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대륙 서쪽 끝에 있는 감비아는 감비아강 유역의 낮은 지대를 끼고 길쭉한 띠 모양으로 자리잡은 나라다. 국토 대부분이 세네갈에 둘러싸여 ‘국가 속의 국가’를 이루는 고립 영토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인구 200만명의 조그만 나라 감비아. 하늘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뿌연 흙먼지 날리는 황토에 푸른 나무들과 강과 늪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며 아프리카 최소국인 이곳은 열대 사바나 기후를 가졌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은 국토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 고령토 등이 조금 매장되어 있을 뿐 지하자원도 빈약하다. 이런 자연의 척박함이 감비아를 고난 속에 살게 하는 비극의 원인인지 모르겠다.
17세기에 영국 사람들은 이곳에 요새를 만들고 본격적인 노예무역 시장으로 삼았으며, 이곳을 ‘노예 해안’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가슴 저린 역사의 한 부분을 알렉스 헤일리는 소설 ‘뿌리’로 형상화했다. 알렉스 헤일리는 감비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미국 작가인 그는 흑인인 자신의 과거와 유산을 조사하여 ‘뿌리’라는 거작을 발표하며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 노예거래소였던 제임스포트에, 그 시절의 요새는 이미 무너지고 없다. 그러나 쿤타 킨테의 후손인 한 안내자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 시절의 끔찍함과 비참함을 소설 ‘뿌리’의 구절을 인용해 가며 설명했다. 그 옛날의 비극이 지금은 관광객의 동정을 사는 관광상품으로 전락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아직도 슬픔이 보여 가슴이 저려왔다.
감비아의 대부분은 쿤타 킨테와 같은 만딩고족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만데어를 사용하고 서부 사바나인 초원지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부족의 역사가 실로 오래 전부터 시작됐고 그 우수성도 남달랐다. B.C. 4000~3000경에 이미 독자적인 농업 기술을 가졌던 만딩고족은 이를 기반으로 가나에 소닌케 왕국과 14세기 초 전성기에 달한 말리 제국을 세우는 등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되고 다양한 문명을 이루었던 용맹한 부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감비아라는 ‘나라’의 테두리가 구체적으로 생긴 시기는 13세기경이다. 만딩고족, 플라족, 월로프족 등이 현재의 감비아 지역에 정착하여 초창기 부족들을 세우고 여러 왕국을 건설하며 조금씩 나라의 형태를 잡아갔다. 그러나 1455년 포르투갈인이 감비아강을 발견하면서 유럽인의 진출이 이루어지고, 1588년 영국 상인의 세력권으로 들어가면서 감비아는 외세의 이권 다툼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영국과 프랑스가 쟁탈전을 벌여 결국 1783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지금처럼 국토의 생김새가 세네갈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간 ‘국가 속의 국가’ 모습을 띠게 된 것도 이들 국가의 이권 다툼 영향이 크다. 프랑스 영향력이 강했던 지역은 세네갈로, 영국 영향이 강했던 이곳은 감비아로 국경이 강제로 갈라져 버린 탓이다.
감비아의 젖줄인 감비아강은 기니공화국에서 발원하여 감비아를 거쳐 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긴 강이다. 황토빛을 띠는 이 강은 원양 해운을 가능케 해주는 아프리카 서부의 유일한 강이다. 뿐만 아니라 좁고 길다란 땅을 국토로 삼고 있는 감비아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강은 농업을 주 산업으로 하는 감비아에 더없이 소중한 자원이다. 해마다 범류하는 강물 덕에 물 부족을 모르며 비옥함을 유지하는 중류의 충적토에서는 벼농사를, 모래와 물이 잘 빠지는 비탈진 고지대에서는 땅콩 경작이 특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땅콩은 감비아의 명물이기도 하다. 강은 또한 승객, 화물, 우편 수송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다. 도로 사정이 녹록지 않은 데다, 남북으로 뻗어 국토를 면하고 있는 강줄기를 따라 국토를 횡단하기에는 배가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강 아래위를 왕복하는 나룻배나 페리를 감비아강에서는 손쉽게 볼 수 있다.
