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 무르익은 이맘때쯤엔 어딜 가나 꽃길이다. 어느 고장, 어느 길가에나 과수원 없는 데는 드물다. 복사꽃 사그라진 춘경(春景) 속에 배꽃이 들어앉고, 배꽃 흩날릴 즈음이면 사과꽃이 뒤를 잇는다. 그러니 전국적으로 소문난 꽃길만 애면글면 찾아갈 필요는 없다. 이른바 ‘꽃길 명소’에서는 만발한 꽃송이보다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의 원색 옷차림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더욱이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에 치이고 얄팍한 바가지 상혼에 시달리다 보면 큰맘 먹고 나선 여행길은 끔찍한 악몽이 되고 만다.
총길이 426km의 19번 국도는 강원도 원주에서 경남 남해도까지의 내륙지방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아무리 주마간산의 여정(旅程)이라 해도 족히 하룻길이 넘는다. 짬짬이 곁눈질도 하고, 도중에 만나는 곁길과 샛길도 들락거리다 보면 2박3일의 일정도 빠듯하다. 더욱이 4월의 길가 풍경은 눈부시게 찬란하다. 제철 만나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꽃들과 막 움트기 시작한 연둣빛 신록에 매료돼 해찰하다 보면 좀체 이수(里數)가 늘지 않는다. 그래서 봄 여행은 나른할 수밖에 없다. 나른한 봄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애초부터 일정을 느긋하게 잡아야 한다. 19번 국도를 따라가는 여정도 두 차례로 나눌 작정을 하고 길을 나섰다.
중앙고속도로 남원주 IC를 빠져나오면 곧장 19번 국도에 들어선다. 여정의 시점부터 눈길 닿는 곳곳마다 하얀 꽃구름이 내려앉아 있다. 화장기 없는 산골 소녀처럼 소박한 배꽃이다. 과실수뿐만 아니라 산비탈과 풀숲에 야생하는 꽃나무들도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렸다. 길가 숲 속에는 산벚꽃, 진달래, 조팝나무꽃이 한창이다. 도농(都農)이 뒤섞인 어정쩡한 풍경조차도 꽃이 있어 아름답게 보인다.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의 토지문학관 입구를 지나면 19번 국도의 첫 고개인 큰양안치다. 큰양안치와 작은양안치를 넘으면 원주시 귀래면이고, 귀래면 소재지를 지나자마자 충청도 충주 땅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는 사과밭이 부쩍 많아진다. 하지만 사과꽃은 볕 잘 드는 가지에만 한둘씩 벌어져 있고, 나무 전체에 만개한 광경은 4월 넷째 주에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19번 국도는 목계나루를 거쳐 충주 시내로 들어간다. 충주시는 원주를 떠나온 19번 국도의 경유지 가운데 가장 크고 번화한 곳이다. ‘한반도의 중심’이라 자부하던 옛 중원(中原)의 자취를 더듬거나 호텔 같은 고급 숙소를 원한다면 여기서 하룻밤 묵어갈 만하다.
19번 국도가 지나는 충주, 괴산, 보은 등은 백두대간의 주맥(主脈)이 지나거나 그리 멀지 않은 내륙 산간지방이다. 그러나 산세(山勢)가 주는 느낌이 강원도나 경상도 내륙지방의 그것과는 뚜렷하게 다르다. 대체로 산이 낮고 산세도 부드러워 위압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각(角)이 없고 선(線)만 있으니 딱히 눈길 끌 만한 풍경도 그리 없다.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거기 같다. 그래도 바라볼수록 마음 편하고, 그래서 한동안 눌러앉고 싶어진다. 어쩌면 흔히 ‘모난 데 없다’고들 말하는 충청도 사람들의 성정도 바로 그런 산세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괴산과 보은을 거쳐 옥천 땅에 들어서자 이따금 금강 상류의 물길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사라지길 거듭한다. 옥천군 청성면과 청산면을 지날 때면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 경부고속도로 영동 IC를 지나 영동 읍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초강천, 그리고 영동읍에서 무주 가는 19번 국도 가까이의 양산팔경에는 금강 본류가 굽이쳐 흐른다. 하나같이 물빛 맑고 듬직한 산자락을 비집고 흐르는 물길이다. 더구나 모처럼 봄비가 흡족히 내려 한동안 실개천 같던 물길도 제법 유장하고 도도하다. 물가 바위틈에는 때 이른 염려(艶麗)한 꽃빛의 수달래가 흐벅지게 피어 있다. 그간의 편안하지만 밋밋했던 풍경과는 달리, 산수의 조화가 그림인 듯 절묘하다.
