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소매상을 자처한 유시민씨, 서양철학의 눈으로 애니메이션을 연구하는 김용석 교수, 과학 대중화에 앞장선 정재승씨, 독문학자이며 풍수학자인 김두규 교수(왼쪽부터).
‘조선 후기 장편여성소설 연구’로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정창권씨(36)는 스스로 ‘논문 잘 못 쓰는 학자’라며 “논문을 위한 공부, 논문을 위한 글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한다. “고전문학이라는 풍부한 자료를 생활사와 접목해 연구하면 그 시대의 안팎이 더 잘 보인다. 또 연구자의 글쓰기가 논문 일변도에서 벗어나 소설이든 수필이든 주제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 작품은 ‘1702년 한 여자의 자살사건’. 역사소설의 형식을 빌린 조선 후기 가족사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가 역사와 문학의 만남이요 해설이 있는 한 편의 소설이라면, 지난해 말 출판계 최대 화제작인 이태원(31)의 ‘현산어보를 찾아서’(전 5권, 청어람미디어)는 기행문 형식의 해양생물도감이다.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이씨는 200년 전 정약전이 쓴 ‘현산어보’를 들고 7년에 걸쳐 신지도, 우이도, 흑산도 등 전남 해안지방 섬을 답사했다. 물론 누가 먼저 책을 내자고 한 것도 아니고 학위를 염두에 둔 연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되자 ‘200년 전 과학정신의 부활’ ‘나의 해양유산 답사기’ 등의 찬사가 이어졌다. 국민대 박종기 교수(국사학)는 “역사학 지식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과학 분야를 젊은 연구자가 홀로 탐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박사논문감”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이태원씨는 “처음부터 학위에는 관심이 없었다”며 “결과물에 대한 압박이 없는 만큼 논문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연구와 글쓰기를 할 수 있어서 좋다. 앞으로 이익, 홍대용 등 실학자들 저술에 차례로 도전해볼 생각”이라고 말한다.
출판계에서는 정창권씨나 이태원씨처럼 전문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글쟁이들을 ‘중간필자’라고 부른다. 개마고원 출판사의 장의덕 사장은 중간필자에 대해 “전문가 그룹이 생산해낸 창의적, 창조적 지식을 유통적, 번안적 지식으로 바꿔 지식 생산 그룹과 독자를 연결하는 중간자”라고 정의했다.
중간필자라는 말은 ‘중간문학’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에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사이에 위치한 역사소설, 추리소설, SF소설, 연애소설 등을 아울러 중간문학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90년대 초 이인화의 역사추리소설 ‘영원한 제국’과 2001년 이용범의 ‘열한 번째 사과나무’를 놓고 중간문학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유시민씨, 대표적 중간필자
중간필자의 등장과 함께 장르를 구분하기 어려운 퓨전출판물이 늘고 있다.
시사칼럼니스트 유시민씨가 대표적인 중간필자다. 그의 데뷔작은 88년 이후 장기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 그 후 자신의 전공 분야로 돌아와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경제학 카페’ 같은 책을 펴냈으나 여전히 강단의 경제학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일반인들에게 경제학 대신 경제학적 사고방식을 강의하는 ‘지식 소매상’을 자처하고 있다. 또 번역가, 소설가, 신화연구가 등 필요에 따라 직함이 바뀌는 이윤기씨나 칸트 전공자이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연구가이기도 한 김용석 교수(영산대) 같은 이가 중간필자에 해당한다.
“논문을 위한 글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정창권씨, 생물교사로 실학사상을 연구하는 이태원씨, 과학저술가의 세계를 개척한 이인식씨(위부터).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올해 출판 키워드의 하나로 ‘퓨전’을 꼽는다. 문학과 예술,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교양과 오락, 단행본과 잡지, 학술과 실용 등 이질적 상상력을 하나로 결합하는 퓨전 글쓰기 전문가가 바로 중간필자들이다. 도서평론가 이권우씨는 중간필자의 글쓰기 방식을 ‘무엇이’보다 ‘어떻게’에 무게중심이 있는 ‘비유의 수사학’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방언의 수사를 쓴다. 자기들끼리만 공유하고 그것을 지적 권위로 삼아 선민의식을 갖는다. 그것을 우물가의 아낙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 어법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중간필자들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은유의 수사를 구사한다.”
관심 1순위는 ‘전문번역가들’
개마고원의 장의덕 사장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박사 학위 논문을 적당히 엮으면 인문교양서가 됐지만 이제는 학문적 성과를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새롭게 포장하는 글쓰기가 요구된다”며 “아는 것과 쓰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1차적으로 출판계가 눈길을 보내는 중간필자군은 전문번역가들. 이들은 출판시스템을 이해하고 해외출판 경향에 밝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글쓰기 훈련도 충분히 되어 있다. ‘살육과 문명’ ‘시간의 발견’ 등 역사 분야 전문번역가로 활약해온 남경태씨가 ‘트라이앵글 세계사’ ‘전쟁 이야기’ 등 자신의 이름으로 대중 역사서를 펴내는 일은 자연스럽다. 또 이윤기씨에 이어 ‘신화 읽어주는 남자’로 뜬 이경덕씨가 있다. 예술고교를 다니며 미술을,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한 그는 10년 동안 생활의 방편 삼아 번역을 하다 97년 ‘신화로 보는 악과 악마’를 펴낸 후 본격적으로 신화 저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출판계가 가장 기대를 거는 그룹은 전문 지식 생산 훈련을 받은 소장학자들이다. 이들이 교수직만 바라볼 게 아니라 ‘저술가’라는 영역을 개척한다면 한국출판의 파이가 훨씬 커질 수 있다고 말한다. ‘명문가 이야기’ ‘사주명리학 이야기’ 등 베스트셀러 저자인 조용헌씨는 불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실제 그의 관심 분야는 강단과는 거리가 먼 강호(江湖) 동양학(사주, 풍수, 한의학)이다. 또 독일 뮌스터대에서 독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풍수지리 강의를 하는 우석대 김두규 교수가 있다. 이들은 한 발은 강단에, 다른 한 발은 저술작업에 놓고 있는 전형적인 중간필자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극히 소수이나 풍부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애호가층이 있다. ‘나무야, 나무야 왜 슬프니’를 쓴 우종영씨는 직업이 나무의사지만 고교 졸업장도 없는 재야의 나무박사고 ‘금문의 비밀’을 쓴 김대성씨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금문 연구자로 한·중 상고사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역자에서 신화저술가로 변신한 이경덕씨.
사계절 출판사는 독특한 주제를 연구하는 소장학자들을 지원해 그들의 연구결과를 출판으로 연결하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류형식 인문팀장은 “인문교양서 분야는 독자들의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필자난을 탓하기 앞서 신세대 학자들을 새로운 글쓰기 방식에 적응하도록 지원하는 일도 출판 기획자의 몫”이라고 말한다.
작가, 저술가, 문필가, 칼럼니스트, 학자, 교수, 퍼블릭 라이터, 자유기고가, 교양필자 등 다양한 이름 사이에 걸쳐 있는 중간필자들. 그들은 한국 출판계의 구원투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