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바브웨(Zimbabwe)는 아직도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행정 처리가 들쭉날쭉 수시로 바뀌고, 1980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사회주의를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에게는 비자 발급이 까다롭고 어려워 여행하기 힘든 곳이다. 그러나 내가 갔을 때는 국경에서 비자를 준다고 해서 비자 발급 시간을 일주일이나 단축할 수 있었다.
일단 비자 발급을 해결하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차를 빌려 짐바브웨로 향했다. 사실 남아공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짐바브웨에 대해 그다지 기대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남아공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통치를 받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백인 사회였으며, GNP 3000달러에 가까운 남아공과 겨우 GNP 700달러의 짐바브웨는 분명 차이가 있을 법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짐바브웨에 대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행하게도 한 해 전부터 불거진 ‘토지 분쟁’에 대한 유혈사태 뉴스 탓이 클 것이다. 폭행당하는 백인과 성난 흑인 군중의 모습이 나오는 뉴스는 이 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외신란에서 흑백의 싸움으로 장식하던 일련의 사건들은, 전체 인구의 1%도 안 되는 백인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흑인은 소작농으로 일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토지개혁을 둘러싼 유혈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급기야 영국과 짐바브웨 정부가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농장은 백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며 “토지 몰수는 해방전쟁이다”고 주장하는 흑인과의 타협에 협상은 난항을 겪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워 우리의 토지와 자원을 몰수 및 찬탈하고, 우리를 소작농으로 만들려 했을 때 우리가 저항하던 것을 상기한다면, 그들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오히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계속 참고 지내다가 지금에서야 비로소 울분을 터뜨린 그들은 정말 바보처럼 순박한 것이 아니었을지.
짐바브웨에서 직접 목격한 장면으로는 영국 식민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백인들은 호화로운 영국식 가옥에 랜드로바 차를 몰며 말 그대로 지주 행세를 하고 살았고, ‘엉클 톰’을 연상시키는 흑인들은 그 넓은 들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일하는 웨이터들도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흑인과 확연히 달랐다. 프랑스 지배하의 흑인들은 손님에게 농을 걸고 장난을 치는 여유를 부렸지만, 짐바브웨서 만난 웨이터들은 깍듯이 ‘Sir’를 붙이며 경직되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식민융화정책을 쓴 프랑스와 달리 분리정책을 쓴 영국이 겪는 지금의 고통은 인과응보일 수 있다.
어쨌든 달리는 자동차에서 ‘가난한 나라 짐바브웨’에 대한 내 마음은 달라지고 있었다. 그곳의 사람이며 자연 풍경에 매료된 탓이었다. 달랑 2차선의 고르지 않은 도로 옆을 메운 끝없는 지평선과 광활한 대지, 하늘을 이고 선 듯한 오래된 바오밥 나무들, 한 시간에 한 번 가량이나 되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중고’라는 표현조차 어색할 만큼 낡은 자동차에 탄 그네들이 건네는 꾸밈없는 웃음이 나의 피로함을 덜어주었다.
