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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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에 헤딩하나” 공기업 볼멘소리

경조사비 - 의원 후원회비 등 ‘조달’ 막막… “경영 투명성 제고 위해선 당연” 지적도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7-03-09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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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땅에 헤딩하나” 공기업 볼멘소리
    공기업 임원이라고 해서 주위의 기대 수준이 높은 데다 챙겨야 할 곳도 많은데, 기밀비가 없어지면 연봉 6000만원만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고민입니다.”(한국통신 임원 A씨)

    “아무래도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소관 상임위(정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후원금은 50만원 수준이고, 다른 국회의원들은 20만~30만원으로 때웁니다. 물론 일부 의원들은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기도 하지만 현재와 같은 쥐꼬리만한 기밀비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나마도 기밀비가 아예 없어지는 내년부터가 더 큰 일입니 다.”(한 시중은행장)

    “그동안 관내 관청에 ‘인사’할 때나 노조를 ‘달래기’ 위해 집행부와 고스톱을 칠 때 기밀비를 유용하게 써왔는데, 이마저 없어진다고 하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D그룹 계열사 고위 임원)

    일반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은행이나 공기업 등 법인의 고위 임원들 사이에 요즘 비상이 걸렸다. 특히 홍보담당 등 상대적으로 대외 활동이 많을 수밖에 없는 임원들의 고민은 엄청나다. 그동안 요긴하게 사용해왔던 기밀비가 내년부터 전면 폐지되기 때문이다.

    용돈 안밝히고 쓰는 ‘허가받은 비자금’



    특히 공기업 임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기밀비 폐지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국통신 임원 A씨에 따르면 “일반 기업이야 비자금을 은밀히 조성해 기밀비처럼 쓸 수 있겠지만 감사원 감사에 국회 국정감사까지 받아야 하는 공기업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걱정한다고 해서 뾰족한 대책이 생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중공업 임원 B씨는 “그동안 접대비마저 줄어들어 사람 만나기가 두려웠는데, 내년부터는 기밀비는 아예 없어지고 접대비도 줄어든다고 하니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지금으로서는 일단 부닥쳐보는 것 외에 달리 대안이 없다는 얘기다.

    기밀비란 용도를 밝히지 않고 쓸 수 있는 경비. 증빙자료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허가받은 비자금’이라고 할 수 있다. 공기업 임원들은 그동안 대개 경조사비나 직원 격려금 등으로 기밀비를 사용해왔다. 공기업 임원들의 걱정은 아직도 기밀비에 대한 이런 ‘수요’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년부터 없어지게 되는 데 있다.

    한국중공업 임원 B씨를 보자. 대외활동을 주로 하는 그는 결혼 시즌이었던 9, 10월에 각각 60만원 정도의 경조사비를 지출했다. 물론 이 가운데 일부는 개인 돈으로 부담했지만 회사 업무와 관련있는 인사들에 대한 경조사비는 기밀비로 충당했다. B씨는 “우선 경조사비를 줄일 생각”이라고 말했다.

    회사 업무와 관련해 저녁 접대 약속이 많은 한국전력 고위 임원 C씨. 그는 “단골 음식점 종업원에게 팁을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밤 늦게까지 대기해야 하는 업무용 차량 기사에게 택시비도 주기 힘들게 돼 공기업 임원으로서 권위가 서지 않을 것 같다”고 투덜거렸다.

    공기업의 한 고위 임원은 “당장 내년부터 국회의원 후원회비 조달이 가장 큰 문제”라고 토로했다. “사장은 말할 것도 없고 임원 인사도 정치권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합법적인 뇌물’ 이나 마찬가지인 후원회비를 꼬박꼬박 챙겨주는 데 기밀비가 큰 도움이 됐는데,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그렇지 않아도 공기업 임원들은 이미 작년부터 기밀비가 대폭 줄어들어 ‘불편’을 겪어왔다고 호소한다. 한 공기업의 홍보담당 임원은 “97년까지만 해도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사장에게 말해 기밀비를 얻어쓸 수도 있었으나 작년부터는 사장도 기밀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밀비좀 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고 밝혔다.

    공기업의 기밀비가 감소한 것은 정부가 97년말 법인세법 개정을 통해 그동안 일정 한도내에서 손비(損費)로 인정해주던 기밀비를 2000년에 완전 폐지를 목표로 단계적으로 축소해왔기 때문. 이에 따라 97년까지만 해도 접대비 한도의 30% 수준까지 손비처리됐던 기밀비가 작년에는 20%, 그리고 올해는 10% 수준으로 각각 줄었다.

    법인세법은 접대비를 기밀비를 비롯한 교제비, 사례금, 기타 명목 여하를 불문하고 이와 유사한 성격의 비용으로, 법인이 업무와 관련해 지출한 금액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기업의 경우 대개 일반 법인 접대비 한도(1200만원+매출액의 0.04%)의 70%를 손비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독과점적 지위의 공공법인의 경우 민간 기업과 달리 접대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을 감안한 조치다. 다만 포항제철과 한국중공업 등은 상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일반 법인과 같은 접대비 한도 규정을 받는다.

