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정치 개선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정치에 입문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면역과 이해가 부족했고 특히 일부 정치인들과 몇몇 정치지도자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행태를 대하고 정치에 입문할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연세대 의대 교수인 윤방부씨(57)가 총선 정가에서 두 번이나 화제가 됐다.
처음은 한나라당 서울 노원갑 공천경쟁에서 3선의 터줏대감인 백남치의원을 제치고 보란 듯이 공천권을 손에 쥔 것. 바로 얼마 전인 2월18일의 일이었다.
더욱이 낙천한 백의원은 이회창총재의 사람으로 97년 대선 당시 최측근 그룹인 이른바 ‘7인방’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어서 놀라움이 더 컸다.
그의 공천은 세간의 양론을 불렀다. “전문의 경험을 살려 국회에서 보건의료 분야 발전에 보탬이 될 인물”이라는 긍정론도 있었지만 “TV에 몇 번 나오더니 역시 정치냐”는 부정적인 평가도 없지 않았다.
그런 윤교수가 불과 며칠만에 사람들을 또다시 놀라게 했다.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정치풍토에 환멸을 느낀다며 ‘7일간의 정치 외도’를 끝내고 본업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
그는 2월24일 각 언론사로 불출마의 변을 담은 보도자료를 보냈다. 내용은 이랬다. “현실정치 개선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정치에 입문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면역과 이해가 부족했고 특히 일부 정치인들과 몇몇 정치지도자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행태를 대하고 정치에 입문할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언론과의 대화’를 끊어버렸다. 기자들이 접근해 구체적인 사퇴 이유를 계속 물었지만 그는 “보도자료대로만 이해해 달라”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그가 말한 ‘고질적인 문제들’이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천이 확정된 뒤 윤교수에게 선거브로커들이 접근했다. 브로커들은 지역구민, 선거운동조직의 생리를 일일이 거론하면서 ‘이 사람은 얼마, 저 사람은 얼마쯤 주면 당선은 문제없다’는 식으로 불법선거운동을 부추겼다. 그의 집과 사무실 등으로 ‘왜 출마하느냐’ ‘출마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등의 협박성 괴전화도 수시로 걸려와 가족까지 불안하게 했다. 결국 그는 가족과 친지들의 의견을 들어 불출마를 결심했다.’
그의 불출마선언 역시 양론에 휩싸였다. “역시 괜찮은 사람이다. 더러운 정치판에 더 휩쓸리지 않고 잘했다” “그렇게 세상물정도 모르고 정치하려 했다는 거냐. 행동이 너무 가볍다”는 칭찬과 비난이 동시에 뒤따른 것.
윤교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동기로 정치를 하려 했을까.그의 출생지는 서울이지만 원적은 충남 예산이다. 그는 서울고와 연세대 의대를 나왔고 같은 대학에서 예방의학을 전공,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77, 78년 미국 미네소타대학 대학원에 유학하면서 그의 인생은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분야인 가정의학을 공부하게 됐고 이를 국내에 도입, 국내 가정의학 선구자그룹의 일원이 된 것. 이후 국내에서 가정의학의 수요 급증은 그를 금새 유명의로 만들었다.
여기에다 그는 친절하고 설명을 잘해주는 의사로 환자들로부터 호평받았다. 호남형의 얼굴에다 언변도 뛰어나 방송출연도 잦았고 이내 건강상담의사로 명성을 쌓았다. ‘문장이 되는 몇 안되는 의사’로 꼽혀 여러 신문에 의학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참신한 인물부족으로 고민하는 정치권이 눈독을 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가 97년 대선 당시 DJ보다는 이회창을 선호했다고 알려지면서, 그리고 민주당이 같은 대학 황수관교수를 서울 마포을에 공천하면서 이총재 진영이 몸이 달았다는 후문이다.
어쨌거나 결과론인지는 몰라도 한나라당과 윤교수가 벌인 ‘정치극’은 ‘준비 안된 것’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듯하다.
