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민중보다는 영웅이며 정복당하는 쪽보다 정복자다. 그래서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역사책의 내용은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고대의 영웅이 알렉산더, 칭기즈칸과 같이 광활한 영토를 정복한 왕과 장군들이었다면 근세로 거슬러올라가면서 이러한 영웅들은 전인미답의 땅에 맨 처음 도달한 콜럼버스와 마젤란, 쿡과 같은 탐험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19세기 말, 지구 방방곡곡이 남김없이 점령되자 강대국들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처녀지인 극지로 정복의 방향을 돌렸다. 각국의 명예를 건 극지 탐험 경쟁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시신 돌려주오” 투쟁
마침내 1909년 미국의 해군장교 로버트 피어리가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다. 유럽 열강을 물리친 신생국 미국의 쾌거였다. 2년 후인 1911년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남극점에 발을 디뎠다.
당시 극지 정복을 둘러싸고 맹렬한 경쟁을 벌였던 피어리와 아문센, 그리고 남극점에서 귀환하는 도중 사망한 영국의 스콧 등은 탐험의 성패와 관계없이 그들의 고국에서 인류의 한계에 도전한 위대한 탐험가이자 영웅들로 대접받고 있다. 동상으로 인해 발가락 일곱 개를 자르고서도 ‘인간은 어떠한 고통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며 북극점 도전을 중단하지 않은 피어리는 현재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피어리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는 탐험정신의 대명사로 우리나라 중학교 영어교과서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4월초 미국에서 출간될 예정인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Give me my father’s body)라는 책은 이같은 피어리의 ‘정체’에 대해 충격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피어리는 개척정신으로 충만한 탐험가였을까, 아니면 북극점 정복이라는 목적을 앞세운 채 극지의 자원을 이용해 돈벌이를 한 장사꾼이었을까.
이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벌어졌던 극지 탐험 경쟁이 순수한 탐험정신의 발로였는지, 혹은 구미 열강을 휩쓴 제국주의의 연장이었는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피어리가 처음으로 북극 탐험에 나선 시점은 1891년의 그린란드 탐사였다. 그린란드 서해안에 기지를 세운 이때의 탐사 이후로 그는 미국과 그린란드를 빈번하게 왕복했다. 1897년 피어리는 그린란드에서 여섯 명의 에스키모인을 ‘잡아와’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 넘겼다. 피어리가 털가죽 옷을 입은 에스키모들을 잡아왔다는 소문이 뉴욕에 퍼지자 삽시간에 몇천 명의 구경꾼이 몰려왔다. 피어리는 이들을 구경시켜 주고 관람객 1인당 25센트의 입장료를 받았다.
피어리에게 에스키모를 데려올 것을 요청한 뉴욕 자연사 박물관은 이들을 박물관 지하실에서 살게 했다. 그러나 무균지대에서 살아온 에스키모들은 대도시의 각종 질병들을 이겨내지 못했다. 네 명의 에스키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망하고 난 뒤, 한 명은 그린란드로 되돌려 보내졌다. 뉴욕에 남은 것은 오직 한 사람. 피어리에게 끌려올 때 예닐곱 살이었던 소년 미닉뿐이었다.
미닉은 성인 에스키모들과는 달리 낯선 뉴욕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해 나갔다. 자연사 박물관의 직원에게 입양되어 영어를 배우고 고등학교와 초급대학도 졸업했다. 그러나 1907년 미닉은 충격적인 신문기사를 접하게 된다. 자신과 함께 뉴욕으로 끌려왔던 아버지의 시신이 자연사 박물관에 연구 목적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기사였다. 박물관에서 치렀던 아버지의 장례식과 무덤은 모두 가짜였다. 박물관은 비밀리에 에스키모들의 시체를 해부하고 그 뼈를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미닉은 아버지의 시체를 찾기 위해 박물관과 힘겨운 투쟁을 벌였다. 세계 최대의 자연사 박물관과 한 에스키모 청년과의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박물관 측은 시체를 돌려주지 않은 채 이러저러한 거짓말로 일관했다.
미국 사회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낀 미닉은 그린란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뉴욕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에게 그린란드는 또다른 타향이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미닉은 박물관과 뉴욕 사회, 백악관에 탄원을 계속했다. 박물관은 끝까지 그의 간청을 뿌리쳤다. 벌목꾼이 된 미닉이 독감에 걸려 피츠버그에서 사망할 때까지….
