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0

..

‘코리아 악몽’ 지워지기를…

비운의 여성 네팔인 ‘찬드라’ … ‘6년4개월’ 정신병원 감금 손해배상 소송 일부 승소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2-11-13 14:3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코리아 악몽’ 지워지기를…

    4월 ‘풀꽃세상’의 최성각 사무처장(왼쪽)이 성금을 전달하기 위해 네팔인 찬드라(오른쪽)의 집을 방문했다.

    네팔 여성 찬드라 꾸마리 구릉(46)을 기억하는가. 1992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그는 공무원의 실수와 주변의 무관심으로 6년4개월간 국내 정신병원에 갇혀 있어야 했던 비운의 여성이다. 그런 그가 마침내 한국 정부로부터 부당한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됐다.

    2000년 4월 주변의 도움으로 병원을 나온 그는 대한민국과 정신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2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결국 법원은 찬드라의 손을 들어주었다. 11월5일 서울지법 민사합의13부(재판장 김희태 부장판사)는 “국가는 원고에게 28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경찰이 찬드라를 한국인 정신병자로 잘못 알고 정신병원에 넘겼으며, 수용 병원으로부터 그가 네팔인으로 추정된다는 연락을 두 번이나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하는 등 직무를 유기한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국가는 2800만원을 지급하라”

    ‘코리아 악몽’ 지워지기를…

    4월 찬드라(위쪽 사진 뒷줄 오른쪽 두번째)의 집 마당에 아버지(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찬드라(아래쪽 사진 맨 오른쪽)는 아직도 한국에서 겪은 악몽 같은 생활을 완전히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재판부는 또 “경찰이 네팔측 시민단체인 네팔공동체로부터 찬드라의 실종을 신고받고, 근처에 실종 전단까지 붙어 있는 상황에서 원고의 연고자를 발견하려는 어떤 노력도 취하지 않았던 책임도 있다”고 덧붙였으나 정신병원에 대한 청구소송은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



    이 소식을 네팔에 있는 찬드라에게 직접 전하려 했으나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고향인 히말라야 김체에서 걸어서 며칠 걸리는 포카라 시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 소설가 최성각씨와 연락이 닿았다. 시민단체 ‘풀꽃 세상을 위한 모임’의 사무처장이기도 한 최씨는 찬드라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펴 이 모임 대표 정상명씨와 함께 올 4월과 10월 그에게 성금(1800여만원)을 전달했던 이다.

    최씨는 “찬드라가 아직 승소 소식을 듣지 못했다”며 그녀의 친척인 파담 구릉(38)의 얘기를 전했다. 파담 구릉은 “돈이 문제가 아니다. 네팔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런 불행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또 다른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국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한다”고 말했다는 것.

    최씨는 찬드라가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병을 얻어 1년 전에 죽었으며, 이 일로 찬드라의 집은 많은 빚을 떠안게 됐다고 전했다. 더욱이 마을 사람들이 찬드라에게 “네 어미는 너 때문에 돌아가셨다. 너는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느냐”고 비난해 찬드라는 또 다른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

    이후 ‘풀꽃세상’이 성금을 전달한 뒤에야 찬드라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지난 4월 최씨가 1차 성금을 전달할 때 찬드라는 더듬거리며 이런 말을 했다.

    “이 모든 일이 제가 못 배웠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저를 위로해주시고 찾아와주신 한국인들에게 사람의 머리카락 수만큼 커다란 은혜를 입었군요. 풀꽃세상 같은 환경단체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다시는 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늙은 아버지를 혼자 모시며 살아가고 있는 찬드라는 요즘 추수 준비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고 최씨는 전했다.

    ‘코리아 악몽’ 지워지기를…

    ‘찬드라 사건’을 계기로 2000년 3월29일 경실련에서 이주노동자 인권보호 대책을 위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왼쪽부터 이란주(부천 외국인노동자의집 사무국장), 김동흔(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 운영위원장), 시토우라(재한 네팔인공동체 총무), 정진우 (경불련 외국인노동자마을 간사).

    ‘찬드라 사건’의 발단은 너무나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한 섬유공장에서 보조미싱사로 일하던 찬드라는 1993년 11월 공장 근처의 한 음식점에서 라면을 시켜먹었다. 그는 돈을 갖고 있는 줄 알았지만 잃어버린 상태였다. 음식점 주인은 경찰에 신고했고, 달려온 경찰은 초라한 행색의 찬드라가 신분증을 제시하지 못한 채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자 정신질환을 앓는 행려병자로 판단해 파출소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날 밤 곧바로 청량리정신병원에 넘겼다.

    찬드라는 청량리정신병원에서 ‘우울증과 정신지체’ 진단을 받고 수용됐다. 그러다 열흘 뒤쯤 담당의사들이 찬드라에게서 ‘네팔’이라는 말을 알아듣고 외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찬드라를 데려온 자양1동 파출소로 연락해 처리 방안에 대해 문의했지만 경찰은 아무런 후속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얼마 뒤 찬드라는 성동구청장이 붙여준 ‘선미야’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정식 의료보호대상자가 됐다.

    1994년 7월20일 청량리병원에서 서울시립부녀보호소로 옮겨진 찬드라는 이곳에서도 정신질환자로 분류됐고, 1주일 뒤 용인정신병원으로 이송됐다. 이후 그녀는 정신병동에서 계속 치료를 받다가 재활병동으로 옮겨 다른 환자들을 돌보기까지 했지만 누구도 그의 연고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2000년 초 이곳에 갓 부임한 황태연 박사가 그가 네팔인이라는 걸 알고 다른 네팔인을 만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만난 한 파키스탄인이 그의 이름을 ‘찬드라 꾸마리 구릉(Gurung)’이 아니라 ‘찬드라 꾸마리 고룸(Gorum)’으로 잘못 받아 적는 바람에 일이 엉뚱하게 꼬였다. 의사가 이 이름을 가지고 출입국관리소에 의뢰했지만 관리소에서는 ‘신원확인 불가’라는 간단한 답변만 보내왔고 신원 확인에 실패했다.

    그러다 3월18일 황박사가 네팔에서 의료봉사를 해오던 이근후 열린마음클리닉 원장에게 연락했고, 이원장은 이 사실을 재한 네팔인공동체의 총무인 케이피 시토우라에게 알렸다. 이후 케이피와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등의 노력으로 2000년 4월18일 그는 악몽 같은 정신병원 생활을 청산하게 됐다.

    “아무도 내 얘기를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아 밥도 안 먹고 구석진 곳에서 혼자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병원에서 나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찬드라가 병원을 나와 그를 환영한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이런 그를 왜 정신질환자로 판정했던 것일가. 소송 대리인이었던 이석태 변호사는 “일차적으로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지만 무엇보다 약자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찬드라 사건 진상을 조사했던 이란주씨(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사무국장)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외국인노동자 등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찬드라 사건 이후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으로 외국인들의 가족 실종신고가 많이 들어왔지만 대부분 확인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