감비아인들의 주식은 곡식인데 여기에 생선을 얹어 먹는다고 한다. 큰 냄비에 쌀과 감자를 넣어 기름에 볶은 후 그 위에 감비아강이나 대서양(감비아만)에서 잡은 물고기를 얹어 먹는다고 하는데, 그 어종과 수량이 풍부해 수출하기도 한다. 이들의 음식 가운데 바다메기 훈제는 일품이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이들은 외지 손님인 나에게도 반갑게 웃으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음식을 덜어주었다. 가난하지만 함께 나누려는 그 마음씨가 참으로 따뜻했다.
감비아의 수도 반줄은 이 나라를 대표하는 도시지만 규모는 결코 크지 않다. 도로는 포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커다란 구덩이가 많이 패어 있어 우기에는 통행이 곤란할 정도다. 거리에는 감비아의 명물인 땅콩을 파는 상인들과 알록달록 탐스런 열대과일들, 전통적인 방식으로 염색했다는 천을 파는 이들이 눈에 많이 띈다.
대부분의 감비아 사람들은 쟁기를 이용한 이동 농경을 하며 기장과 쌀 등을 재배하거나 가축을 기르는데, 부의 상징이기도 한 가축은 신부값을 치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비록 국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도라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애니미즘의 의식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감비아인들을 좀더 느끼기 위해서는 이들의 음악을 들어봐야 한다. 전통 타악기(드럼이나 소 방울 같은 것들), 코라라는 현악기, 실로폰 등으로 표현하는 사냥이나 의식, 두려움의 표시 등은 이들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혼합된 형태의 문화도 많이 나타나지만, 뛰어난 예술 감각으로 만들어내는 보석, 섬유, 바구니, 마스크 등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정신이 담겨 있다.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건네는 쿤타 킨테 후손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들에게 이제 그들의 선조가 겪었던 고행의 역사는 사라지고 감비아강을 화사하게 비쳐주는 태양처럼 밝은 미래만이 존재하기를 기원할 뿐이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며 아프리카 최소국인 이곳은 열대 사바나 기후를 가졌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은 국토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 고령토 등이 조금 매장되어 있을 뿐 지하자원도 빈약하다. 이런 자연의 척박함이 감비아를 고난 속에 살게 하는 비극의 원인인지 모르겠다.
17세기에 영국 사람들은 이곳에 요새를 만들고 본격적인 노예무역 시장으로 삼았으며, 이곳을 ‘노예 해안’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가슴 저린 역사의 한 부분을 알렉스 헤일리는 소설 ‘뿌리’로 형상화했다. 알렉스 헤일리는 감비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미국 작가인 그는 흑인인 자신의 과거와 유산을 조사하여 ‘뿌리’라는 거작을 발표하며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 노예거래소였던 제임스포트에, 그 시절의 요새는 이미 무너지고 없다. 그러나 쿤타 킨테의 후손인 한 안내자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 시절의 끔찍함과 비참함을 소설 ‘뿌리’의 구절을 인용해 가며 설명했다. 그 옛날의 비극이 지금은 관광객의 동정을 사는 관광상품으로 전락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아직도 슬픔이 보여 가슴이 저려왔다.
