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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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뛰는 ‘生保업계 기린아’

의사 가운 벗고 경영인으로 화려한 변신… 합리적 리더십 발휘 ‘홀로서기’ 한창

  • 입력2005-03-21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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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을 뛰는 ‘生保업계 기린아’
    ‘흙 묻은 무를 원한다면 문을 열고 직접 밭으로 나가야 한다.’ 갑자기 웬 무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92년 일본전기통신공사(NTT)에서 분리된 NTT도코모를 오늘날 세계적인 이동통신 회사로 키운 오보시 코지 NTT도코모 회장의 말이라면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음미하게 될 것이다. 현장 정보가 기업의 피라미드 조직을 거치는 동안 경영층에 제대로 보고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영자는 무엇보다 현장을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코지 회장은 ‘위’에서 아무리 흙 묻은 무를 원해도 밭에서 캐낸 무가 사장 앞에 도착할 때쯤이면 흙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먹기 좋게 썰어지고 보기 좋게 담아지기까지 한다는 것. 코지 회장은 그런 의미에서 사장실에 도착한 데이터가 생생한 현장 정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장은 죽을 때까지 무의 참 맛을 알 수 없다고 강조한다.

    교보생명 신창재 회장(48)이 원하는 것도 바로 ‘흙 묻은 무’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해 5월 회장 취임 이후 직접 밭으로 가서 현장을 살펴보고 자기 손으로 무를 뽑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6500여명의 직원들을 직급별, 근무지역별로 그룹화해 직접 만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 것. 이동전화 사용자들의 불평을 분석하고 현장 판매사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던 코지 회장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한 부장급 직원의 신회장 관찰기다.

    현장을 뛰는 ‘生保업계 기린아’
    “직원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연수원에서 저녁 식사 후 캔맥주를 앞에 놓고 대화를 시작하면 새벽 1시까지 계속하는 게 보통이다. 이런 모임을 한 번만 한 것도 아니고, 모든 직원들과 한 번씩 대면할 수 있도록 했다. 어디서 저런 집념이 나올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모임에는 으레 술이 끼게 마련이다. 더구나 오너 경영자라면 분위기를 압도하기 위해서 소위 ‘폭탄주’를 한 잔씩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신회장은 술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게 직원들의 얘기다. 회사 경영상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정도라는 것. 그의 말을 빌리면 “서울대 의대 교수 시절 동료들과 함께 술자리에 가도 조는 경우가 많아 분위기 깨는 사람으로 눈총받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는 회장 취임 이후 모든 직원들이 자신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현장의 생생한 얘기를 그대로 듣기 위해 무기명을 보장했다. “관리직 사원들이 아직도 커피 심부름을 시킨다” “퇴근 시간이 넘었는데도 쓸데없이 밤늦게까지 사람을 잡아놓고 있다” 등 현장의 불만이 쏟아져 들어오면 그는 반드시 현장을 방문, 메일 내용을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내린다.

    그가 이처럼 현장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그 자신의 ‘약점’을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잘 알려지다시피 78년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증을 딴 뒤 87년부터 96년까지 서울대학교 의대 산부인과 교수를 역임했다. 외국의 경영대학원에 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일찍부터 경영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다. 96년 아버지 신용호 창업주의 부름을 받고 뒤늦게 교보생명 경영에 뛰어든 그로서는 회사라는 조직을 알기 위해 현장 직원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현장주의’는 교보생명의 방향을 틀어놓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 그는 회장 취임 이후 ‘볼륨에서 밸류로’라는 말을 강조하는데, 그동안의 외형경쟁 위주 경영에서 탈피해 수익 중심의 경영을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말이다. 당시 교보 안팎에서는 외형경쟁으로는 삼성생명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진 만큼 회사 경영 방침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신회장이 이를 제대로 포착한 셈이다.

    사실 신회장만큼 회사 구석구석을 꿰뚫고 있는 임직원은 교보 내에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관계자는 “신회장은 보험에 대해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전국의 말단 영업소 조직이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면서 “최고 경영자가 세세한 업무까지 알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물론 경영 방침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강력한 외형경쟁 드라이브를 통해 교보생명을 오늘날 생보업계 2위로 성장시킨 신용호 창업주의 ‘성공신화’가 회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회장은 그러나 “외형경쟁은 결국 ‘거품 계약’ ‘부실 계약’만 낳는다”고 아버지를 설득,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는 후문.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기’에 나선 셈이다.

