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 생명공학(BT), 전통산업을 연결해 우리 경제를 세계의 선두로 이끌어 가는 개혁에 대해 좀더 연구해 다음에 보고해 주기 바란다. 나노 기술(nano technology, NT)이 주목받는데 이것을 잘 활용해야 IT산업 등의 효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난해 12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6차 회의를 주재한 김대중 대통령이 ‘나노 기술’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대목이다.
미국도 지난해 1월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통해 BT, IT와 함께 NT를 차세대 경쟁력 확보를 위한 핵심기술로 선언하고, 2월에는 국가나노기술개발전략(NNI)을 수립 발표했다. 올해 미국의 나노 연구개발 예산은 4억2300만 달러. 일본 역시 연내에 NNI와 비슷한 종합계획을 마련할 계획으로 올 한 해 연구 개발비만 3억9600만 달러에 이른다.
이처럼 선진국이 나노 기술에 주목하는 이유는 NT야말로 21세기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할 원천기술이기 때문이다. 나노 기술을 활용하면 철강보다 10배 강하고 무게는 5분의 1에 지나지 않는 소재를 만들 수 있고, 표적지향적 약물전달방식으로 약물을 신체의 특정 부위에만 선택적으로 도달시키는 치료법도 가능하다. 단 몇 개의 암세포도 검출하는 초감도 생체센서, 각설탕 정도의 크기에 미 의회 도서관 전체 자료의 저장이 가능한 메모리, 현재보다 3배 이상 향상한 태양에너지 등 파급효과는 거의 무한대다.
만약 국내에서 몇몇 핵심기술만 산업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2010년경 NT를 활용한 IT분야 시장을 1조 달러(약 1300조 원)로 잡았을 때 해마다 3000억 달러(약 390조 원)의 수출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국가과학기술위원회 ‘나노종합발전계획’). 단순히 시장성뿐만 아니라 나노 기술은 모든 산업 및 제품에서 혁신적인 기술적 돌파구를 열어주고,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 줄 기반형 기술로 인류 문명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한다(산업자원부 ‘나노기술산업화전략’).
나노 기술이 아직 초기단계로, 현재 시점에서는 기술의 내용이나 발전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산업화 방향 또한 전망이 불투명하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현재 나노 기술 연구개발 능력을 선진국의 25%선으로 보지만 세계적으로도 아직 기초기술·원천기술 연구단계기 때문에 지금부터 박차를 가한다면 10년 후쯤 응용기술을 통한 본격적인 산업화가 가능하다는 낙관론이 지배적이다.
물론 한국이 탄탄한 재정지원과 연구인력을 확보한 선진국들과 단순 경쟁하는 것은 무리다. 미국은 NT분야에서 기초부터 응용까지 전방위투자를 벌이고 있고, 일본은 전자와 소재 등 비교우위분야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하며, EU는 에너지 환경, 생명공학 등 현재 기술의 연장선상에서 달성 가능한 목표 중심으로 현실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한국은 초기부터 산업화를 지향하여 물적·인적 자원을 전략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게 산업자원부(이하 산자부)의 ‘산업화 전략’이다.
어쨌든 대통령의 관심 표명 속에 나노 기술 육성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관계 부처의 행보가 빨라진 것은 물론이다. 민간 차원에서는 국제적인 전문가가 참여하는 학술회의와 심포지엄 등이 잇달아 열렸다. 바야흐로 한국에도 꿈의 나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국민적 관심 속에 만들어진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은 부처간 갈등과 과잉 중복투자의 위험성, 기술적 성과에 대한 성급한 낙관론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정부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면 지난 2월 산자부의 산업발전심의회에서 나노 기술 개발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기로 하고, 전국에 ‘나노기술산업화센터’를 설립해 연구인력 및 실험장비 등의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과학기술부(이하 과기부)는 2월 국정 업무보고 때 대통령 지시사항인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고, 초안이 나온 것은 5월21일. 여기서 처음으로 10년 동안 1조3725억 원을 투자하고 전문인력 1만3000명을 양성하며 나노 타운을 조성한다는 전략이 제시되었다. 이 안은 공청회와 의견 수렴과정을 거쳐 7월18일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심의, 확정했다(확정안은 1조4850억 원 1만2600명).
