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유통회사인 다산실업 대표 김원수씨(54)에게는 그만의 비밀스런 ‘보물창고’가 있다. 강원도 산골짜기에 하나, 그리고 그의 집이 있는 대구 인근 경산시에 둘 해서 모두 세 군데다. 얼마 전부터는 이 창고에 진귀한 물건이 많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급기야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찾아와 살펴보고 가는 주민들까지 생겨났다.
“뭐 이걸 가지고 그래”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 “꼭 옛날 우리 집 광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며 탄성을 지르는 사람 등 김씨의 보물창고를 본 소감은 각양각색. 그중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렇게 귀한 것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저건 우리 할아버지가 즐겨 쓰신 물건인데….” 보물의 진가를 알아주는 주민들의 덕담에 김씨의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김씨가 지난 25년간 모은 보물은 보물선에서 건져올린 금은 세공품이나 고려청자와 같은 값비싼 유물류가 아니다. 모두 합쳐봐야 몇 억원도 되지 않는 조선시대 생활도구들이 그 정체다. 그런데도 겉보기에 꼭 공장 같은 그의 창고를 사람들이 보물창고라 부르는 것은 그곳이 노인에게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향수에 젖을 수 있는 추억의 터전이고, 젊은 사람에게는 이제는 사라져 보기 힘든 옛것을 만날 수 있는 황금 같은 배움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나무스키, 통발, 삼지창, 뱀장어창, 멧돼지창, 곰창과 같은 수렵도구에서 손대패, 둥글대패, 밀대패, 변탕, 골대패, 거두(톱의 일종) 등 목수 연장, 풀무, 집게와 같은 대장 연장, 뒤주, 개구멍 머릿장, 엽전개 웃다지, 반다지, 메주틀, 베틀, 소주고리, 기름틀, 국수틀, 떡판, 나무독, 채독에 이르기까지, 일반인은 이름도 알 수 없는 물건들이 그 안에 가득하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현대문명에 자리를 내준 조선시대 서민들의 생활도구류 1500여점이 산천에 버려질 운명을 간신히 면하고 김씨의 손에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가 모은 조선시대 생활도구류는 불과 40~50년 전까지만 해도 산간 오지마을에서 실제로 먹고 사는 데 사용한 도구들이다. 물건마다 짧게는 100년, 길게는 수백년씩 대를 이어오면서 조상들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 있다. 그래서 김씨의 소장품들은 만져도 부담 없고 보기에도 정겨운 진짜 보물들이다.
조선시대 생활도구류, 특히 생산 연장에 대한 그의 수집 인생은 오지마을 여행에서 비롯됐다. 20대 초반에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그는 지난 74년 무역회사에 잠시 근무했지만 복잡하고 경쟁적인 도회 생활이 싫어 그때부터 산천을 떠돌기 시작했다.
“겨울에 한강이 얼었다 하면 봇짐 둘러메고 강원도 오지로 향했죠. 전기도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니까 강이 얼지 않고서는 도보 여행이 불가능했습니다. 묵을 곳이 따로 없어 그곳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다 보니 아직도 그들은 선조들이 써온 연장이며 도구들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이렇게 오지 여행을 즐기던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화전민과 오지마을의 광과 뒷간, 정지(부엌), 심지어 안방까지 ‘침범’해 닥치는 대로 생활도구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불현듯 이 물건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누군가 보관하고 다듬어 후손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숙명처럼 다가왔기 때문.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대부분 지금 돈으로 5000~1만원이면 구할 수 있었는데 일해주고 공짜로 얻은 자료가 더 많았다. 자신이 사다준 플라스틱 바가지를 받은 한 산촌 아낙네가 100년 넘게 써온 나무 두레박을 헌신짝 버리듯 부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오지마을 너와집 광 속에 기름불 켜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꼭 내가 100년,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옛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어요. 그들의 땀냄새 밴 연장들, 금세라도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를 것 같은 메주틀, 국수틀 등 연장을 보면 그들의 생활 모습이 보여요. 그런 감정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거죠.”
전국을 떠돌던 그는 79년 산간 생활에 매료돼 아예 강원도 명주군 옥계면 산간마을에 너와집(굴피집)과 전답을 사서 정착했다. 너와집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그 집에 있는 조선시대 생활도구들을 그대로 물려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집의 모든 부분들, 구들은 구들대로 수렵도구는 수렵도구대로 따로 정리해 자료 창고로 만든 뒤 2년 후 대구로 낙향했다. 지금 그의 보물창고 중 하나인 산골짜기 창고다.
