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30일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 제너럴모터스사에게서 대우자동차 인수 제안서를 제출받은 산업은행 등 대우차 채권단은 “6월4일부터 제3국에서 본 협상을 시작한다”고 발표, 그 배경을 둘러싸고 분분한 해석을 낳게 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일반인으로서는 국내에도 협상할 수 있는 장소가 많은데, 왜 굳이 해외에서 하겠다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만하다.
그 배경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관료에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 있어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협상단 관계자는 “‘윗분’들이 협상이 있을 때마다 그 결과에 대해 일일이 보고하라는 전화를 제3국에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 제3국행을 택했다”면서 “협상단 일각에서는 ‘협상은 홍콩에서 한다고 발표만 해놓고 전혀 다른 곳에서 하자’는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라고 실토했다.
이들의 이런 결정은 지난해 포드와의 협상 과정에서 얻은 교훈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협상단은 포드측과의 협의 결과에 대해 일일이 보고하라는 ‘윗분’들 때문에 정작 협상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포드의 인수 제안가격인 70억 달러까지 공개, 포드측이 항의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는 것.
또 다른 사례 하나. 지난해 9월 초 모 언론사 부장은 ‘황당한’ 경험을 했다. 한달 전 취임한 모 부처 장관이 언론사 부장단에게 상견례를 위해 오찬을 마련했으니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보냈는데, 그 초청장이 가관이었던 것. 초청 대상자인 자신의 이름도 틀리게 표기했을 뿐 아니라 더 한심한 것은 장관이 바뀐 지 20여 일 이상 지났는데도 초청자 명의는 여전히 전직 장관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료들의 이런 한심한 행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출범 전부터 정부개혁위원회를 만들어 정부개혁을 추진해 왔음에도 공직사회는 변하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관료생활 25년째인 중앙부처 J모 국장은 “솔직히 과거 정부와 비교해 정부 생산성이 현저하게 나아졌다고는 보기 힘든 것 아니냐”면서 “이는 관료의 행태를 바꾸려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행정자치부 모 국장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그는 “21세기형 패러다임에 맞는 국정 운영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전제, “그동안 정부는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조직 개편 등으로 여기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산성은 여전히 낮을 수밖에 없다”며 ‘조직’보다는 ‘관료’가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 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해마다 세계 주요 국가의 경쟁력 실태를 조사해 온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연구원)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IMD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국가경쟁력 순위는 지난 98년 35위에서 올해 28위로 7단계 뛰어올라 외환위기 전인 96년 수준(27위)을 거의 회복했지만 정부 부문의 경쟁력은 같은 기간 34위에서 31위로, 고작 3단계 올라서는 데 그쳤다. 정부부문 경쟁력의 경우 순위는 올라섰지만 98년과 달리 종합 순위를 끌어내리는 원인이 되었다. 정부부문의 경쟁력이 다른 부문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관료들의 구태 가운데 가장 폐해가 심한 것은 무엇일까. 관료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것은 정치권 실세 ‘줄대기’다. 지난 3월26일 개각 직후 이뤄진 후속 인사에서도 이런 행태는 되풀이되었다. 당시 개각으로 입각한 모 부처 장관은 산하기관장 인사에서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없었다. 민주당 핵심 당직자가 전화를 걸어 “쭛쭛청장(차관급) 자리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정중히’ 요구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이 부처 고위 관계자 A씨의 고백.
“이 당직자는 쭛쭛청장에 자기 사람을 앉히기 위해 이미 정치권을 상대로 정지작업을 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공동여당 핵심 실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쭛쭛청장 자리에 관심을 가졌다. 이를 안 당직자는 실세를 찾아가 충분히 양해를 구한 다음 장관에게 전화했고, 장관은 이 당직자의 뜻에 따라 쭛쭛청장 인사를 한 것으로 안다.” A씨는 “이런 사정을 아는 관료라면 거의 대부분 다음 인사 때를 대비해 미리 정치권 실세에 줄을 대려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A씨는 이어 “그나마 외부 전문가가 그런 자리에 영입되는 것은 참을 만하지만 정치권 실세를 등에 업고 ‘내려온’ 사람들은 대부분 업무능력이나 전문성에서 뒤떨어지기 때문에 공직사회의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덧붙였다.
