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는 가장 훌륭한 시대였고, 신뢰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회의의 시대였다. 광명의 계절이면서 암흑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인 동시에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의 앞길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당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동시에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시대는 지금의 시대와 비교해볼 때 좋다고 표현하든 나쁘다고 표현하든 최고의 형용사가 필요한 그런 시대였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단두대의 공포가 지배하던 프랑스 대혁명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해외파 지식인인 리저허우와 류짜이푸가 본격적인 대담에 앞서 ‘두 도시 이야기’를 길게 인용한 까닭은 분명하다. 지금 중국의 현실이 이런 이중 가능성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동시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금부터 잘 하면 정말 크게 떨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밑바닥으로 완전히 가라앉을 수도 있는 기로에 서 있다.
리저허우와 류짜이푸의 대담집 ‘고별혁명(告別革命)’은 혁명과의 결별을 주장한 파격적인 책이다. 물론 여기서 결별해야 하는 혁명이란 대중의 폭력 활동을 이용하여 기존의 사물·제도·질서·절차 등을 개조하거나 타도·전복·파괴하는 이른바 ‘조반유리(造反有理)’와 ‘무천무법(無天無法)’을 가리킨다. ‘고별혁명’이라는 제목은 1990년대 중반 리저허우가 쓴 논쟁적인 글 ‘혁명이 아니라 개량이다’에서 나왔다. 리저허우는 “20세기 중국사가 혁명을 성물로 받들면서 혁명된 것을 또다시 혁명하고 끊임없이 혁명하는 것으로 구성됐다”면서 “그러나 중국인들이 하루빨리 ‘혁명은 언제나 정확하다’는 미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왜 혁명은 역사의 지름길이 아닌가. 잠시 혁명의 시대였던 마오쩌둥 통치기로 돌아가보자. 1949년 장제스를 대만으로 쫓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마오쩌둥은 이후 반우파투쟁, 뒤뜰용광로운동(강철 생산량 높이기), 농촌의 사회주의 교육운동에 이어 1966년 문화대혁명까지 끊임없이 혁명을 전개했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사회가 활력에 넘치는 듯 보였지만 결국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은 바람 빠진 가죽공처럼 기진맥진했다.
류짜이푸는 20세기 중국 대륙에 망조가 든 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됐다고 맹공을 퍼붓는다. “사회주의의 풀이 될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이 되진 않겠다”는 문화대혁명의 구호가 너무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부구조의 혁명이 생산을 촉진하고 경제의 번영을 가속화해 부강한 중국을 실현시킬 수 있으리라는 꿈은 말 그대로 꿈이었다.
두 석학은 혁명의 대안으로 개량을 주장한다. 혁명이 에너지 소모라면 개량은 에너지 축적이며, 혁명이 열정이라면 개량은 이성이다. 혁명이 구호와 운동이라면 개량은 이성적 질서와 법치다. 리저허우는 경제발전-개인적 자유-사회정의-정치 민주화의 4단계가 논리적이며 시간적 순서임을 주장하면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축적이 바로 개량이라고 설명했다. 또 개량가가 되려면 ‘뜨거운 피로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혁명가의 자세만으로는 부족하며 보다 많은 지식과 경험, 학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류짜이푸는 개량을 ‘조정’이라는 말로 설명하며 21세기 중국의 길은 자기조정과 평화적 진보에 있다고 말한다. 1950년대 중국은 ‘착취자를 착취한다’는 혁명적 방법으로 지주의 토지와 자본가의 재산을 몰수했다. 당시 류사오치는 관리 경험이 있는 자본가들을 앞세운 공사(公私)합영의 조정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끝내 주자파로 몰려 비참하게 죽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국영기업을 다시 개인기업으로 바꿔야 하는 현실에 처했다. 역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중국은 지난 반세기의 혼란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책은 선동정치의 시대에서 경제 지향의 시대로, 무익한 계급투쟁에서 계급공존으로, 문명의 충돌보다는 문명 조화의 세기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개혁’이라는 과제를 짊어진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고별혁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사회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두 도시 이야기’가 묘사한 이중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단칼에 개혁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국민의 조급증과 번거롭고 지루한 조정과 협상, 화해와 타협 대신 국민을 일시적으로 통쾌하게 해줄 그 무엇만 찾는 정권의 대중영합주의가 계속된다면 5년 뒤 우리는 회의의 시대와 암흑의 계절을 탄식하게 될 것이다. 리저허우는 이렇게 말한다.
