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4

..

“아스팔트 시절 잊지 마라”

노대통령 정신적 지주 송기인 신부 … 취임 초부터 소신 있는 개혁을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3-02-28 11:4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아스팔트 시절 잊지 마라”
    김영삼 대통령(YS) 취임 초, ‘부산 재야세력의 대부’ 송기인 신부(현 부산교회사회연구소장)가 청와대를 찾았다. 그는 YS에게 “국가보안법 없애고, 시국사범 다 풀어주라”고 권했다. YS는 “아이구, 내 힘으로 그거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송신부는 “그럼 ‘민주공원’이나 만들어주소. 200억원이면 될 낍니더”라고 했다. YS는 즉석에서 승낙했다. 50년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상징물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은 중요한 순간마다 부산 민주공원을 찾았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공식일정을 개시(2002년 5월)한 곳도, 대통령 선거 운동을 처음 시작(2002년 11월27일)한 곳도 민주공원이었다. 당선되어 부산에 왔을 때 가장 먼저 한 일도 민주공원에서의 헌화였다.

    노대통령(세례명 ‘유토스’)은 천주교회에 잘 나가지 않는다. 송신부는 “(노대통령이) 살 날 많이 남았잖아”라며 포기한다. 그러나 부산 민주공원이 사실 노대통령에겐 ‘성지’인 셈이다. 노대통령이 민주공원에서 기도할 때마다 이 공원을 세운 송신부는 노대통령 옆을 지켰다.

    “문재인·이호철 때문에 마음이 조금 놓여”

    노대통령 당선 이후 송신부는 대통령에게 ‘이놈’ ‘저놈’ 하는 사람으로 더 유명해졌다. 송신부는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은 가족과 측근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도록 먼저 챙겨야 한다”고 노대통령에게 거침없이 충고했다.



    YS는 대통령 퇴임 후 상도동 자택으로 송신부를 초청해 점심을 대접한 적이 있었다. 송신부는 ‘부산소주’를 갖고 가서 YS와 한 병을 비웠다. YS는 “재임기간 동안 단돈 10원도 안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송신부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현철이가 받은 건 왜 계산에 안 넣는지 몰라.” 송신부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송신부는 지난해 말 노대통령에게도 “니가 대통령 하며 돈 모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니 가족이 걱정된다”고 직언했다. 노대통령이 “걱정 마라”고 하자 “이놈아”라며 호통쳤다. “가족을 아프리카 오지로 보내버려라”라는 말도 했다.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관리는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호철 민정비서관이 담당한다. 송신부는 “두 사람 때문에 마음이 조금 놓인다”고 말했다. 민정수석 내정자가 발표된 뒤 안상영 부산시장은 송신부에게 “신부님 비서가 없어졌으니 제가 한 명 보내드릴까요?”라고 농담을 했다. 송신부는 그만큼 문재인 수석을 아낀다. 대통령 면담 등 중요한 약속자리에 문수석을 자주 데리고 다녔다. 송신부는 “재인이만큼 차갑게 사물을 보는 사람도 드물고, 호철이만큼 돈 모르는 사람도 없어”라고 말했다.

    최근까지도 송신부는 세배하러 오는 이비서관에게 세뱃돈으로 1만원을 주었다. 2003년 1월 말 문재인 수석, 이호철 비서관이 서울 L호텔에서 송신부와 함께 식사를 했다. 메뉴는 복어탕이었다. 이비서관은 “값이 비싸다”고 불평했다. 송신부는 “내 평생 호철이한테 밥 얻어 먹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아스팔트 시절 잊지 마라”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직후인 2002년 5월 부산 민주공원을 방문, 분향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송신부는 문수석과 이비서관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5년 동안은 노무현 옆에 붙어 있어”라고 명령했다. 송신부는 “두 사람은 눈치 안 보고 대통령에게 직언할 사람들이야.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비리만 없어도 대통령은 절반은 성공한 셈이니 대통령 옆에 있으라고 한 거지”라고 설명했다. 최근 송신부의 지인 두 명이 “대통령에게 전해달라”며 이력서를 들고 찾아왔다. 송신부는 “자꾸 이러면 나, 외국으로 가버릴 거야”라며 돌려보냈다. 송신부는 “대통령 퇴임할 때까지 청와대에도 안 가고, 노무현도 안 만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자신도 대통령에겐 부담이 될 수 있으니 대통령의 시야에서 사라지겠다는 뜻이다.