6월 중 산자부의 ‘나노기술산업화전략’이 윤곽을 드러냈고, 7월5일 ‘나노기술산업화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전략도 확정했다. 골자는 산업화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핵심기술인 차세대 반도체와 광소자 분야를 중심으로 2005년까지 산업화 기반을 구축하고, 2010년까지 기술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5월 과기부가 기초한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 1차안이 발표되었을 때, 산자부는 과기부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배제했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포항공대 정윤하 교수(전자전기공학, 나노기술산업화지원센터 소장)는 한 신문 인터뷰에서 “정부 부처들이 국가 장래가 걸린 나노 기술 발전계획을 독점하려는 이기주의적 행태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고 했는데 분명 과기부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실제로 이 안과 관련해 과기부와 산자부의 담당 국장이 심한 언쟁을 벌일 만큼 두 부처의 갈등이 노출된 상태였다.
사실 과기부와 산자부의 나노 육성안은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이 분야가 시작단계인 만큼 기반을 구축하고 인력을 양성하며, 기술을 개발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기술 개발에서 산업화를 우선시하는 산자부와 원천기술 확보에 주력해야 할 과기부가 기술개발 지원대상을 달리하자는 게 산자부의 주장이다. 지난 7월23일 국무총리 심의기구인 정책평가위원회도 상반기 정부 업무평가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IT, BT, NT 분야 등에서 중복투자를 막기 위해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과학기술 정책 및 연구개발 사업 조정 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한마디로 부처간 업무 협조와 조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적어도 10년 간은 과학기술분야의 노른자위 정책이 될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을 놓고 이처럼 부처간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인력 양성을 맡을 대학에서도 선점 경쟁이 치열하다. 막대한 연구지원비는 물론이고, 유능한 연구자들이 이 분야로 몰리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인력 감소로 위기를 맞은 기초과학분야에서 나노 기술은 돌파구인 셈. 오래 전부터 나노 관련 연구를 실시해 온 모 대학 물리학과에는 대학원생 120명 가운데 나노 전공자가 50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 절정이다.
이 와중에 대학마다 학과별 또는 단과대학간에 어디에 나노 관련 강좌를 개설하느냐를 놓고 경쟁이 치열하다. 서울대는 97년 국양 교수(물리학과)가 발족한 ‘나노기억매체연구단’이 주도하고 있고, 연세대의 경우 황정남 교수(물리학과)가 95년 개설한 ‘초미세표면과학연구센터’가 중심이 되는 등 이과대학이 앞장서는 형국이지만, 포항공대의 경우 올해 산자부 지원 아래 ‘산업화연구센터’를 만들면서 공대 중심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에서 인력양성은 핵심이다. 황정남 교수는 “정확히 나노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국내에 2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연구팀을 만들거나 후진양성 프로그램을 만들려 해도 인력 충원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발전계획의 인력양성 방안을 보면 외국의 핵심 전문가 유치, 학제간 강좌 개설(수학 물리 화학 생명 전자 재료 기계 등 나노 관련 기초학과가 공동 참여하는 강좌 개설), 나노학과 운영을 위한 학과 조정 및 신설 지원 등이 있다.
그러나 해외 인력 유치는 미국·일본 등 선진국과 경쟁해야 하는 어려운 싸움이다. 현재 나노 기술 전공자들은 박사후 과정만 들어가면 미국의 각 대학과 연구소에서 입도선매해 버리기 때문이다. 오는 9월 2학기부터 물리학과 대학원에 나노교육프로그램을 개설하는 연세대는 교수진을 구성하면서 미국에서 유학중인 나노 전문가 3명을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미국 대학에서 박사후 과정에 있는 연구자들과 1년 전부터 접촉해 구두승인을 받은 상태였으나, 미국 대학들도 적극적인 인력 확보에 나서면서 이들이 결국 컬럼비아·플로리다·코넬 대학 등에 자리를 잡아버린 것. 연구환경이나 연봉문제에서 미국과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게 대학측 답변이다.
