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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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보수에 100년 전 벽돌 복원

외벽 벽돌 30만~40만장 교체 … 원래 벽돌보다 보수 벽돌 부식 더 심각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입력2004-10-15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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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성당 보수에 100년 전 벽돌 복원
    1895년의 서울. 왕후가 일본인 폭도들에게 시해되어 온통 뒤숭숭하던 즈음, 종현(鐘峴·지금의 명동) 언덕 위로 웅장한 벽돌집 하나가 서서히 올라와 화젯거리가 되고 있었다. 파란 눈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청국의 벽돌공들을 불러와 짓는 집이었다. 날마다 종현 언덕에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와 집 짓는 광경을 구경하며 “대체 무슨 집을 이렇게 크게 지을까? 들보를 얹을 수 없으니까 벽만 자꾸 쌓아올리는구나!” 하고 웅성대곤 했다.

    그런가 하면,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이 땅이 조선왕조 임금들의 화상이 모셔져 있는 영희전(永禧殿)의 주맥이므로 건물을 지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고 나섰다. 건축 도중 청일전쟁이 일어나 청국에서 온 벽돌공들이 떠나버리는가 하면, 다 지은 건물에 불이 나기도 했다. 신자들이 신앙심으로 건축에 참여했지만 비숙련공인 이들이 쌓아올린 부벽주와 창문 기둥 등은 건축 도중 무너지기가 일쑤였다. 6년에 걸친 명동성당 공사는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갖가지 우여곡절 끝에 명동성당은 지금으로부터 꼭 한 세기 전인 1898년 완공되었다. 성령강림대축일인 5월29일에 열린 성당 낙성식에는 총리대신 박정양을 비롯해 성당 건립을 반대하던 정부 각료들이 모두 참석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4대문 안 어디서나 보이는 명동성당의 뾰족 지붕을 보고 길의 방향을 찾곤 했다. 명동성당의 별명은 ‘언덕 위의 뾰족집’이었다.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이완용은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국왕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다가 이재명 의사의 칼침을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명동성당 보수에 100년 전 벽돌 복원
    명동성당은 서울 중림동의 약현성당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완공된 서양식 성당이자 한국 천주교 신앙의 성지다. 최초의 세례교인인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신앙공동체가 정기적으로 모이던 곳이 명례방(현재의 명동 일대)에 있는 김범우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의미 외에도 104년 동안 끊임없이 사용돼 온 건물이라는 측면에서 명동성당이 갖는 건축사적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이 명동성당이 올해 7월부터 보수 공사에 들어간다. 3년이라는 시간과 50억원의 적잖은 예산이 들어가는 공사지만 공사 후에도 명동성당의 모습은 거의 달라지지 않을 듯싶다. 보수공사는 성당 외벽을 둘러싼 70여만장의 벽돌 중 심하게 부식된 30만~40만장의 벽돌을 하나씩 빼내어 특별히 제작된 벽돌로 갈아 끼우는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진행된다.



    보수 책임을 맡은 김태우 성전보존분과위원장(건축가)은 “모든 보수 방식은 한 세기 전 성당을 지을 때와 똑같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건축 당시에 쓰인 벽돌과 회벽의 성분을 분석해 가능한 한 비슷하게 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1898년 완공 이래 명동성당의 건물 구조는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성당측은 “가끔 성당 내부로 석회가 떨어지는 경우는 있지만 건물 자체에 균열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고층건물을 지어본 경험이 전무했던 조선인들이 어떻게 100년 동안이나 끄떡없는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명동성당의 설계와 공사를 혼자 지휘하다시피 한 코스트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건축과정을 공부하고 홍콩 상하이 등지에서 성당을 건축해 본 경험이 있는 건축가였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중국의 성당과 고향인 프랑스의 성당을 참조해 고딕식 건물인 명동성당을 설계했다.

    오히려 70년대 들어 이루어진 여러 번의 보수공사가 건물의 노화를 촉진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병영시설로 압수되었던 명동성당에는 군데군데 총탄을 맞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70년대 들어 이 총탄 자국을 가리기 위해 성당 외벽에 페인트칠을 했으나 칠이 벽돌의 숨구멍을 막아 부식이 더 빨리 진행되는 원인이 되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성당측은 페인트를 모두 벗겨내는 재보수를 했으나 이번에는 벽돌의 유약마저 벗겨져 벽돌의 풍화가 일어났다. 현재 성당 외벽의 벽돌은 군데군데 갈라지거나 구멍이 패어 있는 모습이 눈으로도 뚜렷하게 보이는 상태다. 또 100년 전에 만들어진 벽돌과 70년대에 보수한 벽돌의 규격이 다른 것도 문제. 김태우 위원장은 “원래의 벽돌보다 보수공사에 사용된 벽돌의 부식이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명동성당은 완공 100주년을 넘기면서 보수공사의 필요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2000년에는 영국 문화재청의 벽돌보수 전문가인 마이클 스톡, 일본건축문화연구소장인 후쿠다 쇼조 등 해외의 벽돌건물 전문가들을 초청해 대규모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이 세미나에서 얻은 결론은 ‘문화재는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 이 때문에 손상된 벽돌을 하나씩 빼어 새 벽돌로 갈아 끼우는 보수 방식을 택한 것이다.

    명동성당 보수에 100년 전 벽돌 복원
    한국 근대건축 전문가인 목원대의 김정동 교수(건축·도시공학부)는 명동성당의 상태에 대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모르나 내벽의 부식 정도는 시급히 보수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현재 명동성당 말고도 지방에는 100여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성당들이 남아 있습니다. 명동성당의 보수 결과에 따라 이 성당들이 보수 방식을 결정지을 것이기 때문에 명동성당의 보수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한국은 4계절이 모두 있어 건물의 풍화가 빨리 일어나는 편이죠.”

    한일합방과 한국전쟁, 80년대의 민주화 투쟁 등 각종 현대사의 굴곡을 지켜본 명동성당은 이미 특정 종교를 떠나 명동과 서울을 대표하는 건물로 자리잡고 있다. 명동성당이 보수공사를 거쳐 다시 튼튼한 원형을 되찾고 새로운 역사를 일구어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비단 교인들만이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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