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선특집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이-노 캐리커처 및 홈페이지와 관련한 여러 가지 홍보물.
“네티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당 대선후보 ×××입니다”로 시작되는 동영상은 정치만화나 귀여운 후보 캐릭터 등을 바탕 화면에 깔고 있다. 20, 30대 젊은층을 겨냥한 네티즌용 홍보물임을 짐작케 한다. 다음의 한 관계자는 “대선특집 사이트에 하루 10만∼15만명이 접속한다”며 네티즌의 뜨거운 열기를 설명했다. 코리아닷컴, MSN 등 다른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도 대선특집 사이트를 별도로 꾸며 네티즌들의 선거 열기를 자극했다. 각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하루 100건 이상의 의견이 올라온다. 특정 후보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다가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등 사이버 폭력성도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2002년 새로운 선거문화를 창출한 주역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청중 동원 대규모 유세 없어져
2002년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은 고공전(高空戰)이다. 고공전은 인터넷과, TV 등의 매스미디어가 주도했다. 미디어와 인터넷이라는 첨단 무기를 앞세운 디지털 정치시대의 화려한 등장이다. 반대로 돈과 조직을 앞세운 보병전(步兵戰)은 설 자리를 잃었다. 아날로그 정치시대의 종말은 돈과 조직을 통한 대규모 유세 등 전통적인 선거문화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2002년 현재 인터넷 사용 인구는 2600만명. 1997년 대선 때의 170만명에 비해 무려 15배 이상 규모가 커졌다. 인터넷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신속성과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특징이다. 인터넷 사용자는 젊은층일수록 많다. 전체 유권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20, 30대 유권자를 공략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선거운동 시스템은 없다. 각 당이 기존 홈페이지 외에 인터넷 방송국, 사이버 대변인, 사이버 기자단을 둔 이유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인터넷이 없었다면 노풍(盧風)의 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계보도, 돈도 없는 노무현 후보의 등장 배경에는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정치문화가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TV 등 매스미디어 역시 2002년 선거풍속도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중앙선관위)는 12월6일 “첫 TV 합동토론 다음날인 12월4일까지 공중파·케이블 TV를 통해 이뤄진 언론사의 후보자 초청 대담 토론회는 82회”라고 발표했다. 지난 대선 때 처음 도입된 후보자 대담 토론회 총 38회를 2배나 웃도는 수치다. 내용을 보면 파괴력은 배가된다. 3일 열린 대통령 후보 합동토론의 방송3사 합동시청률은 33.8%. 하지만 부분 시청 인구까지 합친 종합시청률은 73.2%다. 이번 TV토론이 후보를 선택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응답이 64.8%라는 게 한 방송사 여론조사 결과다. TV를 통한 미디어 선거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민주당 이병완 정책위원회 상임부의장은 “TV를 통한 유세와 토론의 활성화는 고비용 정치구조를 바꾸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매스미디어 선거는 대중스타도 양산했다. 부산 자갈치시장의 아구 아지매 이일순씨가 대표적인 스타. ‘연매출이 몇 억원을 넘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민자격론’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노후보측은 지금도 초반 승기의 출발점을 ‘자갈치 아지매’로 꼽는다.
인터넷과 TV가 대선전을 주도하면서 과거 선거의 전형으로 꼽혔던 대규모 청중을 동원한 세 과시형 유세는 자취를 감추었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12월6일 현재 정당연설회는 총 16회에 그쳤다. 평균 청중 수도 600여명에 머물렀다는 게 중앙선관위의 분석이다. 14대 대선 379회, 15대 대선 49회와 비교할 때 현저히 감소한 것이다. 각 후보 진영은 “일만 많고 실익이 적다”며 조직을 동원한 선거전에 부정적이다. 대신 각 당은 후보나 연설부대를 유동인구가 많은 백화점·시장 등지로 내모는 게릴라식 선거문화로 눈길을 돌렸다.
5일 낮 12시, 경기 안산시 LG백화점 앞.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500여명의 청중을 향해 사자후를 토했다. 비슷한 시각,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거리유세가 열린 서울 여의도백화점 앞. 역시 직장인을 비롯한 500여명의 청중이 노후보의 연설을 경청했다. 과거 여의도 광장이나 부산 수영만 유세 등에서 50만∼100만명의 거대청중을 동원하며 세를 과시했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지만 후보측이나 청중 모두 진지했다.
이후보측 선거전략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유세전을 벌이는 역세권 유세. 이후보의 하루 평균 거리유세는 13회 정도다. 청중 수도 500∼4000명 선이며, 유세 시간도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도 비슷한 선거운동을 벌인다. 거리유세는 하루 평균 5, 6회에 그치고 있다. 청중 수는 평균 1000명 정도. 거리유세 장소나 시간은 정해놓지 않는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접전지역을 골라 찾아가거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지역을 그날 그날 선정해 찾아간다.