영동군 학산면 봉소리 학산재를 넘어서면 전라북도 무주군이다. 그런데 학산재 고갯마루에는 ‘학산재’와 ‘압치’라 새겨진 표석이 각기 하나씩 있다. 학산면에 있어서 학산재이고, 고개 아래 영동군의 첫 마을이 ‘압재’라서 압치다. 학산재를 내려선 길을 무주읍 오산삼거리에서 30·37번 국도와 만난다. 30·37번 국도는 설천면 나제통문 삼거리에서 다시 갈리는데, 30번 국도는 무풍을 거쳐 김천으로 가는 길이고, 37번 국도는 무주 구천동 입구를 지나 거창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영·호남을 잇는 두 길 모두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아름답고 늘 한적해서 산간 드라이브 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무주읍 오산리 왕정마을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돌의 산출지로 이름난 곳이다. 구상 화강편마암(球狀 花崗片麻巖·천연기념물 제249호)이라 명명된 이 돌은 1928년 영국의 지질학자 홀머스(A. Holmas)가 처음 발견했다. 핵을 이룬 구상 물질이 화강암석에 박혀 있어 돌 표면의 무늬가 마치 호랑이의 그것처럼 알록달록하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호랑이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이 돌은 현재 제 고향을 떠나 무주 읍내의 무주군청 뒤뜰에 전시돼 있다.
무주 읍내에서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대전~통영고속도로가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까지 왔다면 426km의 19번 국도는 절반 넘게 지나온 셈이다. 무주에서 장수, 남원, 구례, 하동을 거쳐 남해도에 닿으려면 숨가쁘게 달려도 3시간쯤 소요된다. 하지만 주행(走行)이 아닌 여행(旅行)인 만큼, 지리산과 섬진강과 남해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그 길을 서둘러 달릴 필요는 없다. 그러니 일정의 여유가 없다면 훗날을 기약하며 무주 IC로 들어서는 게 상책이다.
총길이 426km의 19번 국도는 강원도 원주에서 경남 남해도까지의 내륙지방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아무리 주마간산의 여정(旅程)이라 해도 족히 하룻길이 넘는다. 짬짬이 곁눈질도 하고, 도중에 만나는 곁길과 샛길도 들락거리다 보면 2박3일의 일정도 빠듯하다. 더욱이 4월의 길가 풍경은 눈부시게 찬란하다. 제철 만나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꽃들과 막 움트기 시작한 연둣빛 신록에 매료돼 해찰하다 보면 좀체 이수(里數)가 늘지 않는다. 그래서 봄 여행은 나른할 수밖에 없다. 나른한 봄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애초부터 일정을 느긋하게 잡아야 한다. 19번 국도를 따라가는 여정도 두 차례로 나눌 작정을 하고 길을 나섰다.
중앙고속도로 남원주 IC를 빠져나오면 곧장 19번 국도에 들어선다. 여정의 시점부터 눈길 닿는 곳곳마다 하얀 꽃구름이 내려앉아 있다. 화장기 없는 산골 소녀처럼 소박한 배꽃이다. 과실수뿐만 아니라 산비탈과 풀숲에 야생하는 꽃나무들도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렸다. 길가 숲 속에는 산벚꽃, 진달래, 조팝나무꽃이 한창이다. 도농(都農)이 뒤섞인 어정쩡한 풍경조차도 꽃이 있어 아름답게 보인다.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의 토지문학관 입구를 지나면 19번 국도의 첫 고개인 큰양안치다. 큰양안치와 작은양안치를 넘으면 원주시 귀래면이고, 귀래면 소재지를 지나자마자 충청도 충주 땅에 들어선다. 여기서부터는 사과밭이 부쩍 많아진다. 하지만 사과꽃은 볕 잘 드는 가지에만 한둘씩 벌어져 있고, 나무 전체에 만개한 광경은 4월 넷째 주에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19번 국도는 목계나루를 거쳐 충주 시내로 들어간다. 충주시는 원주를 떠나온 19번 국도의 경유지 가운데 가장 크고 번화한 곳이다. ‘한반도의 중심’이라 자부하던 옛 중원(中原)의 자취를 더듬거나 호텔 같은 고급 숙소를 원한다면 여기서 하룻밤 묵어갈 만하다.