심지어 미국이 국내 박사급 연구자에게까지 눈독을 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해외인력 유치가 아니라 국내인력 유출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래서 부족한 재원과 연구인력 문제를 극복하고 계획대로 핵심기술에서 10년 안에 세계 5위 안에 들기 위해 한국은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또 학과별로 나노 기술 개발에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나 나노 기술은 단일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과학기술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학제적 연구를 해야 한다. 심지어 국가 지원사업이 IT, BT, NT로 나누어 추진하는 것도 거시적 안목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예를 들어 DNA 소자 개발은 IT, BT, NT의 공동과제인데 자칫 분야마다 중복투자의 가능성이 있다. 교수들이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에 포함된 나노학과 신설에 난색을 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과기부와 교육인적자원부가 인력양성 모델로 삼은 연세대 프로그램의 강사진을 보면 물리학·재료공학·화학공학·의공학 교수들이 포진해 있고, 산학연계를 위해 삼성종합기술원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형태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정부나 대학 모두 학제간 연구의 당위성을 역설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칫 나눠먹기식 지원으로 끝나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다.
더욱이 나노 기술에 대한 정확한 개념정의조차 없이 우후죽순처럼 유사 나노 프로젝트가 늘고 있는 것에 대해 과잉열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과학칼럼니스트인 이인식씨는 “나노 기술은 단순히 물질을 처리하는 기술이 마이크로 수준에서 나노(1억 분의 1m) 수준으로 가는 게 아니다. 진정한 나노 기술은 물질의 자기조립력을 이용하여 분자 또는 원자 수준에서 물질을 다루는 기술을 말한다”며 나노 기술을 단순히 작고 간편해지는 미세기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연세대 황정남 교수도 한국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유행 따라 널뛰는 현상을 지적했다. 황교수가 ‘진공학회’지에 기고한 ‘나노 테크놀러지의 참된 발전방향’은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상온핵융합(Cold Fusion)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자 국내에서도 하루 아침에 Cold Fusion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나타나 국민을 현혹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판정되자 Cold Fusion이 Confusion(헷갈림)으로 바뀌었다. NT 관련분야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재현하는 조짐이 보인다. NT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입장에서 ‘나노는 나노’로 절대 ‘니나노’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최근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신일순 연구위원은 “IT 투자확대가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되지 않고, 효과도 최근 들어 전통산업보다 오히려 작다”는 내용의 IT 거품론을 펴 파장을 일으켰다. 벤처기업 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지만 대부분 벤처거품으로 끝나고 확대재생산에 실패했다는 주장이다. NT 분야 역시 시작단계에서부터 ‘제2의 IT’가 되지 않도록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한국을 먹여 살릴 신기술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 몇 년 후 국민을 허탈감에 빠뜨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6차 회의를 주재한 김대중 대통령이 ‘나노 기술’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대목이다.
미국도 지난해 1월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통해 BT, IT와 함께 NT를 차세대 경쟁력 확보를 위한 핵심기술로 선언하고, 2월에는 국가나노기술개발전략(NNI)을 수립 발표했다. 올해 미국의 나노 연구개발 예산은 4억2300만 달러. 일본 역시 연내에 NNI와 비슷한 종합계획을 마련할 계획으로 올 한 해 연구 개발비만 3억9600만 달러에 이른다.
이처럼 선진국이 나노 기술에 주목하는 이유는 NT야말로 21세기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할 원천기술이기 때문이다. 나노 기술을 활용하면 철강보다 10배 강하고 무게는 5분의 1에 지나지 않는 소재를 만들 수 있고, 표적지향적 약물전달방식으로 약물을 신체의 특정 부위에만 선택적으로 도달시키는 치료법도 가능하다. 단 몇 개의 암세포도 검출하는 초감도 생체센서, 각설탕 정도의 크기에 미 의회 도서관 전체 자료의 저장이 가능한 메모리, 현재보다 3배 이상 향상한 태양에너지 등 파급효과는 거의 무한대다.
만약 국내에서 몇몇 핵심기술만 산업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2010년경 NT를 활용한 IT분야 시장을 1조 달러(약 1300조 원)로 잡았을 때 해마다 3000억 달러(약 390조 원)의 수출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국가과학기술위원회 ‘나노종합발전계획’). 단순히 시장성뿐만 아니라 나노 기술은 모든 산업 및 제품에서 혁신적인 기술적 돌파구를 열어주고,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 줄 기반형 기술로 인류 문명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한다(산업자원부 ‘나노기술산업화전략’).
나노 기술이 아직 초기단계로, 현재 시점에서는 기술의 내용이나 발전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산업화 방향 또한 전망이 불투명하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현재 나노 기술 연구개발 능력을 선진국의 25%선으로 보지만 세계적으로도 아직 기초기술·원천기술 연구단계기 때문에 지금부터 박차를 가한다면 10년 후쯤 응용기술을 통한 본격적인 산업화가 가능하다는 낙관론이 지배적이다.
