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이 떠난 최종 책임은 DJ에게 있다. 그러나 DJ보고 물러나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래서 그의 분신으로, 그림자로 국정을 주도한 권노갑 전 위원과 박지원 정책기획수석을 찍은 것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을 내치지 못한다면 세 사람은 한묶음으로 난도질당할 것이다.”(개혁연대 한 인사)
민주당 권노갑 전 최고위원과 박지원 청와대정책기획수석의 진퇴문제를 놓고 김대중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김대통령에게 두 인사는 ‘계륵’이다.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안고 가기도 부담스러운 존재다.
따지고 보면 최근 민주당 내분은 두 인사의 거취를 둘러싼 갈등에서 출발했다. 그들의 진퇴문제는 소장파와 동교동계, 이인제와 반이인제 진영의 대립을 몰고 왔다. 청와대와 당 일각에서는 당의 안정을 위해 두 인사의 진퇴문제를 조기에 매듭지어야 한다는 처방전을 내놓고 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두 인사가 국정 농단의 주역이라는 소장파의 지적에 언론도 동조하는 양상이다. 따라서 김대중 대통령은 이제 어떤 형태로든 두 인사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몰려 있다.
김대통령은 두 인사의 거취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청와대와 당 고위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김대통령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결단을 내릴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초 “마녀사냥은 안 된다”며 이들의 퇴진 문제를 강하게 반대한 입장에서 후퇴해 두 인사의 사퇴를 문제 해결의 한 방법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 변화 기류는 11월2일 오후부터 감지됐다. 이날 오전 이상주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도자가 요청이 있다고 해 그때그때 (사람을)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며 두 인사의 처리 불가 입장을 시사했다. 그러나 오홍근 공보수석은 그 직후 “이실장의 언급은 사견일 뿐”이라며 이를 뒤집어버렸다. 이때쯤 ‘권 전 위원과 박수석의 거취가 사태의 핵심’이라는 당과 외곽의 보고서가 연이어 김대통령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친인척 그룹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한 관계자는 “마포사무실 폐쇄는 결정된 것으로 볼수 있다”며 “문제는 정계은퇴 선언과 해외출국 여부”라고 밝혔다. 박수석의 경우도 정책기획수석직을 사퇴하고 ‘특보’역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당 입장이 청와대로 전달됐다고 한다.
권 전 최고위원이나 박수석의 거취는 김대통령이 연말로 구상했던 당·정·청 개편이라는 큰 틀과 맞물려 정리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시기일 뿐 이미 김대통령은 두 인사의 처리를 결심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김대통령 주변과 동교동 인사들의 반대 목소리도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민주당 한 고위관계자는 “그들은 김대통령의 정치동지를 넘어 분신이자 그림자다”고 말한다. 그는 두 인사가 빠질 경우 당장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남북문제와 정권재창출 문제 등 정국 운영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레임덕 현상도 조기에 부상할 것이라는 것.
이런 차원에서 소장파의 전략상 미숙함을 거론하기도 한다. 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두 인사를 겨냥했다면 그 카드는 김대통령에게만 살짝 보여줘야 했다. 카드를 공개하고 결단을 요구하면 김대통령이 굴복하는 모양새로 비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김대통령이 한꺼번에 두 인사를 처리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경우 각기 분리 해결할 가능성도 있다. 일종의 타협안으로 권 전 위원에 대한 처리는 소장파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박수석의 경우 현직을 유지하는 방안이다. 이런 가운데 권 전 위원은 11월8일쯤 기자회견을 통해 거취 문제를 밝힐 예정이다. 권 전 위원은 지난 10월31일 소장파 인사들이 실명을 거론하자 “도대체 이 X들이 어디까지 나가려고 그래”라고 분노하며 극한 감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한 측근 의원에 따르면 권 전 위원은 지난 11월1일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과 동교동의 입장을 밝히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청와대측의 만류로 기자회견은 취소됐다. 기자회견을 취소한 다음날(2일) 그는 골프장을 찾아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지난해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 운동 당시에도 그는 골프장에서 뒤엉킨 심사를 달랬다. 권 전 위원의 분노와 관계없이 한편에서는 “대통령이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외국으로) 나가라면 나갈 것이다”(박양수 의원)는 제2의 ‘순명(順命)론’이 나온다.
박지원 수석도 권 전 의원만큼이나 운신이 어렵다. 소장파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은 후 한번도 언론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기자들이 찾아도 “할말이 없다”며 평소와 달리 침묵으로 일관하기 일쑤다. “기자들도 그러면 안 된다”고 역정 내기도 한다.
김대통령은 최고위원과 민주당 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의견을 들은 뒤 이들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DJ는 과연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DJ의 결단 여부에 따라 민주당 내분은 또 한번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