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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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의 절정’ 목숨 건 동침

성경에 ‘반드시 사형’규정…쾌락의 도시 ‘소돔’은 동성애 즐기다 멸망

  • 입력2005-11-07 1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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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의 절정’ 목숨 건 동침
    사람 중에는 이성보다 동성을 사랑하는 동성애자가 섞여 있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동성애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경멸과 금지의 대상이었다.

    구약성서는 남자끼리의 성관계를 극도로 혐오했다. 야훼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그릇된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되는 규정을 일러주면서 “여자와 자듯이 남자와 한 자리에 들어도 안된다”(레위기 18:22)고 말하고 “여자와 한 자리에 들듯이 남자와 한 자리에 든 남자가 있으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하였으므로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레위기 20:13)고 했다.

    남성 동성애자(게이)들은 대퇴부 성교와 항문 성교를 한다. 대퇴부 성교는 두 남자가 마주보면서 상대방의 사타구니에 페니스를 끼우고 비벼 넓적 다리에 사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항문 성교는 페니스를 상대 남자의 항문에 삽입하여 오르가슴을 느낀다. 항문 성교행위는 비역 또는 남색이라 하는데, 남색을 의미하는 영어(sodomy)는 소돔에서 비롯되었다.

    사해 남쪽에 있던 소돔은 동성애를 탐닉한 대가로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느님의 천사 둘이 저녁 때 소돔에 다다른다. 성문께에 앉아 있던 롯이 때마침 그들을 보고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 쉬게 한다. 천사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시민이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몰려와 롯에게 “오늘밤 네 집에 든 자들이 어디 있느냐? 그 자들하고 재미를 좀 보게 끌어내어라”고 소리친다. 롯은 “나에게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딸이 둘 있소.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내어줄 터이니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내가 모신 분들에게만은 아무 짓도 말아주시오”하며 사정한다. 천사들은 문앞에 몰려든 사람들이 눈이 부셔 문을 찾지 못하게 만들고 롯에게 “아들 딸 말고도 이 성에 다른 식구가 있거든 다 데리고 떠나거라. 이 백성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야훼께 사무쳐 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야훼의 보내심을 받아 이곳을 멸하러 왔다”고 말한다.

    롯이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소돔을 떠난 뒤에 야훼가 손수 하늘에서 유황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퍼부어 도시와 사람을 모조리 태워버린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분지 일대의 땅에서는 마치 아궁이에서 뿜어나오는 것처럼 연기만 치솟았다(창세기 19:1~29).



    성경에는 동성애가 빌미가 되어 집단 강간이 발생하고 내전으로 비화되어 한 도시가 멸망하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레위인 한 사람이 첩과 함께 여행 도중 기브아에 있는 어느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무뢰배들이 몰려와서 노인에게 남색의 상대로 레위인을 요구한다. 레위인은 자신의 첩을 기브아 남자들에게 넘겨준다. 그들은 그녀를 밤새도록 욕보였으며 결국 죽게 만든다(판관기 19).

    첩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으며 기브아를 공격한 이스라엘 군은 기브아 성의 사람과 짐승을 만나는 대로 칼로 쳐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판관기 20).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인물은 사도 바울이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동성애자(레즈비언)도 경멸했다. 바울은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 대신 비정상적인 것을 즐기며 남자들 역시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남자끼리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로마서 7:26~27)고 말하고, 남색하는 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고린도전서 6:9).

    동성애가 바울에 의해 용서할 수 없는 죄악으로 간주됨에 따라 동성애자들은 교회로부터 처벌받게 된다. 이를테면 4세기 초 동성애자에게는 세례를 해주지 않았으며 그 짓을 그만둘 때까지 설교를 듣는 일조차 금지되었다. 이러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생활이 확산되면서 성직자들 사이에 동성애가 성행하기 시작함에 따라 교회법은 진통을 겪게 된다. 가령 567년 열린 종교회의에서는 수도사들이 침대에서 잠을 자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채택한다. 아울러 수도원의 등불을 밤새도록 켜두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693년 열린 회의에서는 성직자들 사이에 남색이 성행하므로 주교나 사제일 경우 직위를 박탈하고 종신유배의 형벌에 처할 것을 결정한다.

    동성애자에게 부과되는 벌칙은 해당자의 나이나 성행위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적용됐다. 예컨대 7세기에 교회에서는 게이의 다섯가지 성적 기교인 키스, 상호수음, 대퇴부 성교, 구강 성교, 항문 성교에 대해 차등을 두어 형량을 결정했다. 키스의 경우 범법자가 20세 미만일 때 단순 키스는 6일, 음란한 키스는 8일, 사정 또는 포옹이 수반된 키스는 10일의 단식에 처해졌다. 동성애자가 20세 이상일 때는 키스의 형태를 구분하지 않고 단식의 벌칙을 받았으며 교회에서 추방되었다. 상호수음은 20~40일, 대퇴부 성교는 2년, 구강 성교는 4년, 항문 성교는 7년의 참회를 선고받았다.

