임무로 하는 부서여서 이라크에 대한 24억 달러의 원조를 자신들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부처가 어느 부처인데 왜 끼어드느냐고 반발하면서 재건인도지원처를 앞세웠다. 이 승부는 파월 장관이 국제개발처가 재건인도지원처 산하로 들어가는 데 동의함으로써 럼스펠드 장관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가만있을 파월 장관이 아니다. 재건의 최고책임자 자리를 놓고 뒤집기에 들어갔다. 브레머 전 대사는 완벽한 캐스팅이었다. 그는 파월 장관의 비둘기파가 아니어서 그의 임명을 둘러싸고 오히려 럼스펠드 장관의 승리라고 전하는 미국 언론도 있을 만큼 워싱턴에서 폭넓은 인맥을 쌓고 있다. 파월 장관과 럼스펠드 장관의 갈등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부시 대통령은 이번에는 파월 장관의 손을 들어줄 차례라고 판단, 파월 장관이 추천한 브레머 전 대사를 받아들였다.
이 같은 움직임을 알고 럼스펠드 장관은 발표하기 며칠 전 이례적으로 “가너 처장이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으며 다른 인사 발표는 없을 것”이라는 성명까지 냈지만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럼스펠드 장관으로서도 브레머 전 대사라면 반대할 이유가 별로 없다. 브레머 전 대사는 럼스펠드 장관과 교분이 있고 이슬람 무장단체 지도자들의 암살을 지지하는 등 테러리즘에 대한 강경대응 입장도 서로 일치한다.
하버드대와 예일대 등에서 공부했으며, 국무부에서 23년간 재직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 말라위, 노르웨이 근무를 거쳐 1983년 네덜란드 대사, 86년 대(對)테러 담당 무임소대사를 역임했다. 국무부를 떠난 뒤에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컨설팅 회사에 합류했다가 99년 하원에서 전국테러위원회 의장에 선출돼 미국의 대테러 정책을 평가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특히 2000년 6월 미 의회 증언을 통해 1941년 12월7일의 진주만공격과 같은 대규모 테러 위협이 있을 거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2000년 10월 마시 앤드 맥클레난사의 정치 위기 부문 책임자로 영입돼 위기 자문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6월 그를 국토안보자문위원회 위원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라크전쟁 직전에는 유럽 내 우방들이 사담 후세인 축출을 위한 연합군에 가담할 것이라는 파월 장관의 오판을 지지한 전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