92년 대선에 출마한 정주영 후보(국민당)가 수십만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 양영식 사이버단장은 “군중집회엔 1만명을 모으는 데 3000만∼5000만원의 비용이 들지만 이번 대선에는 사이버팀 예산 1500만원으로 수십만명의 네티즌을 모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각 후보 진영이 비장의 무기로 장전했던 각종 당내외 조직은 ‘계륵’으로 전락했다. 12월4일과 5일, 사단법인 한국직능단체총연합회(이하 한국직총·총회장 문상주)는 1000만 직능인대회를 각기 다른 장소에서 두 번에 걸쳐 치렀다. 이회창, 노무현 후보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후진적 선거문화라는 따가운 비판이 뒤따랐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경쟁적으로 직능조직 확보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12월15일 현재 이런 조직의 활동에 대해서는 얘기가 없다.
조직 가동에 제동이 걸리면서 선거비용도 획기적으로 줄었다. 성실신고에 대한 의혹은 있지만 대선유권자연대가 지난 12월3일분까지 접수한 선거비는 한나라당이 35억원, 민주당이 28억원으로 집계됐다. 과거 10억원 이상 소요되던 대형 집회 예산은 사라졌다. 선거비가 절감되는 것은 당연지사. 반대로 각 당의 신고액 가운데 미디어 비용이 전체의 40∼50%를 차지, 달라진 선거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정치광고 중 ‘기타 치는 대통령’이 있다. 이는 노후보를 지지하는 한 네티즌이 민주당에 제의한 아이디어였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란 영화를 패러디한 이 광고로 노후보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엄청난 광고효과를 거뒀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과거 같으면 광고대행사에 거액을 주고 사야 할 선거 아이디어나 기획을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전달받고 있다”며 선거비용 절감의 배경을 설명했다.
2002년 대선과 과거 선거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네거티브 전략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의 부패정권 청산과 관련한 신문광고물이 나간 직후인 12월 초, 광고를 담당하는 한나라당 미디어 본부에는 이후보를 지지하는 여성당원 10여명이 몰려왔다. 광고담당자는 “도대체 이걸 광고라고 만들었느냐”며 항의하는 당원들을 피해 몸을 숨기는 촌극을 연출했다. 한나라당이 회심의 역작으로 준비했던 국가정보원 도청 의혹 시리즈도 2편에서 끝을 맺었다. 한 관계자는 “당초 4~5회 정도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좋지 않았다”는 게 ‘조기종영’의 배경. 민주당 역시 이회창 후보 부친의 친일 행적과 부동산 투기 등에 대해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했지만 유권자들의 비판에 직면, 개봉 2일 만에 막을 내렸다.
대선후보들의 TV토론을 지켜보고 있는 유권자들.
민주당 이병완 정책위원회 상임부의장은 이런 현상을 형질변경론으로 설명한다.
“3김 정치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정치문화에 대한 유권자들의 욕구가 커졌고 결국 이것이 인터넷 등을 통해 분출돼 과거와 다른 선거문화가 등장하게 됐다.” 유권자들의 가치기준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2년 새로 등장한 정치문화나 풍속도는 여러 가지 문제점도 안고 있다. TV를 통한 제한된 시간 등으로 인해 화려하게 포장된 후보들의 이미지만 전달될 뿐 정당의 정책을 비교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우선 나온다. 후보들은 TV라는 매체에 맞춰 정치행위들을 연출하고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하는 이미지의 화장(化粧)에만 치중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선대위 한 관계자는 “배우 기질이 없는 정치인은 성공하기 어렵다”며 TV와 인터넷이 지배하는 선거문화의 한계를 지적했다.
인터넷을 이용한 탈법·불법 선거운동은 해결해야 할 난제로 떠올랐다. 모 대선 캠프의 후보 홍보 관련 사이트를 담당하는 K씨는 11월 초 “e메일 집단 주소록을 거액에 팔겠다”는 전화를 받고 거절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이 관계자는 후보들이 홈페이지에 유료사이트를 링크해 무료로 이용하게 하는 이른바 사이버 기부행위 등과 관련한 흥정도 여러 차례 제의받았다. 2000년 16대 총선 때 적발된 인터넷 사범은 148명. 그러나 12월 초 벌써 중앙선관위 등 관계당국에 적발된 인터넷 사범은 2000명이 넘는다. 인터넷 사범은 늘어나고 있지만 관계당국은 적발할 능력도, 처벌할 방법도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신분을 위장한 채 사설 PC방에서 게릴라 형태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뛰는 놈에 기는 수사”라고 하소연이다. 사이버 테러에 대한 노이로제에 걸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보좌역 정찬수씨는 “익명성이 사이버 불법 선거운동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야흐로 인터넷과 매스컴이 한 국가의 지도자를 뽑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