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7일 전경련 회장으로 선임된 손길승 SK 회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1월31일 ‘재계 달래기’ 차원에서 경제5단체장을 만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경제1분과 관계자들이 2월4일 자문위원들과 재벌개혁 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위 부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관계자가 2월7일 전국경제인연합(이하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손길승 SK 회장을 두고 하는 얘기다. 그래도 노무현 정부와 대화가 통할 수 있는 인물이지 않겠느냐는 기대 섞인 전망이다. 그동안 손병두 부회장, 김석중 상무 등 전경련 관계자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재벌개혁 공약을 물고늘어지는 바람에 인수위와 전경련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손길승 회장은 일단 새 정부에 협조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손회장은 취임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새 정부의 개혁 과제가 성공적으로 완수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경제계의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해 인수위 쪽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당분간은 노대통령 당선자측과 재계의 직접 갈등은 줄어들고 물밑 대화가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손길승 회장, 政-財 샌드위치 신세 우려도
그렇다고는 해도 손회장과 전경련의 앞날은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손회장이 삼성 이건희 회장, LG 구본무 회장,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 등 자신의 등을 떠민 오너 회장들과 노무현 정부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 손회장이 전경련 회장 수락의 첫번째 조건으로 회원사들과 회장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내세운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전경련 회장 시절을 잘 아는 재계 인사들은 이런 우려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재계의 합의를 통해 전경련 회장에 취임했지만 재계와 정부 모두에 ‘왕따’당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보다 더 강력한 재벌개혁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어서 비(非)오너 출신인 손회장의 한계는 금방 드러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도는 배경이다.
김 전 회장이 정부와 재계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것은 특히 전경련이 김대중 정부 초기 ‘빅딜’을 주도하면서였다. 당시 재계에서는 김 전 회장이 각 재벌의 이해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 ‘빅딜’ 추진 과정에서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하기보다는 자기 밥그릇을 하나 더 챙기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고, 정부는 정부대로 재벌개혁의 5대 원칙 가운데 하나인 ‘빅딜’을 전경련이 ‘자율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해놓고도 미적거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을 전후해 수장의 임기가 만료되는 경제단체는 전경련 외에도 두 단체가 더 있다. 이에 따라 이들 단체 수장 역시 노무현 정부와 ‘코드’를 맞출 수 있는 사람으로 물갈이되는 것은 아닌지, 시민단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경제단체 재편론이 현실화되지는 않는지 등이 재계 안팎의 관심을 끌고 있다. 아울러 인수위 쪽의 경제단체 개혁 구상이 있는지 등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전경련 외에 수장의 임기가 만료되는 경제단체는 무역협회(이하 무협)와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 재계 관계자는 “새 정부로서는 경제단체장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취임했으면 하는 생각을 할 법도 하지만 민간단체인 경제단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점에서 경제단체장 선임 과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선 대한상의의 경우 난산을 거듭한 끝에 회장을 선임한 전경련과 달리 3월26일 회장 선거에서 현 박용성 회장이 연임될 것으로 예상된다. 두산중공업 배달호씨 분신자살 사건으로 물의를 빚긴 했지만 무엇보다 회원들의 지지가 두텁기 때문. 더욱이 박회장이 내년에 국제상업회의소 회장에 자동선출되도록 돼 있어 연임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게 대한상의 안팎의 반응.
무협 역시 현 김재철 회장이 연임을 강력히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김회장은 자신의 저서 ‘지도를 거꾸로 보면 한국인의 미래가 보인다’를 노무현 당선자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감명 깊게 읽은 책 가운데 하나라고 언급했다는 점을 들어 연임을 자신하고 있다는 전언. 그러나 여권 일각에서는 박용학 구평회 김재철 회장 등 업계 출신 회장이 무협을 이끌어온 만큼 경제관료 출신으로 기업 경영 경험이 있는 인사가 무협 회장에 적합한 것 아닌가 하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 상태.
“경제단체 너무 많아 통합 바람직”
경제단체 쪽으로서 신경 쓰이는 대목은 일부 시민단체나 재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경제단체 재편론인 듯싶다. 참여연대 재벌개혁센터 김상조 소장(한성대 무역학과 교수)은 “경제5단체나 증권업협회 등 업종별 연합회는 이익단체로서의 역할 및 회원들에 대한 자율 규제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함에도 현재로선 일부 회원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그치고 있다”면서 전면 개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재계 일각에서도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중견 그룹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는 상공회의소임에도 한국만 전경련이 재계의 본산을 자처하고 있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전경련과 경영자총협회(이하 경총)를 본래대로 통합해 대한상의에 흡수통합시키되 대한상의 내에는 현재의 전경련과 경총의 기능을 담당하는 특별분과위원회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경제단체 개편론은 사실 이번에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다. 경제단체 내부에서도 간간이 흘러나온 얘기다. 대표적으로는 김재철 무협 회장이 지난해 9월12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경제단체가 너무 많아 재계의 의견 수렴이 일원화되지 않고 있으므로 경제단체는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경제단체 통합론을 제기했다.
물론 인수위 쪽은 경제단체 통합 구상이나 제안에 대해 펄쩍 뛴다. 민간단체인 경제단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 인수위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정부가 대한상의만을 재계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재계와 불필요한 마찰만 만들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이어 “전경련이 노당선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노당선자가 대통령선거 과정중에 전경련 초청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한 것은 전경련의 존재를 인정하는 현실론 위에서 대화를 통해 변화를 모색해보자는 차원이었음에도 전경련이 ‘치고 빠지기’식으로 노당선자의 재벌개혁 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에 노당선자가 최근에 잇따라 재계에 경고를 보냈다”는 것.
어쨌든 전경련 손길승 회장 취임으로 노당선자측과 재계의 갈등은 당분간은 봉합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속 증여세 포괄주의, 증권 집단소송제 등 노당선자의 재벌개혁 공약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인 재계를 노무현 정부가 한편으로는 다독거리면서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벌개혁을 관철해나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