짐바브웨는 국토의 약 4분의 1이 해발 1200~1500m의 넓은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풍광이 독특하다. 고대 건축물 가운데 특이한 것으로 수도 하라레에서 3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가 있다. 특이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거대한 돌의 도시인 이곳은 고대 건축기술의 `최고의 경지로 손꼽히는 문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이 성채의 이름이 오늘날 이 나라의 국명이 되기도 했다. ‘짐바브웨’는 토속어인 반투어로 ‘돌 주거지’를 뜻하는데, 짐바브웨와 모잠비크 두 나라에 걸쳐 흩어져 있는 많은 돌 유적지 가운데 이곳에 있는 유적의 규모가 가장 크다. 20세기 중반의 발굴조사 결과, 11~15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했던 쇼나(Shona)왕국이 남긴 것임이 밝혀졌다. 그들은 교역과 목축 등으로 강성한 제국을 형성했는데 무엇보다도 돌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 방어용 요새에는 많은 방과 미로 같은 통로들이 있다. 아래쪽 계곡에는 거대한 돌덩어리들로 쌓은 두꺼운 벽이 요새의 원추형 망루를 타원형으로 에워쌌고, 돌담의 안쪽과 바깥쪽에는 보다 규모가 작은 석조 건축물들의 주춧돌이 놓여 있다. 이런 모든 복합 건축물에 쓰인 돌들 사이사이에 모르타르를 바르지 않았는데도 지금까지 모두 제 위치에 그대로 있는 모습에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불라와요(Bulawayo)에도 고대 유적지가 남아 있다. 불라와요는 짐바브웨 토속민족인 은데벨레어족의 왕 로벵굴라가 본거지로 삼은 곳으로 당시 왕과 정적들 간의 대대적인 전투로 인해 도시가 피바다가 되면서 ‘학살의 장소’를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비견되는 곳은 이곳에서 45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마토포 국립 공원이 그것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구릉지대였던 마토포는 강의 침식으로 형성된 풍화작용으로 인해 환상적인 모양으로 변모했고 깊은 계곡이 생겨난 곳이다. 이 구릉 지대는 민속 및 전통과 결부되어 있으며, 몇 개의 언덕은 은데벨레족의 죽은 추장들의 정령이 머무는 곳으로 숭배된다.
마토포란 이름은 ‘바위’를 뜻하는 ‘마돔베’나 ‘마톰베’ 또는 ‘대머리’를 뜻하는 ‘마토보’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재정가이자 정치가이며 영국령 남아프리카 제국의 창설자인 세실 로스는 마토포 정상을 ‘세계의 풍경’(World’s View)이라 이름 붙였는데, 그의 말처럼 이곳에 서면 세계의 풍경을 한 눈에 보는 듯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지평선을 만날 수 있다. 로스는 “내가 이름 붙인 ‘세계의 풍경’에 묻히고 싶다. ‘여기 세실 존 로스 유해가 누워 있노라’고 적힌 놋쇠판으로 덮어주길 바란다”는 유언대로 죽은 뒤 이 정상에 묻혔다. 반투어족 추장들의 정령이 서린 이곳에 죽어서도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묻히는 것이 정복자의 생리인 듯싶어 씁쓸할 뿐이다.
일단 비자 발급을 해결하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차를 빌려 짐바브웨로 향했다. 사실 남아공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짐바브웨에 대해 그다지 기대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남아공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통치를 받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백인 사회였으며, GNP 3000달러에 가까운 남아공과 겨우 GNP 700달러의 짐바브웨는 분명 차이가 있을 법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짐바브웨에 대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행하게도 한 해 전부터 불거진 ‘토지 분쟁’에 대한 유혈사태 뉴스 탓이 클 것이다. 폭행당하는 백인과 성난 흑인 군중의 모습이 나오는 뉴스는 이 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외신란에서 흑백의 싸움으로 장식하던 일련의 사건들은, 전체 인구의 1%도 안 되는 백인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흑인은 소작농으로 일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었다.
토지개혁을 둘러싼 유혈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급기야 영국과 짐바브웨 정부가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농장은 백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며 “토지 몰수는 해방전쟁이다”고 주장하는 흑인과의 타협에 협상은 난항을 겪는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세워 우리의 토지와 자원을 몰수 및 찬탈하고, 우리를 소작농으로 만들려 했을 때 우리가 저항하던 것을 상기한다면, 그들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오히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계속 참고 지내다가 지금에서야 비로소 울분을 터뜨린 그들은 정말 바보처럼 순박한 것이 아니었을지.
짐바브웨에서 직접 목격한 장면으로는 영국 식민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백인들은 호화로운 영국식 가옥에 랜드로바 차를 몰며 말 그대로 지주 행세를 하고 살았고, ‘엉클 톰’을 연상시키는 흑인들은 그 넓은 들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있었다. 호텔에서 일하는 웨이터들도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흑인과 확연히 달랐다. 프랑스 지배하의 흑인들은 손님에게 농을 걸고 장난을 치는 여유를 부렸지만, 짐바브웨서 만난 웨이터들은 깍듯이 ‘Sir’를 붙이며 경직되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식민융화정책을 쓴 프랑스와 달리 분리정책을 쓴 영국이 겪는 지금의 고통은 인과응보일 수 있다.