박물관 측과 투쟁을 벌이던 당시 미닉은 ‘더 월드’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고 난 뒤 내게 유일한 혈육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이글루 주위에 나타난 산같이 큰 배와 백인들에게 끌려왔어요. 불쌍한 아버지의 시체가 땅에 묻히지 못하고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집니다. 왜 나는 남들처럼 아버지를 땅에 묻어줄 수 없나요?”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라는 책이 없었다면 미닉의 절규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극지역 사학자 켄 하퍼는 에스키모 노인들 사이에 구전되어 오는 미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 책을 썼다. 1980년대에 그린란드에서 이누이트어로 쓰인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가 출판된 뒤 에스키모들은 다시금 자연사 박물관 측에 시체들의 반환을 요구했다.
마침내 1993년 미닉의 아버지를 비롯한 에스키모들의 뼈가 돌아와 그린란드의 한 교회 묘지에 묻혔다. 뉴욕으로 끌려간 지 근 100년만의 귀환이었다. 그러나 자연사 박물관은 현재도 100여구에 달하는 각종 원주민들의 시체를 연구 목적으로 보관하고 있다.
하퍼는 이 책에서 미닉의 비극 외에도 피어리가 모피를 비롯한 그린란드의 각종 자원을 미국으로 실어 날랐으며 심지어 친구로 지내던 에스키모 가족의 묘를 파서 그 뼈를 팔아넘기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미닉이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해 백악관에 탄원했을 때 피어리는 백악관 관리들에게 이 탄원을 무시하도록 압력을 넣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위대한 탐험가 피어리와 에스키모인들을 잡아와 박물관에 넘기는 장사꾼 피어리의 이중적인 모습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미닉의 비극적인 생애는 피어리를 비롯한 당시 탐험가들의 탐욕과 오만, 그리고 원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탐험정신을 앞세운 피어리의 행태는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휩쓸던 제국주의 정복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에서 미닉은 회고한다. 브로드웨이의 현란한 불빛은 북극에서 보던 희미한 태양빛보다 몇 배나 더 매혹적이었다고. 그가 본 뉴욕 거리의 화려한 불빛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약탈해온 부(富)로 지핀 불빛이었다. 자신을 옭아맨 제국주의의 마수를 알기에는 너무 순진했던 한 원주민의 고백은 그래서 더욱 슬프게 들린다.
19세기 말, 지구 방방곡곡이 남김없이 점령되자 강대국들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처녀지인 극지로 정복의 방향을 돌렸다. 각국의 명예를 건 극지 탐험 경쟁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시신 돌려주오” 투쟁
마침내 1909년 미국의 해군장교 로버트 피어리가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다. 유럽 열강을 물리친 신생국 미국의 쾌거였다. 2년 후인 1911년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남극점에 발을 디뎠다.
당시 극지 정복을 둘러싸고 맹렬한 경쟁을 벌였던 피어리와 아문센, 그리고 남극점에서 귀환하는 도중 사망한 영국의 스콧 등은 탐험의 성패와 관계없이 그들의 고국에서 인류의 한계에 도전한 위대한 탐험가이자 영웅들로 대접받고 있다. 동상으로 인해 발가락 일곱 개를 자르고서도 ‘인간은 어떠한 고통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며 북극점 도전을 중단하지 않은 피어리는 현재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피어리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는 탐험정신의 대명사로 우리나라 중학교 영어교과서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런데 4월초 미국에서 출간될 예정인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Give me my father’s body)라는 책은 이같은 피어리의 ‘정체’에 대해 충격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피어리는 개척정신으로 충만한 탐험가였을까, 아니면 북극점 정복이라는 목적을 앞세운 채 극지의 자원을 이용해 돈벌이를 한 장사꾼이었을까.
이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걸쳐 벌어졌던 극지 탐험 경쟁이 순수한 탐험정신의 발로였는지, 혹은 구미 열강을 휩쓴 제국주의의 연장이었는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피어리가 처음으로 북극 탐험에 나선 시점은 1891년의 그린란드 탐사였다. 그린란드 서해안에 기지를 세운 이때의 탐사 이후로 그는 미국과 그린란드를 빈번하게 왕복했다. 1897년 피어리는 그린란드에서 여섯 명의 에스키모인을 ‘잡아와’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 넘겼다. 피어리가 털가죽 옷을 입은 에스키모들을 잡아왔다는 소문이 뉴욕에 퍼지자 삽시간에 몇천 명의 구경꾼이 몰려왔다. 피어리는 이들을 구경시켜 주고 관람객 1인당 25센트의 입장료를 받았다.