    노대통령은 ‘승부사’ 기질이 강한 정치인이다. 그런 그도 정치적 결단을 내린 뒤엔 송신부를 찾았다. 중요한 결정을 내린 뒤의 초조함을 달래고, 위안을 받고 싶어서였다. 98년 노대통령이 서울 종로 보궐선거 출마를 결심한 때도 그랬다.

    “저 종로에 나가볼랍니더.”(노대통령)

    “니 결심이 그렇다면 한번 해봐라.”(송신부)

    얼마 뒤 노대통령에게서 연락이 왔다.

    “신부님 저 당선됐심더. 후원회 할 때 서울에 꼭 올라오셔야 됩니데이.”

    “안 간다. 바쁘다.”

    “신부님 안 오시면 안 합니더.”

    “알겠다. 올라가겠다.”

    2000년 총선 때 노대통령은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다. 이때도 노대통령은 떼를 썼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이가.”(송신부)

    “정도 아입니꺼.”(노대통령)

    “그래, 존경한다.”

    “유세장에 오셔서 제 유세 한 번만 들어주이소.”

    얼마 뒤 송신부는 멀찌감치 떨어져 노대통령의 유세를 지켜봤다.

    송신부는 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DJ) 취임식에 초청받았다. “그날 참 추웠지….”라고 회고했다. 얼마 뒤 DJ는 청와대로 송신부를 불렀다. 송신부는 DJ에게 “국민회의 탈당하고, 국민과 직접 상대하세요. 지금 당장 개혁에 나서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 DJ는 듣지 않았다. 송신부는 ‘탈당하라’는 말만 빼고는 같은 충고를 노대통령에게도 한다.

    송신부는 80년대부터 재야세력의 대부였다. 그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조직했고 해방신학을 도입했다. 평범한 변호사였던 노대통령은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변호인단에 참여하면서 송신부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변호인단은 송신부가 이끌고 있었다. 이후 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87년 6월 항쟁 국민운동 부산본부 등 송신부가 결성을 주도하면 노대통령이 발로 뛰었다. 송신부는 88년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줘서 노대통령을 정치에 입문시켰다. 지난해엔 송신부의 재야세력 후배들이 ‘노풍’의 진원지가 됐다.

    송신부는 노대통령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머리와 가슴을 준 사람이었다. 이런 송신부가 노대통령에게 “옛날 아스팔트 위를 달리던 시절의 순수함과 열정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소신을 지켜 개혁을 하라”는 말을 두 번, 세 번 강조한다. “취임 초부터 3김식 낡은 정치 개혁하고, 재벌 개혁하고, 한미관계 개혁하는 일을 서두르라”는 주문이었다. 송신부는 노대통령의 다소 강경한 어투에 대해 눈살을 찌푸린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개혁은 말이 아닌 소신이 강해야 성공하며, 동시에 말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는 개혁은 실패한다”는 것이다.

    90년대 중반 부산에선 부산시내 미군기지 이전을 촉구하는 ‘우리땅되찾기모임’이 결성됐다. 송신부가 주도한 단체였다. 노대통령도 당시 이 모임 회원으로 가입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끈다. 송신부는 수평적 한미관계, 남북한 협력을 요구하는 여러 사회운동을 했다. 그러나 대북송금 특검제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다. 그는 “특검제를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문제도 중요하지만 불법 의혹을 덮어두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송신부는 “노대통령은 퇴임 후에 밥 굶을 일 없잖아. 아예 서울에 있으면 안 돼. 부산에도 있지 말고 김해 같은 시골로 내려가서 살아”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자 “국민에게 빚지지 않았느냐”고 거침없이 답한다.

    송신부는 대선 후 당선자 신분으로 부산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입학식보다는 졸업식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졸업식’ 얘기를 다시 꺼낸다. “5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친 대통령이 한 명도 없는 나라가 우리나라야. ‘내 인생은 5년이 전부다’라는 생각만 하면 돼. 오직 대통령 임무 잘하는 데만 몰두해야 해. 그것만 잘해도 노무현은 국민 위해 큰일 한 거야. 우리도 5년 뒤엔 성공한 대통령 한번 가져봐야지.”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