감비아의 대부분은 쿤타 킨테와 같은 만딩고족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만데어를 사용하고 서부 사바나인 초원지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부족의 역사가 실로 오래 전부터 시작됐고 그 우수성도 남달랐다. B.C. 4000~3000경에 이미 독자적인 농업 기술을 가졌던 만딩고족은 이를 기반으로 가나에 소닌케 왕국과 14세기 초 전성기에 달한 말리 제국을 세우는 등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되고 다양한 문명을 이루었던 용맹한 부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감비아라는 ‘나라’의 테두리가 구체적으로 생긴 시기는 13세기경이다. 만딩고족, 플라족, 월로프족 등이 현재의 감비아 지역에 정착하여 초창기 부족들을 세우고 여러 왕국을 건설하며 조금씩 나라의 형태를 잡아갔다. 그러나 1455년 포르투갈인이 감비아강을 발견하면서 유럽인의 진출이 이루어지고, 1588년 영국 상인의 세력권으로 들어가면서 감비아는 외세의 이권 다툼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17세기 후반에 영국과 프랑스가 쟁탈전을 벌여 결국 1783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지금처럼 국토의 생김새가 세네갈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간 ‘국가 속의 국가’ 모습을 띠게 된 것도 이들 국가의 이권 다툼 영향이 크다. 프랑스 영향력이 강했던 지역은 세네갈로, 영국 영향이 강했던 이곳은 감비아로 국경이 강제로 갈라져 버린 탓이다.
감비아의 젖줄인 감비아강은 기니공화국에서 발원하여 감비아를 거쳐 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긴 강이다. 황토빛을 띠는 이 강은 원양 해운을 가능케 해주는 아프리카 서부의 유일한 강이다. 뿐만 아니라 좁고 길다란 땅을 국토로 삼고 있는 감비아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강은 농업을 주 산업으로 하는 감비아에 더없이 소중한 자원이다. 해마다 범류하는 강물 덕에 물 부족을 모르며 비옥함을 유지하는 중류의 충적토에서는 벼농사를, 모래와 물이 잘 빠지는 비탈진 고지대에서는 땅콩 경작이 특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땅콩은 감비아의 명물이기도 하다. 강은 또한 승객, 화물, 우편 수송을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다. 도로 사정이 녹록지 않은 데다, 남북으로 뻗어 국토를 면하고 있는 강줄기를 따라 국토를 횡단하기에는 배가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강 아래위를 왕복하는 나룻배나 페리를 감비아강에서는 손쉽게 볼 수 있다.
감비아인들의 주식은 곡식인데 여기에 생선을 얹어 먹는다고 한다. 큰 냄비에 쌀과 감자를 넣어 기름에 볶은 후 그 위에 감비아강이나 대서양(감비아만)에서 잡은 물고기를 얹어 먹는다고 하는데, 그 어종과 수량이 풍부해 수출하기도 한다. 이들의 음식 가운데 바다메기 훈제는 일품이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이들은 외지 손님인 나에게도 반갑게 웃으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음식을 덜어주었다. 가난하지만 함께 나누려는 그 마음씨가 참으로 따뜻했다.
감비아의 수도 반줄은 이 나라를 대표하는 도시지만 규모는 결코 크지 않다. 도로는 포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커다란 구덩이가 많이 패어 있어 우기에는 통행이 곤란할 정도다. 거리에는 감비아의 명물인 땅콩을 파는 상인들과 알록달록 탐스런 열대과일들, 전통적인 방식으로 염색했다는 천을 파는 이들이 눈에 많이 띈다.
대부분의 감비아 사람들은 쟁기를 이용한 이동 농경을 하며 기장과 쌀 등을 재배하거나 가축을 기르는데, 부의 상징이기도 한 가축은 신부값을 치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비록 국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도라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애니미즘의 의식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감비아인들을 좀더 느끼기 위해서는 이들의 음악을 들어봐야 한다. 전통 타악기(드럼이나 소 방울 같은 것들), 코라라는 현악기, 실로폰 등으로 표현하는 사냥이나 의식, 두려움의 표시 등은 이들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혼합된 형태의 문화도 많이 나타나지만, 뛰어난 예술 감각으로 만들어내는 보석, 섬유, 바구니, 마스크 등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정신이 담겨 있다.
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건네는 쿤타 킨테 후손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들에게 이제 그들의 선조가 겪었던 고행의 역사는 사라지고 감비아강을 화사하게 비쳐주는 태양처럼 밝은 미래만이 존재하기를 기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