물론 한국이 탄탄한 재정지원과 연구인력을 확보한 선진국들과 단순 경쟁하는 것은 무리다. 미국은 NT분야에서 기초부터 응용까지 전방위투자를 벌이고 있고, 일본은 전자와 소재 등 비교우위분야에 대한 전략적 투자를 하며, EU는 에너지 환경, 생명공학 등 현재 기술의 연장선상에서 달성 가능한 목표 중심으로 현실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한국은 초기부터 산업화를 지향하여 물적·인적 자원을 전략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게 산업자원부(이하 산자부)의 ‘산업화 전략’이다.
어쨌든 대통령의 관심 표명 속에 나노 기술 육성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관계 부처의 행보가 빨라진 것은 물론이다. 민간 차원에서는 국제적인 전문가가 참여하는 학술회의와 심포지엄 등이 잇달아 열렸다. 바야흐로 한국에도 꿈의 나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국민적 관심 속에 만들어진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은 부처간 갈등과 과잉 중복투자의 위험성, 기술적 성과에 대한 성급한 낙관론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정부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면 지난 2월 산자부의 산업발전심의회에서 나노 기술 개발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기로 하고, 전국에 ‘나노기술산업화센터’를 설립해 연구인력 및 실험장비 등의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과학기술부(이하 과기부)는 2월 국정 업무보고 때 대통령 지시사항인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고, 초안이 나온 것은 5월21일. 여기서 처음으로 10년 동안 1조3725억 원을 투자하고 전문인력 1만3000명을 양성하며 나노 타운을 조성한다는 전략이 제시되었다. 이 안은 공청회와 의견 수렴과정을 거쳐 7월18일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심의, 확정했다(확정안은 1조4850억 원 1만2600명).
6월 중 산자부의 ‘나노기술산업화전략’이 윤곽을 드러냈고, 7월5일 ‘나노기술산업화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전략도 확정했다. 골자는 산업화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핵심기술인 차세대 반도체와 광소자 분야를 중심으로 2005년까지 산업화 기반을 구축하고, 2010년까지 기술경쟁력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5월 과기부가 기초한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 1차안이 발표되었을 때, 산자부는 과기부가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배제했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포항공대 정윤하 교수(전자전기공학, 나노기술산업화지원센터 소장)는 한 신문 인터뷰에서 “정부 부처들이 국가 장래가 걸린 나노 기술 발전계획을 독점하려는 이기주의적 행태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고 했는데 분명 과기부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실제로 이 안과 관련해 과기부와 산자부의 담당 국장이 심한 언쟁을 벌일 만큼 두 부처의 갈등이 노출된 상태였다.
사실 과기부와 산자부의 나노 육성안은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이 분야가 시작단계인 만큼 기반을 구축하고 인력을 양성하며, 기술을 개발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기술 개발에서 산업화를 우선시하는 산자부와 원천기술 확보에 주력해야 할 과기부가 기술개발 지원대상을 달리하자는 게 산자부의 주장이다. 지난 7월23일 국무총리 심의기구인 정책평가위원회도 상반기 정부 업무평가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IT, BT, NT 분야 등에서 중복투자를 막기 위해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과학기술 정책 및 연구개발 사업 조정 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한마디로 부처간 업무 협조와 조정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적어도 10년 간은 과학기술분야의 노른자위 정책이 될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을 놓고 이처럼 부처간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인력 양성을 맡을 대학에서도 선점 경쟁이 치열하다. 막대한 연구지원비는 물론이고, 유능한 연구자들이 이 분야로 몰리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인력 감소로 위기를 맞은 기초과학분야에서 나노 기술은 돌파구인 셈. 오래 전부터 나노 관련 연구를 실시해 온 모 대학 물리학과에는 대학원생 120명 가운데 나노 전공자가 50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 절정이다.
