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5월1일 청와대에서 국정원 염돈재 1차장, 박정삼 2차장, 김보현 3차장, 서동만 기조실장(오른쪽 두 번째부터)에게 임명장을 준 뒤 담소를 나누고 있다.
최근 민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사석에서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이 당직자의 푸념에는 민주당의 ‘유능한’ 당료가 청와대에 합류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깔려 있다.
노대통령의 청와대 인사의 특징은 한마디로 ‘아는 사람’을 쓴다는 것. 그 결과 능력과 상관없이 노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청와대에 들어간 인사들이 적지 않았고, 지금처럼 당정 간 유대가 단절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게 민주당 당료들의 판단이다.
노대통령 자신이 직접 알지 못하는 사람을 기용한 일부 부서에서 내부 갈등이 일어난 것을 보고 노대통령이 자신의 선택을 내심 후회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곧 있을 청와대 개편 대상에 ‘대통령이 잘 모르고 뽑았던’ 일부 인사들이 포함될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과 문제점이 노출됐는데도 노대통령의 인사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거라는 조짐은 없다. 오히려 집권 초기보다 더 강경하게, 인사에 관한 한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모습이 두드러지고 있다. 노대통령의 ‘옹고집 인사’의 가장 최근의 예는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고영구 원장과 서동만 기조실장 인사다.
“국회 무시한 인사” 못 들은 척
노대통령은 국회 정보위원회의 인사청문회 결과를 철저히 무시한 채 자신의 고집대로 국정원 인사를 단행했다. “국정원 개혁에 고영구-서동만 카드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당초 고원장을 임명한 뒤 후속인사에 적지 않은 뜸을 들일 때만 해도 정치권에서는 “여야 정치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동만 교수를 기조실장에 임명하는 무리수는 두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서교수의 대타를 물색하느라 국정원 후속인사에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서교수가 그대로 임명됐다. 한나라당이 “국회를 무시한 오기 인사”라고 강력 반발하고 나섰지만 청와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노대통령은 이날 서교수를 임명하면서 “자질과 도덕성을 문제 삼았다면 국회의 의견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열주의적 이념 공세를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갈 수 없고,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기조실장보다는 국내담당 2차장 임명에 고심했다고 한다. 국내문제를 담당하는 2차장이야말로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과 개혁의 정도를 가늠할 요직.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2차장에 임명된 박정삼 굿데이신문 대표를 포함해 박무 머니투데이 사장, 최병권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등 3명이 후보로 검토됐다”며 “이 인선과정이 시간이 좀 걸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즉 2차장 인선에 시간이 걸려 국정원 후속인사가 늦어졌을 뿐 서동만 기조실장 임명 건은 애당초 논란 대상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자기 고집대로 사람을 쓰는 노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드러났다. 새 정부 조각 때 노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나서 장관 임명 배경을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그 직후 몇몇 장관이 구설수에 휘말렸다.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이 아들의 이중국적 문제로,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이 남해신문 사장 시절 이 신문을 지방선거에 활용한 의혹으로 언론에 이름이 거론됐다. 하지만 노대통령은 이런 여론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측근’이라고 밝힌 안희정씨.
단 한 번, 노대통령의 인사가 관철되지 못한 것이 바로 서동구 전 KBS 사장의 경우다. 당시 노대통령은 서 전 사장의 사표 제출에 국회 국정연설에서까지 이를 해명하는 등 임명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는 스스로 “오늘이 집권 이후 가장 침통한 날”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인사실패에 곤혹스러워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당시 노대통령의 자존심이 무척 상한 것 같았다”고 전했다.
노대통령의 사람 쓰는 스타일은 한마디로 한번 믿음을 주면 누가 뭐래도 끝까지 믿고 일을 맡기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야인’시절부터 노대통령과 가깝게 지낸 학자 출신의 한 측근은 노대통령의 용인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대통령에게서 어떤 미션(임무)을 받으면 덜컥 겁이 난다. 내가 어떻게 보고서를 만들어가든 노대통령은 믿고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하기 때문이다. 자칫 내 실수로 보고서가 잘못될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노대통령은 그렇게 해서 나쁜 결과가 나왔다고 나를 책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신임을 받는 입장에서 어떻게 대충대충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한번 믿은 사람에게 전폭적 신뢰를 보내는 노대통령의 용인술은 최근 대통령 본인의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5월1일 MBC-TV ‘100분 토론’에 출연한 노대통령은 나라종금 로비사건과 관련, 자신의 측근인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측근이라는 용어는 싫어한다. 그러나 안희정씨는 내 측근이 맞다. 나는 오래 전부터 안희정씨를 내 동업자라고 얘기해왔고 동지라고 감히 말한다. 이 문제(나라종금으로부터 2억원을 수수한 사건)에 관해 내 입장을 밝히려고 그동안 한두 번 시도했지만 참모들의 반대에 부딪혀 밝히지 못했다. … 나중에 다 밝히겠지만 어떻든 안희정씨는 나를 위해 일해왔고 나로 말미암아 지금 고통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안씨는)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일한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일해온 사람이고 나로 말미암아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다.”
측근 맹목적 신뢰 악영향 우려
이런 대통령의 측근에 대한 애정 표현에 대해 노대통령의 측근들도 현재까지는 무리 없이 호응하고 있다는 평가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노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일수록 비교적 소리 나지 않게 일을 잘하고 있다는 평이다. 특히 노대통령의 부산 인맥들의 활약은 대단하다. 사심 없이 대통령을 돕는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감탄할 정도”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에 대한 이 같은 각별한 애정 표현은 역대 대통령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노대통령만의 개성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측근에 대한 동지애와 맹목적 신뢰가 국가운영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지 많은 이들이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노대통령의 자기 사람, 아는 사람만 쓰려는 ‘옹고집 인사’가 정치권에 불필요한 긴장을 조장하고 이로 인해 사회적 피로를 몰고 온다는 지적도 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라고나 할까. TV토론이 있던 5월1일 밤, 안희정씨를 ‘측근’이라고 표현하는 노대통령의 말에 편안하게 TV를 보던 많은 국민들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