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에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져 14년 동안 중환자실에서 눈과 입으로만 얘기해야 했던 ‘식물인간’ 아내. 그 아내가 12월19일, 마지막으로 괴로운 듯 눈을 깜빡이고 세상을 등졌다.
국내 최고의 치과의사로 평가받는 고려대 안암병원 치과 권종진 교수(權鍾瑨·52). 그는 21일 오전 8시 아내 한전씨(韓全·46)의 장례식을 치르며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눈물 어린 눈동자엔 아내의 얼굴이 눈부처로 박혀 있었다. 목소리를 잃은 아내가 눈을 찡그리고 입술을 실룩거리며 얘기했던 숱한 순간들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권교수의 아내는 1987년 둘째 아들의 생일날 쓰러졌다. 금세 좋아질 줄 알았던 아내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고 얼굴 표정만 살아 있는 상태로 14년이 지났다. 아내는 목에 꽂은 튜브를 통해 산소를 공급받았고 이 튜브를 떼면 곧 숨을 거두게 되는 상태로 연명했다. 신경과 의사들은 목 앞쪽의 실핏줄이 막힌 것을 원인으로 추정했지만 정확한 병명도 모르는 상태에서 답답한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권교수는 지금도 아내가 쓰러진 순간이 생생하기만 하다. 그날은 둘째 아들의 두 돌 생일. 권교수는 외식을 위해 집에 일찍 들어왔고 “너무 피곤해 집에서 쉬고 싶다”는 아내의 등을 떠밀어 승용차에 태웠다. 집이 있는 여의도에서 경기 고양시 벽제의 갈비집 ‘늘봄농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구파발을 지나 삼송리 검문소에 이르자 아내는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고, 권교수는 창문을 열어줬다. 대자삼거리를 우회전해 식당에 도착할 무렵 아내는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쓰러졌다. 급히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나 아내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며 아빠의 다리를 잡고 울며 매달렸지만 그 긴 밤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권교수는 나중에 집에서 아내가 먹던 혈액순환개선제를 발견했다. 은행나무 추출물질로 만든 약이었다. 이미 아내는 증세를 느끼고 있었지만 권교수는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후회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아내는 고려대 혜화병원에서 서울대병원을 거쳐 고려대 안암병원 중환자실에 누워만 있었다. 그동안 다리뼈가 몇 번 부러지고 욕창에다 각종 합병증이 뒤이었다.
고려대 안암병원 3층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아내 한씨는 1층에서 올라오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를 다른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구별했다. 1층 계단을 올라가다 일이 생겨 다른 곳에 갔다가 한두 시간 늦게 오면 화를 내기도 했다. 아내로선 틈날 때마다 찾아오는 권교수가 세상의 창이었다.
아내는 입술 움직임과 눈으로 “팩스가 무엇이냐” “컴퓨터로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등을 물었고 권교수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언젠가는 아내가 일어날 것을 굳게 믿으며….
권교수는 “아내가 중환자실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보통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싸움도 했고 자녀 문제 때문에 다투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부가 다툴 때엔 권교수의 목소리만 들려 사정을 모르는 중환자실 의사나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몇 년 전 권교수가 염색하고 중환자실에 나타나자 아내는 눈물을 글썽였다. “여자 생긴 거 아니냐”고 따지면서. 권교수는 그 뒤로는 한번도 머리 염색을 하지 않았다.
권교수는 아내에게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얘기를 했다가 다툰 적도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식물인간’이라는 사실이 싫어 학교에 써내는 인적사항란에 ‘엄마가 외국 유학중’이라고 썼다. 권교수가 아이들 얘기를 하자 아내는 “우리 착한 아이들이 그럴 리 없다”고 화를 냈다.
큰아들은 12월23일 입대했고, 둘째는 내년에 대입 수험생이 되지만 아내는 여섯 살, 세 살 때의 아이들만 기억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들은 권교수가 남들에게 대놓고 자랑할 만큼 대견하게 성장했다.
권교수는 아내 대신 두 아들의 ‘엄마’ 노릇도 했다. 누나(58)가 아이들 양육을 도왔지만 그녀에게도 충격적인 일이 생겼다. 98년 누나의 큰아들이 여의도에서 버스 탈취범을 막다가 버스에 치여 숨진 것. 정부로부터 ‘의인상’을 받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누나는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 당시는 마침 권교수의 장남이 고3 때. 권교수는 아내와 누나를 함께 돌보면서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들의 도시락 2개를 싸야 했다.
권교수는 아내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두 가지는 두고두고 고마워했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5년 전 아내 한씨는 극도의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고 혀를 깨물었다. 병원에선 “외상은 없는데 피가 모자랄 때 생기는 증세와 마찬가지로 헤모글로빈 수치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며 급히 권교수를 불렀다. 거듭 확인해 보니 혀가 거의 다 잘려 있었다. 권교수는 직접 혀를 꿰매는 수술을 했다. 그리고 “병명이 밝혀지고 치료법이 나올 때까지 꿋꿋이 살아야 한다”며 아내의 마른 손을 꼭 잡았다.
