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를 오르내리는 한낮 폭염 속,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 사기막골 유원지를 향해 방향을 틀자 정문 기둥에 검은 페인트로 조촐하게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대성MPC. 대문이랄 것도 없는 입구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자 조용한 시골마을을 울리는 기계소리가 더위마저 잊게 만든다.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둘러봐도 이형집 사장(63)의 사무실 위치를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돌아보니 경비실도 없고 회사라면 당연히 있을 법한 ‘수위 아저씨’도 없다. 별수없이 방문객인 듯한 사람을 붙잡고 묻자, “저기 2층이 사무실이에요.”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지고 휑하니 사라진다.
“잃어버리는 물건도 없는데 경비원이 왜 필요합니까?” 사장실에서 만난 이사장이 대뜸 반문한다. 흔히 제품공장이라면 완제품이나 원자재가 그대로 돈이 되고, 수시로 현장직원이 바뀌는 3D업종일수록 퇴근하는 직원을 감시하는 경비원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마련이다. “여기 직원들은 20~30년씩 근속한 경우가 많습니다. 한 식구처럼 지내왔는데 서로 믿고 살아야지요.” 그래도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자 이사장은 단호하게 말한다. “만일 회사 물건에 손댄 사실이 밝혀지면 전후사정이야 어떻든 무조건 해고된다는 걸 사원들도 잘 압니다. 우리 회사는 서로 믿고 일합니다. 정직이 생명입니다.”
자본금 50만 원, 사장을 포함해 직원 5명. 1967년 가내수공업 수준으로 시작한 금속인쇄업체를 ‘연간 매출액 200억 원’ 규모로 끌어올려 국내 최고업체로 키워낸 이사장의 사업 출발점은 ‘정직’과 ‘신용’. 한결같은 신념으로 사업체를 꾸려온 이사장은 지난 34년 동안 단 한 번도 직원들 월급을 거른 적이 없다. 제 날짜를 어겨본 적도 없다. “초창기, 월급날은 다가오는데 회사에 일전 한푼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떻게든 사원들 봉급은 줘야겠다 싶어 월 이자가 6~7부 되는 고리사채를 끌어 썼습니다.” 월급을 지급한 다음날부터 다시 다음달치 월급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꾸러 다녔다는 이사장. 돈에 관한 한 지금까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그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마장동 시절 공장부지와 건물을 세 주었던 땅부자 주인이다. “그때 주인이 그랬지요. 지금까지 여러 번 세를 줘봤지만 이사장처럼 제 날짜에 월세를 꼬박꼬박 낸 사람은 없었다. 당신처럼 신용 있는 사람이라면 10년 후 틀림없이 나보다 더 부자가 될 거다, 이러는 겁니다.”
충남 청양군 오서산 자락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사장은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한학자로 엄하기만 한 아버지 품을 벗어나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산나물로 허기를 채운 오서산 촌놈의 설움도 공업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끝이다. 기술을 익혀 돈을 왕창 벌어야지’ 하고 결심한 이사장. 그러나 경기공업고등학교는 시험에 합격한 그를 ‘색맹’이란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별수없이 인문계 고등학교 야간반에 진학한 그는 새벽이면 신문·우유배달로 밥값을 벌고, 낮엔 을지로에 있는 한국 최초의 금속인쇄업체 대동금속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러나 이사장이 내민 이력서는 ‘1957년 서울 인창고 졸업’에 그치지 않는다. 28년이란 세월의 격차를 뛰어넘어 경영·산업·행정·언론대학원 등 분야를 불문한 ‘특수대학원 수료’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등 15년에 걸친 배움의 이력이 이어진다. “시골 중학교 동창 중 서울 일류대 출신이 몇 명 있는데 그들을 만날 때마다 빈정거리는 소리를 듣곤 했지요. ‘사업해서 돈 좀 벌었겠지만 너와는 대화상대가 안 된다’는 투였어요. 벌써 10년 전 일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군 제대 후 결혼한 이사장은 한겨울 단칸방을 데울 연탄 한 장이 아까워 아내와 함께 대동금속 공장 한쪽에 군용 야전침대를 놓고 기거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 재봉일로 푼돈을 벌던 아내는 아예 이사장이 다니는 공장에 취직해 종업원들 식사를 책임졌다. “말이 취직이지 월급은 없었습니다. 대신 아내와 저, 우리 두 사람 밥은 공짜였지요. 그 때문에 우리가 서울에서 비참하게 산다고 시골까지 소문나고, 친구들은 만나면 욕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신혼인 아내까지 팔아가며 지독하게 산다고.” 그럴 때마다 이사장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너희들이 20년 안에 집 살 때 나는 10년 안에 집 살 거고, 자동차까지 살 거다’고. 갓 결혼한 신부를 ‘밥짓는 공장 아줌마’로 전락시키며 모질게 산 덕분에 이사장은 결혼 3년 만에 ‘대성금속인쇄공업사’라는 자신의 사업체를 처음 갖게 되었다. 3년 뒤엔 국내에서 가장 비싼 자동차를 샀다.