피어리에게 에스키모를 데려올 것을 요청한 뉴욕 자연사 박물관은 이들을 박물관 지하실에서 살게 했다. 그러나 무균지대에서 살아온 에스키모들은 대도시의 각종 질병들을 이겨내지 못했다. 네 명의 에스키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망하고 난 뒤, 한 명은 그린란드로 되돌려 보내졌다. 뉴욕에 남은 것은 오직 한 사람. 피어리에게 끌려올 때 예닐곱 살이었던 소년 미닉뿐이었다.
미닉은 성인 에스키모들과는 달리 낯선 뉴욕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해 나갔다. 자연사 박물관의 직원에게 입양되어 영어를 배우고 고등학교와 초급대학도 졸업했다. 그러나 1907년 미닉은 충격적인 신문기사를 접하게 된다. 자신과 함께 뉴욕으로 끌려왔던 아버지의 시신이 자연사 박물관에 연구 목적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기사였다. 박물관에서 치렀던 아버지의 장례식과 무덤은 모두 가짜였다. 박물관은 비밀리에 에스키모들의 시체를 해부하고 그 뼈를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미닉은 아버지의 시체를 찾기 위해 박물관과 힘겨운 투쟁을 벌였다. 세계 최대의 자연사 박물관과 한 에스키모 청년과의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박물관 측은 시체를 돌려주지 않은 채 이러저러한 거짓말로 일관했다.
미국 사회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낀 미닉은 그린란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뉴욕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에게 그린란드는 또다른 타향이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미닉은 박물관과 뉴욕 사회, 백악관에 탄원을 계속했다. 박물관은 끝까지 그의 간청을 뿌리쳤다. 벌목꾼이 된 미닉이 독감에 걸려 피츠버그에서 사망할 때까지….
박물관 측과 투쟁을 벌이던 당시 미닉은 ‘더 월드’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고 난 뒤 내게 유일한 혈육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이글루 주위에 나타난 산같이 큰 배와 백인들에게 끌려왔어요. 불쌍한 아버지의 시체가 땅에 묻히지 못하고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안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집니다. 왜 나는 남들처럼 아버지를 땅에 묻어줄 수 없나요?”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라는 책이 없었다면 미닉의 절규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극지역 사학자 켄 하퍼는 에스키모 노인들 사이에 구전되어 오는 미닉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 책을 썼다. 1980년대에 그린란드에서 이누이트어로 쓰인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가 출판된 뒤 에스키모들은 다시금 자연사 박물관 측에 시체들의 반환을 요구했다.
마침내 1993년 미닉의 아버지를 비롯한 에스키모들의 뼈가 돌아와 그린란드의 한 교회 묘지에 묻혔다. 뉴욕으로 끌려간 지 근 100년만의 귀환이었다. 그러나 자연사 박물관은 현재도 100여구에 달하는 각종 원주민들의 시체를 연구 목적으로 보관하고 있다.
하퍼는 이 책에서 미닉의 비극 외에도 피어리가 모피를 비롯한 그린란드의 각종 자원을 미국으로 실어 날랐으며 심지어 친구로 지내던 에스키모 가족의 묘를 파서 그 뼈를 팔아넘기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미닉이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해 백악관에 탄원했을 때 피어리는 백악관 관리들에게 이 탄원을 무시하도록 압력을 넣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위대한 탐험가 피어리와 에스키모인들을 잡아와 박물관에 넘기는 장사꾼 피어리의 이중적인 모습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미닉의 비극적인 생애는 피어리를 비롯한 당시 탐험가들의 탐욕과 오만, 그리고 원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탐험정신을 앞세운 피어리의 행태는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휩쓸던 제국주의 정복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세요’에서 미닉은 회고한다. 브로드웨이의 현란한 불빛은 북극에서 보던 희미한 태양빛보다 몇 배나 더 매혹적이었다고. 그가 본 뉴욕 거리의 화려한 불빛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약탈해온 부(富)로 지핀 불빛이었다. 자신을 옭아맨 제국주의의 마수를 알기에는 너무 순진했던 한 원주민의 고백은 그래서 더욱 슬프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