“깨부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통쾌하긴 하겠지만 깨부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커다란 대가를 요구한다. 다시 시작하는 것 또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시작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매번 조금씩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음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고별혁명/ 리저허우, 류짜이푸 지음/ 김태성 옮김/ 북로드 펴냄/ 520쪽/ 2만원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단두대의 공포가 지배하던 프랑스 대혁명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해외파 지식인인 리저허우와 류짜이푸가 본격적인 대담에 앞서 ‘두 도시 이야기’를 길게 인용한 까닭은 분명하다. 지금 중국의 현실이 이런 이중 가능성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동시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금부터 잘 하면 정말 크게 떨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밑바닥으로 완전히 가라앉을 수도 있는 기로에 서 있다.
리저허우와 류짜이푸의 대담집 ‘고별혁명(告別革命)’은 혁명과의 결별을 주장한 파격적인 책이다. 물론 여기서 결별해야 하는 혁명이란 대중의 폭력 활동을 이용하여 기존의 사물·제도·질서·절차 등을 개조하거나 타도·전복·파괴하는 이른바 ‘조반유리(造反有理)’와 ‘무천무법(無天無法)’을 가리킨다. ‘고별혁명’이라는 제목은 1990년대 중반 리저허우가 쓴 논쟁적인 글 ‘혁명이 아니라 개량이다’에서 나왔다. 리저허우는 “20세기 중국사가 혁명을 성물로 받들면서 혁명된 것을 또다시 혁명하고 끊임없이 혁명하는 것으로 구성됐다”면서 “그러나 중국인들이 하루빨리 ‘혁명은 언제나 정확하다’는 미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왜 혁명은 역사의 지름길이 아닌가. 잠시 혁명의 시대였던 마오쩌둥 통치기로 돌아가보자. 1949년 장제스를 대만으로 쫓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마오쩌둥은 이후 반우파투쟁, 뒤뜰용광로운동(강철 생산량 높이기), 농촌의 사회주의 교육운동에 이어 1966년 문화대혁명까지 끊임없이 혁명을 전개했다. 그 결과 일시적으로 사회가 활력에 넘치는 듯 보였지만 결국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은 바람 빠진 가죽공처럼 기진맥진했다.
류짜이푸는 20세기 중국 대륙에 망조가 든 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됐다고 맹공을 퍼붓는다. “사회주의의 풀이 될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이 되진 않겠다”는 문화대혁명의 구호가 너무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부구조의 혁명이 생산을 촉진하고 경제의 번영을 가속화해 부강한 중국을 실현시킬 수 있으리라는 꿈은 말 그대로 꿈이었다.
두 석학은 혁명의 대안으로 개량을 주장한다. 혁명이 에너지 소모라면 개량은 에너지 축적이며, 혁명이 열정이라면 개량은 이성이다. 혁명이 구호와 운동이라면 개량은 이성적 질서와 법치다. 리저허우는 경제발전-개인적 자유-사회정의-정치 민주화의 4단계가 논리적이며 시간적 순서임을 주장하면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축적이 바로 개량이라고 설명했다. 또 개량가가 되려면 ‘뜨거운 피로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혁명가의 자세만으로는 부족하며 보다 많은 지식과 경험, 학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류짜이푸는 개량을 ‘조정’이라는 말로 설명하며 21세기 중국의 길은 자기조정과 평화적 진보에 있다고 말한다. 1950년대 중국은 ‘착취자를 착취한다’는 혁명적 방법으로 지주의 토지와 자본가의 재산을 몰수했다. 당시 류사오치는 관리 경험이 있는 자본가들을 앞세운 공사(公私)합영의 조정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끝내 주자파로 몰려 비참하게 죽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국영기업을 다시 개인기업으로 바꿔야 하는 현실에 처했다. 역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중국은 지난 반세기의 혼란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책은 선동정치의 시대에서 경제 지향의 시대로, 무익한 계급투쟁에서 계급공존으로, 문명의 충돌보다는 문명 조화의 세기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개혁’이라는 과제를 짊어진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고별혁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사회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두 도시 이야기’가 묘사한 이중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단칼에 개혁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국민의 조급증과 번거롭고 지루한 조정과 협상, 화해와 타협 대신 국민을 일시적으로 통쾌하게 해줄 그 무엇만 찾는 정권의 대중영합주의가 계속된다면 5년 뒤 우리는 회의의 시대와 암흑의 계절을 탄식하게 될 것이다. 리저허우는 이렇게 말한다.
“깨부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통쾌하긴 하겠지만 깨부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커다란 대가를 요구한다. 다시 시작하는 것 또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시작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매번 조금씩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음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고별혁명/ 리저허우, 류짜이푸 지음/ 김태성 옮김/ 북로드 펴냄/ 520쪽/ 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