이후 그는 화장품 유통회사를 차려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동안에도 수집 여행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하면 잘되던 일도 어떤 목적이 생기면 잘 되지 않는 법. 이때부터 그의 수집 여정에 어려움이 시작됐다.
“함께 생활하면서 얻으면 무리가 없는데, 단시일 내에 구하려니까 도둑으로 몰려 뭇매를 맞거나 지서까지 끌려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죠. 한번은 폭설이 내려 산간에 고립돼 잘 곳이 딱 한 집밖에 없었는데 그 집 주인이 저를 공비로 오인하고 제 목에 삼지창을 들이댔어요. 싹싹 빌고 사정을 설명해 겨우 오해를 풀었지요. 그 집에서 일주일 묵으며 제 목을 겨눈 200년 묵은 삼지창도 얻고, 제가 가장 아끼는 생활자료 중 하나인 피나무 독과 채독(버들나무로 엮어 만든 나무 독)도 얻었습니다.”
그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80년대 후반 들어 옛것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그의 자료를 하나둘씩 훔쳐가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베틀과 가마니틀, 돗자리틀 같은 틀 종류와 반상류는 물건이 크기 때문에 한꺼번에 가지고 가려고 각 동네마다 한 집을 정해놓고 보관했는데 몇 달 후 가보면 물건이 모두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 일 당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요.” 그래서 그가 5년 전부터 마련한 곳이 경산시 진량공단과 용소마을에 만든 비밀 창고였다.
김씨의 보물창고 소장품은 지난 1월3일부터 20일까지 마산시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마산 대우백화점 갤러리로부터 조선시대 생활문화자료 전시 요청을 받은 것이다. 그는 쾌히 승낙했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그의 25년 수집 인생이 빛을 발하는 자리였다. 근엄하게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유물전시회보다 학생들에게 과거 조상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후한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수집품과 수집 인생이 세상에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 이즈음 그는 오히려 이 유물들을 떠나보낼 결심을 굳혔다.
“수집에도 한계가 온 것 같습니다. 자식이 자라면 부모 품을 떠나듯, 이 자료들을 끌어안고 있다 해서 제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료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해석하고 활용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박물관이든 어디든 희사하고 싶습니다.”
김씨는 요즘 25년 동안 애지중지 길러온 딸자식을 시집보내는 부모의 마음으로 1500여점 조선시대 생활도구에 대한 자료 목록을 정리하고 있다.
“뭐 이걸 가지고 그래”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 “꼭 옛날 우리 집 광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며 탄성을 지르는 사람 등 김씨의 보물창고를 본 소감은 각양각색. 그중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이렇게 귀한 것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저건 우리 할아버지가 즐겨 쓰신 물건인데….” 보물의 진가를 알아주는 주민들의 덕담에 김씨의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김씨가 지난 25년간 모은 보물은 보물선에서 건져올린 금은 세공품이나 고려청자와 같은 값비싼 유물류가 아니다. 모두 합쳐봐야 몇 억원도 되지 않는 조선시대 생활도구들이 그 정체다. 그런데도 겉보기에 꼭 공장 같은 그의 창고를 사람들이 보물창고라 부르는 것은 그곳이 노인에게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향수에 젖을 수 있는 추억의 터전이고, 젊은 사람에게는 이제는 사라져 보기 힘든 옛것을 만날 수 있는 황금 같은 배움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나무스키, 통발, 삼지창, 뱀장어창, 멧돼지창, 곰창과 같은 수렵도구에서 손대패, 둥글대패, 밀대패, 변탕, 골대패, 거두(톱의 일종) 등 목수 연장, 풀무, 집게와 같은 대장 연장, 뒤주, 개구멍 머릿장, 엽전개 웃다지, 반다지, 메주틀, 베틀, 소주고리, 기름틀, 국수틀, 떡판, 나무독, 채독에 이르기까지, 일반인은 이름도 알 수 없는 물건들이 그 안에 가득하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현대문명에 자리를 내준 조선시대 서민들의 생활도구류 1500여점이 산천에 버려질 운명을 간신히 면하고 김씨의 손에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가 모은 조선시대 생활도구류는 불과 40~50년 전까지만 해도 산간 오지마을에서 실제로 먹고 사는 데 사용한 도구들이다. 물건마다 짧게는 100년, 길게는 수백년씩 대를 이어오면서 조상들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 있다. 그래서 김씨의 소장품들은 만져도 부담 없고 보기에도 정겨운 진짜 보물들이다.