현 정부 들어 나타난 관료들의 또 다른 특이한 행태는 야당을 지나치게 의식해 은밀히 야당에도 선을 대는 ‘양다리 걸치기’를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민주당 관계자가 이런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성토하는 분위기다. 민주당 관계자는 관료의 이런 행태에 대해 “현 정권이 소수파로 출발한데다 최근 들어 내년 대선에서 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민주당 한 당직자는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융 기업 구조조정을 담당,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관료 사이에서는 ‘하던 일은 덮고’ ‘할 일은 미루고’ ‘남의 일은 말리고’라는 ‘3고’가 유행했다”면서 “재경부 등에서 구조조정 파트에 속한 일부 공무원이 사명감을 갖기는커녕 외환위기 청문회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정권이 바뀐 뒤 책임을 추궁당할 것을 우려하여 한직으로 빠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러나 관료들은 이런 지적에 대해 ‘관료 길들이기’ 차원의 정치 공세라고 항변한다. 교육인적자원부의 한 서기관은 “극히 일부 고위 공무원들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정권의 향방에 상관없이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있다”면서 “최근 정부가 한나라당의 국가혁신위원회에 참여한 관료들을 색출하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결과가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관료들의 이런 항변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외부 시각은 여전히 싸늘하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 장하성 교수는 “김대중 정부가 경제개혁과 관련, 해외 투자가의 신뢰를 잃어가는 것은 여전히 기존 경제관료가 개혁을 추진하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속성상 책임질 일을 하지 않는 관료에게 개혁을 맡겨놓다 보니 IMF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었던 집권 초기와 달리 우리 스스로 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천해야 했던 지난해 봄 이후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경제 개혁이 지체되었다”는 것.
관료들은 책임질 일에는 나서지 않는 반면 ‘밥그릇 싸움’은 치열하다는 지적도 받는다.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과 남궁석 의원은 지난해부터 뚜렷한 수익 모델이 없어 고통을 겪는 벤처기업 육성을 위해 ‘디지털 콘텐츠 육성법’ 제정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노력은 정보통신부와 문화관광부의 ‘밥그릇 싸움’ 때문에 벽에 부딪쳤다. 저작권 관할 부서인 문화부와 정보화촉진기금을 관리하는 정통부가 디지털 콘텐츠의 관할권을 놓고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 재정경제부 모 국장은 이와 관련, “정치권이나 언론 등에서 관료들이 책임지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느냐”고 항변했다. 그는 “현 정부 출범 초기 정치권이나 언론 할 것 없이 외환위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마녀사냥’을 계속, 결국 개혁적인 경제관료의 ‘대부’ 역할을 한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을 사법처리하도록 했다”면서 “그 후 자신이 맡은 동안에만 문제가 안 생기면 그만이라는 무사안일주의가 더 팽배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산업자원부 모 국장도 “관료란 우리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나라 관료의 현 수준은 바로 우리 사회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시각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 등 각 분야의 개혁 없이 관료만 일방적으로 매도하다 보니 많은 우수한 관료가 다른 분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 산업자원부 고위관료 Q씨는 이와 관련, 최근 몇 년 사이 민간부문으로 진출한 공직자들을 △자신이 갖고 있는 자격증을 바탕으로 해당 분야로 진출하는 사람 △벤처산업으로 진출하는 사람 △전통산업으로 진출하는 사람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상황에서 가장 부러운 부류는 첫째 유형이고, 둘째 유형이 가장 고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같아서는 자격증 하나 따놓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대부분의 공직자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료들은 자신들이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소신있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게 공정한 인사라고 지적한다. 경제부처 모 국장은 “현재처럼 국·과장급의 평균 재임기간이 1~2년 정도인 상황에서는 관료들의 대 국민 서비스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전문성 함양은 생각도 할 수 없다”면서 “지금부터라도 관료들을 직군별로 나누어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현재의 공무원 임용령상 보직관리 기준에 따르면 학력과 전공·경력·능력에 따라 인사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런 규정이 있는지 알고 있는 장관이 몇 명이나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장관이 인사에서 ‘전횡’을 하다시피 한다”면서 “현 정부가 ‘지역편중 인사’ 시비에 시달리는 것도 장관이 이런 규정을 무시하고 자신의 친소관계에 따라 인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앙인사위원회가 나름대로 각 부처 인사를 심사하긴 하지만 제도적인 맹점 때문에 장관의 인사 전횡을 막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한다. 중앙 부처 모 국장은 “같은 직위에서 4급 서기관이나 3급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면 중앙인사위 심사를 거치지만 같은 3급 과장에서 3급 국장으로 승진할 때는 중앙인사위가 개입하지 않는다”면서 “이런 허점도 장관의 인사 전횡을 조장한다”고 설명했다.
관료들은 직군별 분류에 따른 인사가 단기적으로 어렵다면 적어도 국장급 이상은 중앙정부 간 또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벽’을 터서 풀(pool)제로 운영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총리실 고위 관계자는 “사실 일부 부처의 관료들은 다른 부처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 반면 어떤 부처에서는 자리가 없어 우수한 인재들이 떠돌고 있다”면서 “부처 간 벽을 허물어 우수한 인재가 각 부처에 고루 배치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긴 했지만 장관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바로 그런 관료사회를 두고 나온 말일 것이다.