아내와 함께 공장에서 뒹굴며 기름밥을 먹은 덕에 ‘성남공장, 아산공장, 아산 제2공장, 종업원 150여 명’인 지금의 회사를 일궈낸 이사장. 그는 누구보다 현장사원들의 고충과 설움을 잘 이해하고 헤아린다.
“우리 공장도 흔히 말하는 3D업종이라 현장사원들한테는 정말 미안합니다.” 그래서 지난해까지 사무실이든 사장실이든 에어컨을 들여놓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엔 아무리 앞뒤로 문을 열어놔도 기계 돌아가는 현장 기온이 40℃를 웃돕니다. 온몸을 땀으로 적시며 일하는 현장사원을 두고 사무실에 앉아 편안히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에어컨 바람을 쐬겠습니까.” 20여 년 전 커피 자판기가 처음 선보였을 때 그는 가장 먼저 공장 한편에 휴게실을 마련하고 자판기를 들여놨다. “사무실 직원은 출근하면 여직원이 타주는 커피 마시고 느긋하게 일 시작하는데, 정작 회사에 돈 벌어다 주는 현장사원들은 여직원이 타주는 커피는 고사하고 직접 타서 마실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맘껏 커피 마시고 일 시작하라고 자판기를 들여놨습니다.” 비록 깨끗한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사장실에 앉아 있는 이 사장이지만 검붉은 얼굴빛과 굳게 다문 입술, 투박하고 우직한 그의 인상은 ‘세계 5위권에 드는 기업체 사장’의 이미지보다는 현장사원에 더 가깝다.
지난해 1월 이사장은 전 사원이 모인 자리에서 “회사를 내 아들에게 승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사원들과 함께 가꿔온 회사인데 내가 손놓으면 그들에게 물려줘야죠.” 그의 아내와 3남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해외출장 갔다가 선물 사오면 식구들이 뭐라고 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고향을 발전시키는 일에 기부하거나 불우이웃 돕기에 써버린 돈은 수천, 수억 원이 되어도 아무 소리 안해요. 식구들한테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죽기 전 모든 재산을 회사 직원과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 전 대표 유일한 사장을 국내 기업인 중 가장 존경한다는 이사장. 수백 개에 달하는 감사패와 상패가 말해주듯 그가 지금까지 고향과 사회를 위해 봉사한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때문에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한테…”라며 쑥스러워하는 그의 공덕비가 그의 고향마을에 세워져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복 받을 일을 하면 반드시 복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경험으로 세상 사는 이치를 체득했다는 이사장은 이미 10년 전부터 회사 수익의 30%를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로 지급해 왔다. 그런 그가 다른 기업의 사장을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경영주가 얼마나 베푸는지에 따라 회사는 달라진다. 직원들에게 무엇을 바라기 전에 사장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부터 고민하라.”