이 와중에 대학마다 학과별 또는 단과대학간에 어디에 나노 관련 강좌를 개설하느냐를 놓고 경쟁이 치열하다. 서울대는 97년 국양 교수(물리학과)가 발족한 ‘나노기억매체연구단’이 주도하고 있고, 연세대의 경우 황정남 교수(물리학과)가 95년 개설한 ‘초미세표면과학연구센터’가 중심이 되는 등 이과대학이 앞장서는 형국이지만, 포항공대의 경우 올해 산자부 지원 아래 ‘산업화연구센터’를 만들면서 공대 중심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에서 인력양성은 핵심이다. 황정남 교수는 “정확히 나노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국내에 2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연구팀을 만들거나 후진양성 프로그램을 만들려 해도 인력 충원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발전계획의 인력양성 방안을 보면 외국의 핵심 전문가 유치, 학제간 강좌 개설(수학 물리 화학 생명 전자 재료 기계 등 나노 관련 기초학과가 공동 참여하는 강좌 개설), 나노학과 운영을 위한 학과 조정 및 신설 지원 등이 있다.
그러나 해외 인력 유치는 미국·일본 등 선진국과 경쟁해야 하는 어려운 싸움이다. 현재 나노 기술 전공자들은 박사후 과정만 들어가면 미국의 각 대학과 연구소에서 입도선매해 버리기 때문이다. 오는 9월 2학기부터 물리학과 대학원에 나노교육프로그램을 개설하는 연세대는 교수진을 구성하면서 미국에서 유학중인 나노 전문가 3명을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미국 대학에서 박사후 과정에 있는 연구자들과 1년 전부터 접촉해 구두승인을 받은 상태였으나, 미국 대학들도 적극적인 인력 확보에 나서면서 이들이 결국 컬럼비아·플로리다·코넬 대학 등에 자리를 잡아버린 것. 연구환경이나 연봉문제에서 미국과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게 대학측 답변이다.
심지어 미국이 국내 박사급 연구자에게까지 눈독을 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해외인력 유치가 아니라 국내인력 유출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래서 부족한 재원과 연구인력 문제를 극복하고 계획대로 핵심기술에서 10년 안에 세계 5위 안에 들기 위해 한국은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또 학과별로 나노 기술 개발에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나 나노 기술은 단일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과학기술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학제적 연구를 해야 한다. 심지어 국가 지원사업이 IT, BT, NT로 나누어 추진하는 것도 거시적 안목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예를 들어 DNA 소자 개발은 IT, BT, NT의 공동과제인데 자칫 분야마다 중복투자의 가능성이 있다. 교수들이 ‘나노기술종합발전계획’에 포함된 나노학과 신설에 난색을 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과기부와 교육인적자원부가 인력양성 모델로 삼은 연세대 프로그램의 강사진을 보면 물리학·재료공학·화학공학·의공학 교수들이 포진해 있고, 산학연계를 위해 삼성종합기술원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형태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정부나 대학 모두 학제간 연구의 당위성을 역설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칫 나눠먹기식 지원으로 끝나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다.
더욱이 나노 기술에 대한 정확한 개념정의조차 없이 우후죽순처럼 유사 나노 프로젝트가 늘고 있는 것에 대해 과잉열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과학칼럼니스트인 이인식씨는 “나노 기술은 단순히 물질을 처리하는 기술이 마이크로 수준에서 나노(1억 분의 1m) 수준으로 가는 게 아니다. 진정한 나노 기술은 물질의 자기조립력을 이용하여 분자 또는 원자 수준에서 물질을 다루는 기술을 말한다”며 나노 기술을 단순히 작고 간편해지는 미세기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연세대 황정남 교수도 한국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유행 따라 널뛰는 현상을 지적했다. 황교수가 ‘진공학회’지에 기고한 ‘나노 테크놀러지의 참된 발전방향’은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상온핵융합(Cold Fusion)이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자 국내에서도 하루 아침에 Cold Fusion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나타나 국민을 현혹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판정되자 Cold Fusion이 Confusion(헷갈림)으로 바뀌었다. NT 관련분야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재현하는 조짐이 보인다. NT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입장에서 ‘나노는 나노’로 절대 ‘니나노’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최근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신일순 연구위원은 “IT 투자확대가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되지 않고, 효과도 최근 들어 전통산업보다 오히려 작다”는 내용의 IT 거품론을 펴 파장을 일으켰다. 벤처기업 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지만 대부분 벤처거품으로 끝나고 확대재생산에 실패했다는 주장이다. NT 분야 역시 시작단계에서부터 ‘제2의 IT’가 되지 않도록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한국을 먹여 살릴 신기술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 몇 년 후 국민을 허탈감에 빠뜨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