어쨌든 달리는 자동차에서 ‘가난한 나라 짐바브웨’에 대한 내 마음은 달라지고 있었다. 그곳의 사람이며 자연 풍경에 매료된 탓이었다. 달랑 2차선의 고르지 않은 도로 옆을 메운 끝없는 지평선과 광활한 대지, 하늘을 이고 선 듯한 오래된 바오밥 나무들, 한 시간에 한 번 가량이나 되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중고’라는 표현조차 어색할 만큼 낡은 자동차에 탄 그네들이 건네는 꾸밈없는 웃음이 나의 피로함을 덜어주었다.
짐바브웨는 국토의 약 4분의 1이 해발 1200~1500m의 넓은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풍광이 독특하다. 고대 건축물 가운데 특이한 것으로 수도 하라레에서 3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가 있다. 특이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거대한 돌의 도시인 이곳은 고대 건축기술의 `최고의 경지로 손꼽히는 문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이 성채의 이름이 오늘날 이 나라의 국명이 되기도 했다. ‘짐바브웨’는 토속어인 반투어로 ‘돌 주거지’를 뜻하는데, 짐바브웨와 모잠비크 두 나라에 걸쳐 흩어져 있는 많은 돌 유적지 가운데 이곳에 있는 유적의 규모가 가장 크다. 20세기 중반의 발굴조사 결과, 11~15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했던 쇼나(Shona)왕국이 남긴 것임이 밝혀졌다. 그들은 교역과 목축 등으로 강성한 제국을 형성했는데 무엇보다도 돌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 방어용 요새에는 많은 방과 미로 같은 통로들이 있다. 아래쪽 계곡에는 거대한 돌덩어리들로 쌓은 두꺼운 벽이 요새의 원추형 망루를 타원형으로 에워쌌고, 돌담의 안쪽과 바깥쪽에는 보다 규모가 작은 석조 건축물들의 주춧돌이 놓여 있다. 이런 모든 복합 건축물에 쓰인 돌들 사이사이에 모르타르를 바르지 않았는데도 지금까지 모두 제 위치에 그대로 있는 모습에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불라와요(Bulawayo)에도 고대 유적지가 남아 있다. 불라와요는 짐바브웨 토속민족인 은데벨레어족의 왕 로벵굴라가 본거지로 삼은 곳으로 당시 왕과 정적들 간의 대대적인 전투로 인해 도시가 피바다가 되면서 ‘학살의 장소’를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와 비견되는 곳은 이곳에서 45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마토포 국립 공원이 그것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구릉지대였던 마토포는 강의 침식으로 형성된 풍화작용으로 인해 환상적인 모양으로 변모했고 깊은 계곡이 생겨난 곳이다. 이 구릉 지대는 민속 및 전통과 결부되어 있으며, 몇 개의 언덕은 은데벨레족의 죽은 추장들의 정령이 머무는 곳으로 숭배된다.
마토포란 이름은 ‘바위’를 뜻하는 ‘마돔베’나 ‘마톰베’ 또는 ‘대머리’를 뜻하는 ‘마토보’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재정가이자 정치가이며 영국령 남아프리카 제국의 창설자인 세실 로스는 마토포 정상을 ‘세계의 풍경’(World’s View)이라 이름 붙였는데, 그의 말처럼 이곳에 서면 세계의 풍경을 한 눈에 보는 듯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지평선을 만날 수 있다. 로스는 “내가 이름 붙인 ‘세계의 풍경’에 묻히고 싶다. ‘여기 세실 존 로스 유해가 누워 있노라’고 적힌 놋쇠판으로 덮어주길 바란다”는 유언대로 죽은 뒤 이 정상에 묻혔다. 반투어족 추장들의 정령이 서린 이곳에 죽어서도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묻히는 것이 정복자의 생리인 듯싶어 씁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