그 배경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관료에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 있어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협상단 관계자는 “‘윗분’들이 협상이 있을 때마다 그 결과에 대해 일일이 보고하라는 전화를 제3국에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 제3국행을 택했다”면서 “협상단 일각에서는 ‘협상은 홍콩에서 한다고 발표만 해놓고 전혀 다른 곳에서 하자’는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라고 실토했다.
이들의 이런 결정은 지난해 포드와의 협상 과정에서 얻은 교훈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협상단은 포드측과의 협의 결과에 대해 일일이 보고하라는 ‘윗분’들 때문에 정작 협상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포드의 인수 제안가격인 70억 달러까지 공개, 포드측이 항의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는 것.
또 다른 사례 하나. 지난해 9월 초 모 언론사 부장은 ‘황당한’ 경험을 했다. 한달 전 취임한 모 부처 장관이 언론사 부장단에게 상견례를 위해 오찬을 마련했으니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보냈는데, 그 초청장이 가관이었던 것. 초청 대상자인 자신의 이름도 틀리게 표기했을 뿐 아니라 더 한심한 것은 장관이 바뀐 지 20여 일 이상 지났는데도 초청자 명의는 여전히 전직 장관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료들의 이런 한심한 행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출범 전부터 정부개혁위원회를 만들어 정부개혁을 추진해 왔음에도 공직사회는 변하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관료생활 25년째인 중앙부처 J모 국장은 “솔직히 과거 정부와 비교해 정부 생산성이 현저하게 나아졌다고는 보기 힘든 것 아니냐”면서 “이는 관료의 행태를 바꾸려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행정자치부 모 국장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그는 “21세기형 패러다임에 맞는 국정 운영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전제, “그동안 정부는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조직 개편 등으로 여기에 부응하려는 노력을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산성은 여전히 낮을 수밖에 없다”며 ‘조직’보다는 ‘관료’가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 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해마다 세계 주요 국가의 경쟁력 실태를 조사해 온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연구원)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IMD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국가경쟁력 순위는 지난 98년 35위에서 올해 28위로 7단계 뛰어올라 외환위기 전인 96년 수준(27위)을 거의 회복했지만 정부 부문의 경쟁력은 같은 기간 34위에서 31위로, 고작 3단계 올라서는 데 그쳤다. 정부부문 경쟁력의 경우 순위는 올라섰지만 98년과 달리 종합 순위를 끌어내리는 원인이 되었다. 정부부문의 경쟁력이 다른 부문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관료들의 구태 가운데 가장 폐해가 심한 것은 무엇일까. 관료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것은 정치권 실세 ‘줄대기’다. 지난 3월26일 개각 직후 이뤄진 후속 인사에서도 이런 행태는 되풀이되었다. 당시 개각으로 입각한 모 부처 장관은 산하기관장 인사에서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없었다. 민주당 핵심 당직자가 전화를 걸어 “쭛쭛청장(차관급) 자리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정중히’ 요구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이 부처 고위 관계자 A씨의 고백.
“이 당직자는 쭛쭛청장에 자기 사람을 앉히기 위해 이미 정치권을 상대로 정지작업을 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공동여당 핵심 실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쭛쭛청장 자리에 관심을 가졌다. 이를 안 당직자는 실세를 찾아가 충분히 양해를 구한 다음 장관에게 전화했고, 장관은 이 당직자의 뜻에 따라 쭛쭛청장 인사를 한 것으로 안다.” A씨는 “이런 사정을 아는 관료라면 거의 대부분 다음 인사 때를 대비해 미리 정치권 실세에 줄을 대려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A씨는 이어 “그나마 외부 전문가가 그런 자리에 영입되는 것은 참을 만하지만 정치권 실세를 등에 업고 ‘내려온’ 사람들은 대부분 업무능력이나 전문성에서 뒤떨어지기 때문에 공직사회의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덧붙였다.