연세대 의대 교수인 윤방부씨(57)가 총선 정가에서 두 번이나 화제가 됐다.
처음은 한나라당 서울 노원갑 공천경쟁에서 3선의 터줏대감인 백남치의원을 제치고 보란 듯이 공천권을 손에 쥔 것. 바로 얼마 전인 2월18일의 일이었다.
더욱이 낙천한 백의원은 이회창총재의 사람으로 97년 대선 당시 최측근 그룹인 이른바 ‘7인방’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어서 놀라움이 더 컸다.
그의 공천은 세간의 양론을 불렀다. “전문의 경험을 살려 국회에서 보건의료 분야 발전에 보탬이 될 인물”이라는 긍정론도 있었지만 “TV에 몇 번 나오더니 역시 정치냐”는 부정적인 평가도 없지 않았다.
그런 윤교수가 불과 며칠만에 사람들을 또다시 놀라게 했다.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정치풍토에 환멸을 느낀다며 ‘7일간의 정치 외도’를 끝내고 본업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
그는 2월24일 각 언론사로 불출마의 변을 담은 보도자료를 보냈다. 내용은 이랬다. “현실정치 개선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정치에 입문하기로 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면역과 이해가 부족했고 특히 일부 정치인들과 몇몇 정치지도자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행태를 대하고 정치에 입문할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언론과의 대화’를 끊어버렸다. 기자들이 접근해 구체적인 사퇴 이유를 계속 물었지만 그는 “보도자료대로만 이해해 달라”며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그가 말한 ‘고질적인 문제들’이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천이 확정된 뒤 윤교수에게 선거브로커들이 접근했다. 브로커들은 지역구민, 선거운동조직의 생리를 일일이 거론하면서 ‘이 사람은 얼마, 저 사람은 얼마쯤 주면 당선은 문제없다’는 식으로 불법선거운동을 부추겼다. 그의 집과 사무실 등으로 ‘왜 출마하느냐’ ‘출마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등의 협박성 괴전화도 수시로 걸려와 가족까지 불안하게 했다. 결국 그는 가족과 친지들의 의견을 들어 불출마를 결심했다.’
그의 불출마선언 역시 양론에 휩싸였다. “역시 괜찮은 사람이다. 더러운 정치판에 더 휩쓸리지 않고 잘했다” “그렇게 세상물정도 모르고 정치하려 했다는 거냐. 행동이 너무 가볍다”는 칭찬과 비난이 동시에 뒤따른 것.
윤교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동기로 정치를 하려 했을까.그의 출생지는 서울이지만 원적은 충남 예산이다. 그는 서울고와 연세대 의대를 나왔고 같은 대학에서 예방의학을 전공,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77, 78년 미국 미네소타대학 대학원에 유학하면서 그의 인생은 크게 달라졌다. 새로운 분야인 가정의학을 공부하게 됐고 이를 국내에 도입, 국내 가정의학 선구자그룹의 일원이 된 것. 이후 국내에서 가정의학의 수요 급증은 그를 금새 유명의로 만들었다.
여기에다 그는 친절하고 설명을 잘해주는 의사로 환자들로부터 호평받았다. 호남형의 얼굴에다 언변도 뛰어나 방송출연도 잦았고 이내 건강상담의사로 명성을 쌓았다. ‘문장이 되는 몇 안되는 의사’로 꼽혀 여러 신문에 의학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참신한 인물부족으로 고민하는 정치권이 눈독을 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가 97년 대선 당시 DJ보다는 이회창을 선호했다고 알려지면서, 그리고 민주당이 같은 대학 황수관교수를 서울 마포을에 공천하면서 이총재 진영이 몸이 달았다는 후문이다.
어쨌거나 결과론인지는 몰라도 한나라당과 윤교수가 벌인 ‘정치극’은 ‘준비 안된 것’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