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 한-소 수교 과정에서 너도나도 붉은광장으로 달려가 기념사진 한 장 찍고, 똘스또이 소설 몇 편 읽고 나서 마치 러시아 전체를 이해한 것처럼 자만했다. 그리고 겹겹이 들어 있는 마뜨료쉬까 인형을 다 열어 보지도 않은 채 뚜껑을 닫아버린 것은 아닐까.
박종수씨는 한-러관계를 우리의 시각과 언어로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인 한-러관계는 1884년 조러통상조약체결로 시작된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러관계는 단절됐고, 1990년 한-소 수교로 85년 만에 재개됐다. 한-러관계의 100년 가까운 공백을 채워준 것은 미국과 일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러시아는 일본의 식민논리와 미국의 냉전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러시아일 뿐이다. 우리는 이를 여과 없이 수용하면서, 미-러관계 혹은 일-러관계를 한-러관계인 것으로 착각해 왔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유럽 대륙 세력이 해양으로 진출하려 할 때마다 앞다퉈 차지하려 한 나라가 바로 한반도와 러시아였다는 사실이나, 서구열강의 이권 침탈에 저항하고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혁명(동학과 10월혁명)을 도모한 점에서 두 나라는 흡사한 발전과정을 거쳤다.
이렇듯 동질성을 찾는 데서 출발하면 러시아는 한결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온다. 저자는 냉전체제를 통해 러시아가 우리에게 북한의 남침야욕을 사주한 ‘붉은 악마’로 각인됐지만, 거기서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세계 최초로 국립대학에 한국어과를 설립하고(1897년 당시 쌍뻬쩨르부르그 제국대학), 구한말 대한제국이 최초로 해외 공사관을 설치한 나라(쌍뻬쩨르부르그)도 러시아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이 책의 4부는 ‘냉전논리에 묻혀버린 한-러 이면사’를 밝히는 데 할애됐다.
1914년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해외 독립운동의 무대였던 연해주의 재발견과, 1917년 반봉건-반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볼셰비키 혁명이 우리 민족지도자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점도 상기시킨다.
러시아에 대한 왜곡된 정보와 편견을 깨뜨리겠다는 사명감으로 쓴 책이다 보니 곳곳에 감상이 흘러 넘친 부분도 눈에 띄지만, 우리에게 러시아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계기를 마련해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특히 러시아 정치문화를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적 가치 체계와는 다른 소위 ‘황제주의’라고 불리는 러시아식 민주주의로 해석한 점이나, 위대한 러시아 재건에 목표를 둔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의 정책 기조를 반미 또는 반패권주의로 설명하고 푸틴의 대 한반도 정책을 분석한 점 등은 푸틴 대통령 방한에 맞춰 시의적절한 지적이었다. 적어도 과거 냉전적 사고방식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성급하게 러시아와의 관계 조정에만 매달려온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책이다.
러시아와 한국, 잃어버린 백년의 기억을 찾아서/ 박종수 지음/ 백의 펴냄/ 288쪽/ 9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