현 정부 들어 나타난 관료들의 또 다른 특이한 행태는 야당을 지나치게 의식해 은밀히 야당에도 선을 대는 ‘양다리 걸치기’를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민주당 관계자가 이런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성토하는 분위기다. 민주당 관계자는 관료의 이런 행태에 대해 “현 정권이 소수파로 출발한데다 최근 들어 내년 대선에서 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민주당 한 당직자는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융 기업 구조조정을 담당,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관료 사이에서는 ‘하던 일은 덮고’ ‘할 일은 미루고’ ‘남의 일은 말리고’라는 ‘3고’가 유행했다”면서 “재경부 등에서 구조조정 파트에 속한 일부 공무원이 사명감을 갖기는커녕 외환위기 청문회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정권이 바뀐 뒤 책임을 추궁당할 것을 우려하여 한직으로 빠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그러나 관료들은 이런 지적에 대해 ‘관료 길들이기’ 차원의 정치 공세라고 항변한다. 교육인적자원부의 한 서기관은 “극히 일부 고위 공무원들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정권의 향방에 상관없이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있다”면서 “최근 정부가 한나라당의 국가혁신위원회에 참여한 관료들을 색출하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결과가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관료들의 이런 항변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외부 시각은 여전히 싸늘하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 장하성 교수는 “김대중 정부가 경제개혁과 관련, 해외 투자가의 신뢰를 잃어가는 것은 여전히 기존 경제관료가 개혁을 추진하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속성상 책임질 일을 하지 않는 관료에게 개혁을 맡겨놓다 보니 IMF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었던 집권 초기와 달리 우리 스스로 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천해야 했던 지난해 봄 이후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경제 개혁이 지체되었다”는 것.
관료들은 책임질 일에는 나서지 않는 반면 ‘밥그릇 싸움’은 치열하다는 지적도 받는다.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과 남궁석 의원은 지난해부터 뚜렷한 수익 모델이 없어 고통을 겪는 벤처기업 육성을 위해 ‘디지털 콘텐츠 육성법’ 제정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노력은 정보통신부와 문화관광부의 ‘밥그릇 싸움’ 때문에 벽에 부딪쳤다. 저작권 관할 부서인 문화부와 정보화촉진기금을 관리하는 정통부가 디지털 콘텐츠의 관할권을 놓고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 재정경제부 모 국장은 이와 관련, “정치권이나 언론 등에서 관료들이 책임지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느냐”고 항변했다. 그는 “현 정부 출범 초기 정치권이나 언론 할 것 없이 외환위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마녀사냥’을 계속, 결국 개혁적인 경제관료의 ‘대부’ 역할을 한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을 사법처리하도록 했다”면서 “그 후 자신이 맡은 동안에만 문제가 안 생기면 그만이라는 무사안일주의가 더 팽배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산업자원부 모 국장도 “관료란 우리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나라 관료의 현 수준은 바로 우리 사회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시각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 등 각 분야의 개혁 없이 관료만 일방적으로 매도하다 보니 많은 우수한 관료가 다른 분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 산업자원부 고위관료 Q씨는 이와 관련, 최근 몇 년 사이 민간부문으로 진출한 공직자들을 △자신이 갖고 있는 자격증을 바탕으로 해당 분야로 진출하는 사람 △벤처산업으로 진출하는 사람 △전통산업으로 진출하는 사람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상황에서 가장 부러운 부류는 첫째 유형이고, 둘째 유형이 가장 고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같아서는 자격증 하나 따놓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대부분의 공직자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관료들은 자신들이 수준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소신있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게 공정한 인사라고 지적한다. 경제부처 모 국장은 “현재처럼 국·과장급의 평균 재임기간이 1~2년 정도인 상황에서는 관료들의 대 국민 서비스 수준을 높이기 위한 전문성 함양은 생각도 할 수 없다”면서 “지금부터라도 관료들을 직군별로 나누어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현재의 공무원 임용령상 보직관리 기준에 따르면 학력과 전공·경력·능력에 따라 인사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런 규정이 있는지 알고 있는 장관이 몇 명이나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장관이 인사에서 ‘전횡’을 하다시피 한다”면서 “현 정부가 ‘지역편중 인사’ 시비에 시달리는 것도 장관이 이런 규정을 무시하고 자신의 친소관계에 따라 인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앙인사위원회가 나름대로 각 부처 인사를 심사하긴 하지만 제도적인 맹점 때문에 장관의 인사 전횡을 막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한다. 중앙 부처 모 국장은 “같은 직위에서 4급 서기관이나 3급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면 중앙인사위 심사를 거치지만 같은 3급 과장에서 3급 국장으로 승진할 때는 중앙인사위가 개입하지 않는다”면서 “이런 허점도 장관의 인사 전횡을 조장한다”고 설명했다.
관료들은 직군별 분류에 따른 인사가 단기적으로 어렵다면 적어도 국장급 이상은 중앙정부 간 또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벽’을 터서 풀(pool)제로 운영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한다. 총리실 고위 관계자는 “사실 일부 부처의 관료들은 다른 부처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 반면 어떤 부처에서는 자리가 없어 우수한 인재들이 떠돌고 있다”면서 “부처 간 벽을 허물어 우수한 인재가 각 부처에 고루 배치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긴 했지만 장관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바로 그런 관료사회를 두고 나온 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