19번 국도가 지나는 충주, 괴산, 보은 등은 백두대간의 주맥(主脈)이 지나거나 그리 멀지 않은 내륙 산간지방이다. 그러나 산세(山勢)가 주는 느낌이 강원도나 경상도 내륙지방의 그것과는 뚜렷하게 다르다. 대체로 산이 낮고 산세도 부드러워 위압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각(角)이 없고 선(線)만 있으니 딱히 눈길 끌 만한 풍경도 그리 없다.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거기 같다. 그래도 바라볼수록 마음 편하고, 그래서 한동안 눌러앉고 싶어진다. 어쩌면 흔히 ‘모난 데 없다’고들 말하는 충청도 사람들의 성정도 바로 그런 산세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괴산과 보은을 거쳐 옥천 땅에 들어서자 이따금 금강 상류의 물길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사라지길 거듭한다. 옥천군 청성면과 청산면을 지날 때면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 경부고속도로 영동 IC를 지나 영동 읍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초강천, 그리고 영동읍에서 무주 가는 19번 국도 가까이의 양산팔경에는 금강 본류가 굽이쳐 흐른다. 하나같이 물빛 맑고 듬직한 산자락을 비집고 흐르는 물길이다. 더구나 모처럼 봄비가 흡족히 내려 한동안 실개천 같던 물길도 제법 유장하고 도도하다. 물가 바위틈에는 때 이른 염려(艶麗)한 꽃빛의 수달래가 흐벅지게 피어 있다. 그간의 편안하지만 밋밋했던 풍경과는 달리, 산수의 조화가 그림인 듯 절묘하다.
영동군 학산면 봉소리 학산재를 넘어서면 전라북도 무주군이다. 그런데 학산재 고갯마루에는 ‘학산재’와 ‘압치’라 새겨진 표석이 각기 하나씩 있다. 학산면에 있어서 학산재이고, 고개 아래 영동군의 첫 마을이 ‘압재’라서 압치다. 학산재를 내려선 길을 무주읍 오산삼거리에서 30·37번 국도와 만난다. 30·37번 국도는 설천면 나제통문 삼거리에서 다시 갈리는데, 30번 국도는 무풍을 거쳐 김천으로 가는 길이고, 37번 국도는 무주 구천동 입구를 지나 거창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영·호남을 잇는 두 길 모두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아름답고 늘 한적해서 산간 드라이브 코스로도 안성맞춤이다.
무주읍 오산리 왕정마을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돌의 산출지로 이름난 곳이다. 구상 화강편마암(球狀 花崗片麻巖·천연기념물 제249호)이라 명명된 이 돌은 1928년 영국의 지질학자 홀머스(A. Holmas)가 처음 발견했다. 핵을 이룬 구상 물질이 화강암석에 박혀 있어 돌 표면의 무늬가 마치 호랑이의 그것처럼 알록달록하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호랑이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이 돌은 현재 제 고향을 떠나 무주 읍내의 무주군청 뒤뜰에 전시돼 있다.
무주 읍내에서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대전~통영고속도로가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까지 왔다면 426km의 19번 국도는 절반 넘게 지나온 셈이다. 무주에서 장수, 남원, 구례, 하동을 거쳐 남해도에 닿으려면 숨가쁘게 달려도 3시간쯤 소요된다. 하지만 주행(走行)이 아닌 여행(旅行)인 만큼, 지리산과 섬진강과 남해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그 길을 서둘러 달릴 필요는 없다. 그러니 일정의 여유가 없다면 훗날을 기약하며 무주 IC로 들어서는 게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