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쇼이 오페라단의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 중 발레 장면. 볼쇼이 극장의 발레, 오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정작 볼쇼이 극장은 지난 10년 동안 재정난과 내부 문제로 고전해왔다(위).볼쇼이 극장의 화려한 내부 모습. 올해로 227주년을 맞은 볼쇼이 극장은 지난해 11월 950석 규모의 제2극장을 완공했다.
국내 어느 대기업 모스크바 지사에 근무하는 박모 과장은 출근하자마자 러시아 여직원에게 다급하게 지시했다. 본사에서 출장온 임원이 “그 유명한 볼쇼이 발레는 꼭 봐야겠다”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에도 모스크바에서 4년 동안 근무했던 박과장은 최근 다시 이곳에 부임했다. 그는 볼쇼이 극장 표를 구하느라 애를 먹곤 했던 일을 떠올리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카사(매표소)’는 잠겨 있거나 ‘넷(표 없음)’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기 일쑤였다. 결국 대행사나 암표상을 통해 원래는 5달러도 하지 않는 표를 몇 백 달러씩 주고 구해야만 했다. 그런데 막상 공연장에 들어가보면 여기저기 빈자리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을 떠올리던 박과장이 문득 나타샤를 돌아보니 벌써 표를 알아보러 달려나가거나 정신없이 전화를 하고 있어야 할 나타샤가 태연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타샤, 뭐 해? 표 안 구하고!”
“미스터 박, 지금 인터넷으로 찾고 있어요.”
“뭐, 인터넷?”
“그럼요. 아, 다행히 좋은 자리가 남아 있어요. 예약하고 카드로 지불하면 되겠네요. 표는 내일 공연 시작 전에 매표소에서 찾고요.”
“….”
다음날 저녁,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 테아트랄나야 울리짜(극장거리). 재정난으로 제때에 수리를 못해 곧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볼쇼이 극장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극장이 들어서 있었다.
“지난해 문을 연 제2극장이에요.” 함께 간 나타샤가 설명했다. 놀랍게도 그 많던 암표상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낡은 내부시설도 말끔하게 고쳐져 있었다.
입장료 현실화 … 암표는 근절
볼쇼이에서만 볼 수 있는 화려한 무대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서울에서 온 손님도 러시아 정통 발레에 큰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박과장은 혼자 중얼거렸다. “뭐야, 볼쇼이 극장 곧 망한다더니 몰라보게 좋아졌잖아?”
러시아의 자랑거리인 동시에 골칫거리였던 볼쇼이 극장이 달라졌다. 소련 붕괴와 함께 정부 지원이 중단되면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볼쇼이 극장은 1990년대 내내 심한 재정난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우수한 단원들이 대거 서방으로 떠났고 발레단은 외화를 벌기 위해 외국을 떠돌아야 했다.
사실 볼쇼이 극장의 고전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새로 바뀐 시장경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주의 방식을 고집하는 불합리한 경영과 복마전(伏魔殿)을 연상시키는 불투명한 극장 운영으로는 구조조정 등 극장 개혁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 상태로 10여년이 흘러가면서 볼쇼이의 명성은 큰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하자 볼쇼이 극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00년 9월 푸틴 대통령은 동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아나톨리 익사노프 극장장을 개혁 전도사로 파견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드라마극장장을 역임한 익사노프 극장장의 임명은 파격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술인 출신이 아니라 ‘발레의 기본 스텝도 모르는’ 예술행정가 출신이었다. 예술인 출신이 대표를 맡아온 볼쇼이 극장의 관례를 깬 것이다. 그는 또 문화부 장관과 경영계약을 맺었다. 2005년까지 극장 경영을 본 궤도에 올려놓지 못하면 미련 없이 자리를 내놓겠다는 것이다.
익사노프 극장장은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실세답게 과감하게 구조조정부터 시작했다. 50여명의 직원과 단원이 극장을 떠났다. 과거 예술감독과 행정감독으로 이원화됐던 조직을 개편해 극장장이 전권을 쥐게 됐다. 심지어 그는 다국적 경영 컨설팅회사인 매킨지에 의뢰해 매년 극장의 경영진단을 받기 시작했다.
팬들의 원성을 샀던 매표시스템에도 손을 댔다. 그동안 볼쇼이 극장의 표 가격은 터무니없이 낮았었다. 그러나 극장 관계자들이 표를 이리저리로 빼돌려 일반인들은 암표상이나 대행사를 통해서나 표를 살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관계자들이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익사노프 극장장은 표 가격을 수십 배 올려 가격을 현실화한 대신 판매를 전산화해 표를 몰래 빼낼 수 없게 만들었다. 당장 극장 주변의 암표상과 매표소 앞에 늘어선 긴 줄이 사라졌다. 또 작품에 관계없이 비슷하던 표값도 차별화해 ‘백조의 호수’ 같은 최고 인기 공연은 다른 작품에 비해 5배 이상 비싼 가격을 책정했다.
인사에도 경쟁시스템을 도입해 단원들은 기본급과 함께 공연 실적에 따라 추가 개런티를 받게 됐다. 기량을 인정받아 공연에 더 많이 참가한 단원에게 인센티브를 준 것이다. 대우가 좋아지자 서방으로 떠났던 단원들이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이 같은 개혁의 결과로 지난 3년 동안 볼쇼이 극장의 수입은 3배 이상 늘었다. 매킨지는 지난해 ‘볼쇼이의 개혁은 성공적’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11년째 볼쇼이 극장의 공식 스폰서인 삼성전자 모스크바 지사의 최희중 차장은 “이전에는 후원을 하면서도 극장에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는데 최근에는 볼쇼이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