조선시대 생활도구류, 특히 생산 연장에 대한 그의 수집 인생은 오지마을 여행에서 비롯됐다. 20대 초반에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그는 지난 74년 무역회사에 잠시 근무했지만 복잡하고 경쟁적인 도회 생활이 싫어 그때부터 산천을 떠돌기 시작했다.
“겨울에 한강이 얼었다 하면 봇짐 둘러메고 강원도 오지로 향했죠. 전기도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니까 강이 얼지 않고서는 도보 여행이 불가능했습니다. 묵을 곳이 따로 없어 그곳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다 보니 아직도 그들은 선조들이 써온 연장이며 도구들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이렇게 오지 여행을 즐기던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화전민과 오지마을의 광과 뒷간, 정지(부엌), 심지어 안방까지 ‘침범’해 닥치는 대로 생활도구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불현듯 이 물건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누군가 보관하고 다듬어 후손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숙명처럼 다가왔기 때문.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대부분 지금 돈으로 5000~1만원이면 구할 수 있었는데 일해주고 공짜로 얻은 자료가 더 많았다. 자신이 사다준 플라스틱 바가지를 받은 한 산촌 아낙네가 100년 넘게 써온 나무 두레박을 헌신짝 버리듯 부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오지마을 너와집 광 속에 기름불 켜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꼭 내가 100년,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옛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어요. 그들의 땀냄새 밴 연장들, 금세라도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를 것 같은 메주틀, 국수틀 등 연장을 보면 그들의 생활 모습이 보여요. 그런 감정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거죠.”
전국을 떠돌던 그는 79년 산간 생활에 매료돼 아예 강원도 명주군 옥계면 산간마을에 너와집(굴피집)과 전답을 사서 정착했다. 너와집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그 집에 있는 조선시대 생활도구들을 그대로 물려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집의 모든 부분들, 구들은 구들대로 수렵도구는 수렵도구대로 따로 정리해 자료 창고로 만든 뒤 2년 후 대구로 낙향했다. 지금 그의 보물창고 중 하나인 산골짜기 창고다.
이후 그는 화장품 유통회사를 차려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동안에도 수집 여행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하면 잘되던 일도 어떤 목적이 생기면 잘 되지 않는 법. 이때부터 그의 수집 여정에 어려움이 시작됐다.
“함께 생활하면서 얻으면 무리가 없는데, 단시일 내에 구하려니까 도둑으로 몰려 뭇매를 맞거나 지서까지 끌려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죠. 한번은 폭설이 내려 산간에 고립돼 잘 곳이 딱 한 집밖에 없었는데 그 집 주인이 저를 공비로 오인하고 제 목에 삼지창을 들이댔어요. 싹싹 빌고 사정을 설명해 겨우 오해를 풀었지요. 그 집에서 일주일 묵으며 제 목을 겨눈 200년 묵은 삼지창도 얻고, 제가 가장 아끼는 생활자료 중 하나인 피나무 독과 채독(버들나무로 엮어 만든 나무 독)도 얻었습니다.”
그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80년대 후반 들어 옛것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그의 자료를 하나둘씩 훔쳐가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베틀과 가마니틀, 돗자리틀 같은 틀 종류와 반상류는 물건이 크기 때문에 한꺼번에 가지고 가려고 각 동네마다 한 집을 정해놓고 보관했는데 몇 달 후 가보면 물건이 모두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 일 당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요.” 그래서 그가 5년 전부터 마련한 곳이 경산시 진량공단과 용소마을에 만든 비밀 창고였다.
김씨의 보물창고 소장품은 지난 1월3일부터 20일까지 마산시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마산 대우백화점 갤러리로부터 조선시대 생활문화자료 전시 요청을 받은 것이다. 그는 쾌히 승낙했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그의 25년 수집 인생이 빛을 발하는 자리였다. 근엄하게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유물전시회보다 학생들에게 과거 조상들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후한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수집품과 수집 인생이 세상에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 이즈음 그는 오히려 이 유물들을 떠나보낼 결심을 굳혔다.
“수집에도 한계가 온 것 같습니다. 자식이 자라면 부모 품을 떠나듯, 이 자료들을 끌어안고 있다 해서 제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료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해석하고 활용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박물관이든 어디든 희사하고 싶습니다.”
김씨는 요즘 25년 동안 애지중지 길러온 딸자식을 시집보내는 부모의 마음으로 1500여점 조선시대 생활도구에 대한 자료 목록을 정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