직원들 모두 같이 벌어 같이 잘 살고, 나아가 사회가 잘 살기를 바라는 소박한 바람을 지닌 이사장. 그의 회사엔 아직 노동조합이 없다.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둘러봐도 이형집 사장(63)의 사무실 위치를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돌아보니 경비실도 없고 회사라면 당연히 있을 법한 ‘수위 아저씨’도 없다. 별수없이 방문객인 듯한 사람을 붙잡고 묻자, “저기 2층이 사무실이에요.”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지고 휑하니 사라진다.
“잃어버리는 물건도 없는데 경비원이 왜 필요합니까?” 사장실에서 만난 이사장이 대뜸 반문한다. 흔히 제품공장이라면 완제품이나 원자재가 그대로 돈이 되고, 수시로 현장직원이 바뀌는 3D업종일수록 퇴근하는 직원을 감시하는 경비원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마련이다. “여기 직원들은 20~30년씩 근속한 경우가 많습니다. 한 식구처럼 지내왔는데 서로 믿고 살아야지요.” 그래도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자 이사장은 단호하게 말한다. “만일 회사 물건에 손댄 사실이 밝혀지면 전후사정이야 어떻든 무조건 해고된다는 걸 사원들도 잘 압니다. 우리 회사는 서로 믿고 일합니다. 정직이 생명입니다.”
자본금 50만 원, 사장을 포함해 직원 5명. 1967년 가내수공업 수준으로 시작한 금속인쇄업체를 ‘연간 매출액 200억 원’ 규모로 끌어올려 국내 최고업체로 키워낸 이사장의 사업 출발점은 ‘정직’과 ‘신용’. 한결같은 신념으로 사업체를 꾸려온 이사장은 지난 34년 동안 단 한 번도 직원들 월급을 거른 적이 없다. 제 날짜를 어겨본 적도 없다. “초창기, 월급날은 다가오는데 회사에 일전 한푼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떻게든 사원들 봉급은 줘야겠다 싶어 월 이자가 6~7부 되는 고리사채를 끌어 썼습니다.” 월급을 지급한 다음날부터 다시 다음달치 월급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꾸러 다녔다는 이사장. 돈에 관한 한 지금까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그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마장동 시절 공장부지와 건물을 세 주었던 땅부자 주인이다. “그때 주인이 그랬지요. 지금까지 여러 번 세를 줘봤지만 이사장처럼 제 날짜에 월세를 꼬박꼬박 낸 사람은 없었다. 당신처럼 신용 있는 사람이라면 10년 후 틀림없이 나보다 더 부자가 될 거다, 이러는 겁니다.”
충남 청양군 오서산 자락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사장은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한학자로 엄하기만 한 아버지 품을 벗어나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산나물로 허기를 채운 오서산 촌놈의 설움도 공업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끝이다. 기술을 익혀 돈을 왕창 벌어야지’ 하고 결심한 이사장. 그러나 경기공업고등학교는 시험에 합격한 그를 ‘색맹’이란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별수없이 인문계 고등학교 야간반에 진학한 그는 새벽이면 신문·우유배달로 밥값을 벌고, 낮엔 을지로에 있는 한국 최초의 금속인쇄업체 대동금속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그러나 이사장이 내민 이력서는 ‘1957년 서울 인창고 졸업’에 그치지 않는다. 28년이란 세월의 격차를 뛰어넘어 경영·산업·행정·언론대학원 등 분야를 불문한 ‘특수대학원 수료’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등 15년에 걸친 배움의 이력이 이어진다. “시골 중학교 동창 중 서울 일류대 출신이 몇 명 있는데 그들을 만날 때마다 빈정거리는 소리를 듣곤 했지요. ‘사업해서 돈 좀 벌었겠지만 너와는 대화상대가 안 된다’는 투였어요. 벌써 10년 전 일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군 제대 후 결혼한 이사장은 한겨울 단칸방을 데울 연탄 한 장이 아까워 아내와 함께 대동금속 공장 한쪽에 군용 야전침대를 놓고 기거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 재봉일로 푼돈을 벌던 아내는 아예 이사장이 다니는 공장에 취직해 종업원들 식사를 책임졌다. “말이 취직이지 월급은 없었습니다. 대신 아내와 저, 우리 두 사람 밥은 공짜였지요. 그 때문에 우리가 서울에서 비참하게 산다고 시골까지 소문나고, 친구들은 만나면 욕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신혼인 아내까지 팔아가며 지독하게 산다고.” 그럴 때마다 이사장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너희들이 20년 안에 집 살 때 나는 10년 안에 집 살 거고, 자동차까지 살 거다’고. 갓 결혼한 신부를 ‘밥짓는 공장 아줌마’로 전락시키며 모질게 산 덕분에 이사장은 결혼 3년 만에 ‘대성금속인쇄공업사’라는 자신의 사업체를 처음 갖게 되었다. 3년 뒤엔 국내에서 가장 비싼 자동차를 샀다.