몇 달 뒤 권교수는 아내에게 중환자실 바깥을 구경시켜줬다. 주치의에게 스케일링을 해줘야 한다고 우겨 1층 자신의 진료실로 데리고 온 것. 아내는 남편의 방에 온 것을 너무 행복해 했다. 권교수는 빨대를 통해 아내에게 커피를 먹여주었다. 아내의 얼굴은 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권교수의 이런 정성은 3년 전 세상을 떠난 권교수의 어머니도 대견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의 어머니는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술 담배 끊고 며늘아기는, 가련한 며늘아기는 네가 끝까지….”
권교수는 담배를 끊지 못했고 술도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폭음하지만 아내 사랑만은 지키려고 애썼다. 두 아들과 함께 눈물을 훔치며 장례식을 준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매번 아내가 위기를 이겨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시련을 내색하지 않고 늘 웃으며 일하는 권교수는 구강외과의 각종 수술과 임플란트 시술분야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월급은 몽땅 아내 진료비로 쏟아부어 돈을 모을 수 없었지만 실력은 누구나 인정해 “치과의사들이 필요할 때 급히 찾는 의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 ‘동아일보’에 게재된 ‘베스트닥터 건강학’에 치과 부문 최고 명의로 뽑히기도 했다. 지난해 산둥(山東)대학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 CCTV에 출연해 임플란트 특강을 한 그에게는 중국으로부터의 치료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내년에는 장애인을 위한 대규모 치과 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다.
권교수는 박사과정에 있을 때 친척의 소개로 대학을 갓 졸업한 아내를 만났다. “철없는 아내는 저를 철석같이 믿고 결혼했고 저는 끝까지 아내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머니의 유언 중 하나는 지켰으니까 두 가지 약속은 지킨 셈이죠.”
권교수는 사랑하는 아내의 유해를 가족 납골당에 안치할 예정이다. 경기 용인시에 가족 납골당을 마련했지만 막내인 그가 먼저 아내의 유해를 안치하는 것이 가족에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당장은 유해 봉안소에 모실 예정이다.
“사실 못 지킨 약속이 있습니다. 아내는 병원측에 장기기증을 약속하고 저에게 꼭 그렇게 되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했는데 증세가 갑자기 악화돼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요. 아내는 자신을 화장해 바다에 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내의 자취가 너무 멀어지는 것 같아 그것 또한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국내 최고의 치과의사로 평가받는 고려대 안암병원 치과 권종진 교수(權鍾瑨·52). 그는 21일 오전 8시 아내 한전씨(韓全·46)의 장례식을 치르며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눈물 어린 눈동자엔 아내의 얼굴이 눈부처로 박혀 있었다. 목소리를 잃은 아내가 눈을 찡그리고 입술을 실룩거리며 얘기했던 숱한 순간들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권교수의 아내는 1987년 둘째 아들의 생일날 쓰러졌다. 금세 좋아질 줄 알았던 아내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고 얼굴 표정만 살아 있는 상태로 14년이 지났다. 아내는 목에 꽂은 튜브를 통해 산소를 공급받았고 이 튜브를 떼면 곧 숨을 거두게 되는 상태로 연명했다. 신경과 의사들은 목 앞쪽의 실핏줄이 막힌 것을 원인으로 추정했지만 정확한 병명도 모르는 상태에서 답답한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권교수는 지금도 아내가 쓰러진 순간이 생생하기만 하다. 그날은 둘째 아들의 두 돌 생일. 권교수는 외식을 위해 집에 일찍 들어왔고 “너무 피곤해 집에서 쉬고 싶다”는 아내의 등을 떠밀어 승용차에 태웠다. 집이 있는 여의도에서 경기 고양시 벽제의 갈비집 ‘늘봄농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구파발을 지나 삼송리 검문소에 이르자 아내는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고, 권교수는 창문을 열어줬다. 대자삼거리를 우회전해 식당에 도착할 무렵 아내는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쓰러졌다. 급히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나 아내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며 아빠의 다리를 잡고 울며 매달렸지만 그 긴 밤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권교수는 나중에 집에서 아내가 먹던 혈액순환개선제를 발견했다. 은행나무 추출물질로 만든 약이었다. 이미 아내는 증세를 느끼고 있었지만 권교수는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후회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14년이 흘렀다. 아내는 고려대 혜화병원에서 서울대병원을 거쳐 고려대 안암병원 중환자실에 누워만 있었다. 그동안 다리뼈가 몇 번 부러지고 욕창에다 각종 합병증이 뒤이었다.
고려대 안암병원 3층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아내 한씨는 1층에서 올라오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를 다른 사람의 발자국 소리와 구별했다. 1층 계단을 올라가다 일이 생겨 다른 곳에 갔다가 한두 시간 늦게 오면 화를 내기도 했다. 아내로선 틈날 때마다 찾아오는 권교수가 세상의 창이었다.