    13세기에는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더욱 경직된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동성애는 조물주뿐만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도 부자연스럽고 색정적인 탈선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의 영향력은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까지 절대적이어서 14세기부터 동성애자들은 서방의 교회와 국가 어디에서도 피난처를 찾을 수 없게 된다.

    16세기 초 영국의 헨리 8세는 남색을 사형의 중죄로 다스리는 법률을 제정한다. 동성애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범죄로까지 낙인이 찍힌 것이다. 한때 영국에서는 살인보다 남색으로 처형된 사람이 더 많았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동성애자들이 사회적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밝히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독일 번호사인 칼 울리히(1825~1895)이다. 그는 동성애가 선천적인 성향이므로 조물주로부터 받은 본능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색법의 폐지를 요구했으나 조롱거리가 되었다. 훗날 동성애자의 인권운동을 처음으로 전개한 용감한 게이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울리히가 활약하던 시기는 성과학의 여명기였다. 독일 의사인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1840~1902)은 동성애를 정신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성적 일탈행위라고 분석했다. 동성애를 사악한 원죄의 산물이나 범죄적인 성향의 표현인 것으로 생각해 온 통념과는 달리 정신질환의 증세로 보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크라프트-에빙에 이어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성적 일탈행위에 대한 정신 분석을 통해 동성애를 유아 시절의 성적 환상에서 비롯된 병리학적 상태라고 주장했다. 동성애가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간주됨에 따라 수많은 게이들이 정신분석, 거세, 고환이식, 호르몬 처리, 전기충격 치료, 뇌 수술 따위의 실험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의사들이 의술이라는 미명하에 동성애자들에게 신체적-정신적으로 해를 입힌 처사는 범죄에 버금가는 인권 침해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20세기에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성 풍습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라에 따라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우선 독재 국가들은 동성애에 대해 가혹했다. 나치스는 동성애자들을 집단 수용소에서 학살했다. 공산주의 정권에서는 동성애를 퇴치하는 일이 공산당 정책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한편 서구에서는 동성애를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 앨프리드 킨지(1894~1956)가 발표한 보고서를 계기로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편견이 완화되었다. 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오로지 게이로 평생을 일관한 남성은 4%, 오르가슴을 수반한 동성애의 경험을 적어도 한 차례 가진 적이 있는 남성은 37%였다. 여자의 경우는 다소 비율이 낮았는데, 1~3%가 오로지 레즈비언으로 일관했으며 13%가 동성과의 접촉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 오르가슴을 맛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수치의 정확성을 놓고 논란이 많았지만 남자의 4~5%, 여자의 2~4%가 그들 생애의 많은 시간을 동성애에 할애하는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오늘날 대세를 이룬다.

    어쨌거나 킨지 보고서는 동성애에 대해 유달리 거부감이 강한 미국 사회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더욱이 1969년 6월에는 스톤월 폭동 사건이 터져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스톤월은 뉴욕 중심가에 소재한 동성애자 전용 술집인데, 경찰의 단속 과정에서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레즈비언을 연행하는 경찰을 돌멩이로 공격하면서 시작된 폭동은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다음날 다시 불붙은 전투에는 2000명이 넘는 동성애자들이 가담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동성애자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스톤월 폭동은 울리히가 점화한 동성애자 해방 운동이 100여년만에 만개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하나의 신화가 된 이 사건을 계기로 동성애자의 존재는 일반인들의 관심사로 부각되었으며, 동성애자들은 인권 회복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74년 12월 미국 정신병학회는 공식적으로 동성애를 정신질환의 목록에서 삭제했다. 바울 이후 서방 문화에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부당하게 유린해온 쇠사슬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정신병의 굴레에서 벗어난 동성애자들은 본격적인 커밍 아웃(coming out)을 시작했다. 커밍 아웃은 글자 그대로 밀실 밖으로 나와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떳떳이 밝히는 행위를 뜻한다. 그들의 적극적인 행동은 취업, 결혼, 군 복무에서 이성애자와 동등한 법률적 권한을 요구하고 나섰다.

    1975년 미국 연방정부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취업 거부를 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동성애 부부에게 이성애 부부와 대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움직임이 잇따랐다. 1999년 10월 프랑스 의회는 동성애 부부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법률을 의결했다. 같은 달 영국 대법원은 게이에게 동거하던 게이의 유산 상속권을 부여하는 판결을 내렸다. 2000년 4월 영국 정부는 지방자치단체가 동성애 부부의 자녀 입양 신청을 허용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캐나다에서는 2001년의 인구 통계에 동성애 부부 항목을 신설하여 새로운 가족 형태의 하나로 포함시킬 예정이다. 우리나라 동성애자들의 짝짓기 무대로 소문난 곳은 서울 탑골 공원 뒤편의 낙원동과 용산의 이태원 일대다. 뒷골목에는 동성애자들이 서로 껴안고 입맞춤을 나누는 게이바가 여럿 있다. 게이바에서 동성애 부부 결혼식이 성대하게 치러질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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