    현장을 뛰는 ‘生保업계 기린아’
    신용호 창업주는 요즘도 여전히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본사 사무실에 출근하긴 하지만 경영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신용호 창업주는 신회장 취임 전까지만 해도 경영진으로부터 주요 업무를 보고받는 등 경영을 일일이 챙겼다.

    신회장의 ‘홀로서기’에는 곡절도 있었다. 98년 10월 회장에 취임했던 그는 6개월도 안 돼 스스로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앉았다. 일상적인 경영에 참여하기보다는 경영을 감독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한 것이다. 당시 교보생명 안팎에서는 그가 아직도 경영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의대 교수직에 미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볼륨에서 밸류로’는 코보시 NTT도코모 회장의 경영철학이기도 하다. 코보시 회장은 요금 인하 등으로 가입자가 폭주하자 곧 한계에 도달하리라고 예상하고 ‘불륨에서 밸류로’라는 기치 아래 비(非)음성 통신 시장 개척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서비스 개시 후 1년반 만에 1200만명의 가입 이용자를 확보한 ‘i모드’였다.

    신회장의 ‘볼륨에서 밸류로’ 경영 방침에 대해 보험업계에서는 “방향을 잘 잡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최근 들어 그 성과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12월 기준 생활설계사 1인당 수입은 180만원으로, 같은 해 4월보다 30만원 순증했다. 보험계약 유지율도 큰 폭으로 향상됐다. 4회차 및 7회차 유지율이 모두 10% 포인트 개선돼 각각 93%와 85%를 보여주고 있다는 게 교보측의 설명이다. 교보측은 “이런 추세라면 보험계약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지표인 13회차 유지율 역시 곧 80%에 이를 전망”이라고 밝혔다.

    직원들의 만족도도 높아가고 있다. 신회장이 직원들도 내부 고객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면서 사원 및 사원 가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영업직 간부는 “과거에는 목표를 무리하게 정해놓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엄청나게 깨졌는데, 이제는 지점장이나 영업소장 등 영업관리자를 대상으로 능력과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변했기 때문인지 직원들 사이에 ‘해보자’는 분위기가 높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회장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명문대 의과대학 교수에서 경영자로 ‘연착륙’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임직원들의 그에 대한 평가도 호의적이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리더십으로 회사를 이끌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한 간부는 “신회장은 교보생명으로 옮긴 이후 처음에는 회사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교육장에 조용히 들어와 무언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눈치채지 못하는 직원들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검소한 생활도 돋보이는 부분. 한 부장급 간부에 따르면 “서울대 의대 교수 시절에는 르망을 손수 몰고 다닐 정도”였다는 것. 교수 출신이다보니 의전에도 익숙하지 않아 홍보실에서 회장 주재 회의나 모임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그만 찍으라”는 소리를 곧잘 한다고.

    신회장은 자신의 리더십 유형을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규정한다. 임원들에게도 이를 강조한다. 리더가 조직을 일방적으로 끌고 나가기보다는 그 조직이 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뒷받침해주는 게 리더의 역할이라는 게 서번트 리더십의 핵심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교보생명을 이끌었던 창업주 신용호 회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고 그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한국식 온정주의에 기울어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의 합리주의는 미국식이라고 보면 거의 정확하다는 게 직원들의 얘기다. 한 간부는 “일한 만큼 보상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신회장의 의지인 것 같다. 이는 바꿔 말하면 앞으로 무능한 사람은 발붙이기 힘들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곧잘 “나는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 평생 넉넉하게 살 만큼 재산이 있기 때문에 사심없이 회사를 경영, 교보를 초일류 보험회사로 만드는 것만이 목표라는 얘기를 자주 한다는 것.

    그래서일까. 그는 외부 활동을 극히 자제하고 있다. 임원들이 외부 인사도 만나 인맥을 넓혀야 하지 않느냐고 권유해도 “내가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물론 언론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움직임은 보험업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는 대형 보험업체에서는 최초로 2세 경영에 나선 데다 의대 교수 출신 경영인이라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추진하고 있는 ‘변화와 혁신’이 어떤 결실을 보는지에 따라 보험업계 판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회장의 ‘현장주의’가 코지 NTT도코모 회장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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