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4

..

JP의 ‘반짝 장세’에 추파 던지는가

  • < 서병훈 숭실대 교수 · 정치학 >

    입력2005-02-16 13:4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JP의 ‘반짝 장세’에 추파 던지는가
    웃는 얼굴에 침 뱉기란 정말 못할 일이다. 웬만하면 웃는 얼굴은 보기도 좋다. 텔레비전이든, 아니면 지나가는 길거리에서든 간에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웃는 모습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다. 웃음이야말로 신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런 상식이 자주 깨지고 있다. 짜증나고, 역겹고, 그래서 울화가 치밀기까지 하는 웃음이 우리 정치판을 휘젓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고 TV고, 도대체 그런 웃음을 확대해서 매일같이 보여주는 정신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과연 봄이랍시고 제 세상 만난 듯하는 김종필씨의 웃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김종필씨가 이 시대,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부각되어서는 안 될 이유를 재론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자. 그를 비판하는 것도 이젠 지쳤고, 나아가 자존심이 상하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래도 한마디, 그가 틈만 나면 되뇌는 보수의 본질에 대해서만은 차제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근대 보수주의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사람이 ‘여름날의 파리’와는 다르다며, 한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의 연결을 중요시했다. 그러면서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무모함, 그 정신적인 미성숙을 질타했다. 그러나 버크가 모든 변화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발전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보수와 개혁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고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버크가 보수주의자들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 엄격한 자기규율과 희생정신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누가 보수를 운운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자중자애하며 스스로에 대해 엄격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와 나라의 장래에 대해 걱정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이익을 자기 것보다 우선시하며, 다수의 즐거움과 안락을 위해 만족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참된 보수주의자라는 것이다.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버크의 경구(警句)나 자기성찰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여름날의 파리’ 정도의 곁가지에만 귀가 열려 있을 뿐,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걸어야 할 덕목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이비 보수주의자들을 겨냥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이율배반적인 일탈행위를 서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김종필씨의 웃음이야 근시안적인 자기도취라 치자. 그와 같은 정치 행태를 변혁하겠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와 영합하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심한다면 도대체 그들의 존재이유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민주당의 김근태 최고위원이 보여준 일련의 행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진보세력마저 제 목소리 못내고 장식용으로 전락

    개혁과 진보를 내세우는 이들이 김대중 체제 안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장식용으로 전락하고 만 그간의 과정에 대해 새삼 비판할 생각은 없다. 현실정치 기반이 약한 그들의 사정을 나 몰라라 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진보와 개혁을 내걸고 정치를 하겠다면 최소한의 자기규율과 금도(襟度)만은 지켜야 한다.

    김종필씨는 이미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 그의 꺼져가던 정치 생명에 김대중 대통령이 다시 불을 지펴주고 있다. 이 기묘한 동거, 이 반민주적인 야합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불과 얼마 전까지 그 비윤리성과 그 반역사성에 대해 성토를 불사했던 이들이 누구인가. 그런 처지에 이제 봄이 왔다고, 그래서 김종필씨의 ‘반짝 장세(場勢)’가 탐이 난다고 그와 밥 먹고 함께 사진 찍으며 더불어 웃음을 지을 마음이 생긴단 말인가. 그의 눈도장 덕분에 장관자리 하나 차지하고, 그렇게 해서 보수주의자들의 표를 꿔오면 대권이 눈앞에 다가온단 말인가. 부질없는 ‘한여름밤의 꿈’일 뿐이다.

    아무리 이데올로기 시대가 갔다 하더라도 아직은 지켜야 할 것이 남아 있다. 진보와 개혁을 상업화하고 희화화(戱畵化)하는 술수는 결코 용납될 수가 없다. 사심(私心)을 버리라고 역설하는 ‘왕 보수’ 버크 보기가 부끄럽지 않은가. 웃지나 말든지….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