아내와 함께 공장에서 뒹굴며 기름밥을 먹은 덕에 ‘성남공장, 아산공장, 아산 제2공장, 종업원 150여 명’인 지금의 회사를 일궈낸 이사장. 그는 누구보다 현장사원들의 고충과 설움을 잘 이해하고 헤아린다.
“우리 공장도 흔히 말하는 3D업종이라 현장사원들한테는 정말 미안합니다.” 그래서 지난해까지 사무실이든 사장실이든 에어컨을 들여놓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엔 아무리 앞뒤로 문을 열어놔도 기계 돌아가는 현장 기온이 40℃를 웃돕니다. 온몸을 땀으로 적시며 일하는 현장사원을 두고 사무실에 앉아 편안히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에어컨 바람을 쐬겠습니까.” 20여 년 전 커피 자판기가 처음 선보였을 때 그는 가장 먼저 공장 한편에 휴게실을 마련하고 자판기를 들여놨다. “사무실 직원은 출근하면 여직원이 타주는 커피 마시고 느긋하게 일 시작하는데, 정작 회사에 돈 벌어다 주는 현장사원들은 여직원이 타주는 커피는 고사하고 직접 타서 마실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맘껏 커피 마시고 일 시작하라고 자판기를 들여놨습니다.” 비록 깨끗한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사장실에 앉아 있는 이 사장이지만 검붉은 얼굴빛과 굳게 다문 입술, 투박하고 우직한 그의 인상은 ‘세계 5위권에 드는 기업체 사장’의 이미지보다는 현장사원에 더 가깝다.
지난해 1월 이사장은 전 사원이 모인 자리에서 “회사를 내 아들에게 승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사원들과 함께 가꿔온 회사인데 내가 손놓으면 그들에게 물려줘야죠.” 그의 아내와 3남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해외출장 갔다가 선물 사오면 식구들이 뭐라고 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고향을 발전시키는 일에 기부하거나 불우이웃 돕기에 써버린 돈은 수천, 수억 원이 되어도 아무 소리 안해요. 식구들한테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죽기 전 모든 재산을 회사 직원과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 전 대표 유일한 사장을 국내 기업인 중 가장 존경한다는 이사장. 수백 개에 달하는 감사패와 상패가 말해주듯 그가 지금까지 고향과 사회를 위해 봉사한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때문에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한테…”라며 쑥스러워하는 그의 공덕비가 그의 고향마을에 세워져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복 받을 일을 하면 반드시 복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경험으로 세상 사는 이치를 체득했다는 이사장은 이미 10년 전부터 회사 수익의 30%를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로 지급해 왔다. 그런 그가 다른 기업의 사장을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경영주가 얼마나 베푸는지에 따라 회사는 달라진다. 직원들에게 무엇을 바라기 전에 사장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부터 고민하라.”
직원들 모두 같이 벌어 같이 잘 살고, 나아가 사회가 잘 살기를 바라는 소박한 바람을 지닌 이사장. 그의 회사엔 아직 노동조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