아내는 입술 움직임과 눈으로 “팩스가 무엇이냐” “컴퓨터로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등을 물었고 권교수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언젠가는 아내가 일어날 것을 굳게 믿으며….
권교수는 “아내가 중환자실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보통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싸움도 했고 자녀 문제 때문에 다투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부가 다툴 때엔 권교수의 목소리만 들려 사정을 모르는 중환자실 의사나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몇 년 전 권교수가 염색하고 중환자실에 나타나자 아내는 눈물을 글썽였다. “여자 생긴 거 아니냐”고 따지면서. 권교수는 그 뒤로는 한번도 머리 염색을 하지 않았다.
권교수는 아내에게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얘기를 했다가 다툰 적도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식물인간’이라는 사실이 싫어 학교에 써내는 인적사항란에 ‘엄마가 외국 유학중’이라고 썼다. 권교수가 아이들 얘기를 하자 아내는 “우리 착한 아이들이 그럴 리 없다”고 화를 냈다.
큰아들은 12월23일 입대했고, 둘째는 내년에 대입 수험생이 되지만 아내는 여섯 살, 세 살 때의 아이들만 기억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들은 권교수가 남들에게 대놓고 자랑할 만큼 대견하게 성장했다.
권교수는 아내 대신 두 아들의 ‘엄마’ 노릇도 했다. 누나(58)가 아이들 양육을 도왔지만 그녀에게도 충격적인 일이 생겼다. 98년 누나의 큰아들이 여의도에서 버스 탈취범을 막다가 버스에 치여 숨진 것. 정부로부터 ‘의인상’을 받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누나는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 당시는 마침 권교수의 장남이 고3 때. 권교수는 아내와 누나를 함께 돌보면서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들의 도시락 2개를 싸야 했다.
권교수는 아내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두 가지는 두고두고 고마워했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5년 전 아내 한씨는 극도의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고 혀를 깨물었다. 병원에선 “외상은 없는데 피가 모자랄 때 생기는 증세와 마찬가지로 헤모글로빈 수치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며 급히 권교수를 불렀다. 거듭 확인해 보니 혀가 거의 다 잘려 있었다. 권교수는 직접 혀를 꿰매는 수술을 했다. 그리고 “병명이 밝혀지고 치료법이 나올 때까지 꿋꿋이 살아야 한다”며 아내의 마른 손을 꼭 잡았다.
몇 달 뒤 권교수는 아내에게 중환자실 바깥을 구경시켜줬다. 주치의에게 스케일링을 해줘야 한다고 우겨 1층 자신의 진료실로 데리고 온 것. 아내는 남편의 방에 온 것을 너무 행복해 했다. 권교수는 빨대를 통해 아내에게 커피를 먹여주었다. 아내의 얼굴은 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권교수의 이런 정성은 3년 전 세상을 떠난 권교수의 어머니도 대견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의 어머니는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술 담배 끊고 며늘아기는, 가련한 며늘아기는 네가 끝까지….”
권교수는 담배를 끊지 못했고 술도 일주일에 한 차례 정도 폭음하지만 아내 사랑만은 지키려고 애썼다. 두 아들과 함께 눈물을 훔치며 장례식을 준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매번 아내가 위기를 이겨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시련을 내색하지 않고 늘 웃으며 일하는 권교수는 구강외과의 각종 수술과 임플란트 시술분야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월급은 몽땅 아내 진료비로 쏟아부어 돈을 모을 수 없었지만 실력은 누구나 인정해 “치과의사들이 필요할 때 급히 찾는 의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 ‘동아일보’에 게재된 ‘베스트닥터 건강학’에 치과 부문 최고 명의로 뽑히기도 했다. 지난해 산둥(山東)대학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 CCTV에 출연해 임플란트 특강을 한 그에게는 중국으로부터의 치료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내년에는 장애인을 위한 대규모 치과 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다.
권교수는 박사과정에 있을 때 친척의 소개로 대학을 갓 졸업한 아내를 만났다. “철없는 아내는 저를 철석같이 믿고 결혼했고 저는 끝까지 아내를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머니의 유언 중 하나는 지켰으니까 두 가지 약속은 지킨 셈이죠.”
권교수는 사랑하는 아내의 유해를 가족 납골당에 안치할 예정이다. 경기 용인시에 가족 납골당을 마련했지만 막내인 그가 먼저 아내의 유해를 안치하는 것이 가족에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당장은 유해 봉안소에 모실 예정이다.
“사실 못 지킨 약속이 있습니다. 아내는 병원측에 장기기증을 약속하고 저에게 꼭 그렇게 되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했는데 증세가 갑자기 악화돼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요. 아내는 자신을 화장해 바다에 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아내의 자취가 너무 멀어지는 것 같아 그것 또한 지켜주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