    공기업의 재무제표를 보면 기밀비가 어느 정도 줄어들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국내 최대의 공기업 한국전력의 기밀비는 97년 13억3732만원에서 작년 5억5146만원으로 대폭 줄었다. 올 상반기에는 1억1962만원을 지출했다. 포항제철의 경우 97년 27억9910만원이던 기밀비가 작년에는 16억7146만원으로 줄었고, 올 상반기에는 고작 7억2537만원을 기밀비로 지출했다. 또 한국통신은 97년 9억100만원에서 작년 6억700만원으로 감소했다. 올 상반기에는 1억6700만원을 기밀비로 썼다.

    기밀비는 공기업에 따라, 그리고 사장에 따라 사용방법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지방에 전화국이 많은 한국통신의 경우 이들 전화국장에게도 일정액의 기밀비를 할당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작년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난 대로 포항제철 김만제전회장처럼 작년 3월 주총에서 퇴임할 때까지 작년도 기밀비 7억1000만원 가운데 6억4000만원 정도를 미리 써버린 경우도 있다.

    많은 사람이 기밀비의 폐해로 공기업 최고 경영자들이 개인적 용도로 쓰거나 음성적 로비를 위해 정치권에 뿌리는 점을 든다. 실제 작년 감사원의 공기업 감사에서 이런 사실이 적발되기도 했다.

    포항제철 김만제전회장은 기밀비 4억2415만원을 자신과 가족 명의의 증권사 계좌에 넣어두고 채권 매입에 사용한 사실이 밝혀져 기밀비 횡령 및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되기도 했다. 당시 감사원은 김전회장이 97년 대선 당시 기밀비로 한나라당에 선거자금을 제공한 게 아닌가 하는 점을 집중 추적했으나 이 부분에 관해서는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기밀비로 대선자금을 충당한 사실이 밝혀진 경우는 한국통신 이모 전무가 대표적. 감사원은 작년 6월 이전무가 은행 대출로 조달한 대선자금 1억원을 갚는데 기밀비를 사용한 사실을 적발했다. 이전무는 97년 12월초 안기부 간부의 압력을 받고 국민은행에서 1억원의 신용대출을 받아 이를 한나라당에 대선자금으로 전달한 뒤 이 가운데 일부를 기밀비로 갚아오다 적발된 것.

    감사원은 작년 한국통신 포항제철 등 공기업 감사 결과 기밀비의 이런 문제점을 밝혀내고 기밀비 폐지를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정부가 내년부터 기밀비를 폐지하기로 97년말 결정한 것도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접대비의 건전한 사용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기밀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인정되는 경비였다.

    하승수변호사는 “한국에 진출하는 외국기업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기밀비”라며 “정부가 뒤늦게나마 기밀비를 폐지하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프랑스계 직접투자 법인인 로디아 코프랑 이효봉사장은 “프랑스 본사에서 한국 실정을 인정해줘 기밀비를 쓸 수 있지만 그 수준은 극히 제한적”이라며 정부의 기밀비 폐지 결정을 환영했다.

    공기업 임원들 역시 기밀비의 폐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기밀비 폐지 방침에는 적극 공감한다. 그러나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접대문화나 관행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공기업 기밀비만 갑자기 없애버리면 그에 따른 부작용이 오히려 더 클 수 있다는 것. ‘힘있는 곳’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 공기업에만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항변도 들린다.

    이런 점에서 “기밀비 폐지로 인해 예산의 편법적인 집행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한전 관계자의 지적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공기업 자회사 사장을 역임한 한 인사는 “과거에도 기밀비가 부족하면 가짜 영수증으로 처리해 왔는데, 기밀비가 없어지는 내년부터는 이런 회계처리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인사는 또 “공기업의 경우 협력업체가 많기 때문에 기밀비 조달을 협력업체에 떠넘김으로써 협력업체가 죽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치권이나 우리 사회가 기업에만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 일 수 있다. 물론 사회가 투명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데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기업만의 노력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밀비가 필요없는 분위기가 조성되려면 기업을 둘러싼 외부집단의 개혁이 필수적이다.

    “냄새는 나는데…” 물증 없이 심증만

    부처 “있을 수 없는 일” 반발 속 시민단체선 “구멍 있다” 주장


    정부 부처 기관장에게도 공기업의 기밀비처럼 증빙없이 쓸 수 있는 경비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재로선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태다.

    우선 기획예산처 고형권서기관은 “기밀비란 세법에 규정돼 있는 계정과목이기 때문에 공직 사회의 경우 증빙자료 없이 지출할 수 있는 경비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밀비와 유사한 성격의 경비로 업무추진비가 있긴 하지만 이의 사용마저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는 것.

    기획예산처 유성걸 공공1팀장도 “모든 것을 국제 기준에 맞춰 투명하게 처리하자는 마당에 공기업에서 기밀비 폐지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지적했다. 가령 경조사비만 해도 공무원들은 이미 개인 돈으로 부담하고 있는데 공기업이라고 해서 기밀비를 경조사비로 지출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

    그러나 정부 각 기관장 판공비 공개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시민단체 참여연대의 회원조직 ‘나라 곳간을 지키는 사람들’ 고문 하승수변호사는 “올해 개정된 감사원의 계산증명 규칙에는 경비를 지출할 때는 원칙적으로 신용카드를 사용하도록 하고 불가피한 경우 예외로 한다고 규정돼 있어 공기업의 기밀비처럼 기관장이 증빙 없이 판공비를 지출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현재 검증되지 않은 상태. 정부 각 기관장의 판공비 사용 명세가 공개된 적이 없기 때문. 그런 점에서 참여연대가 납세자인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작년 11월20일 서울시를 시작으로 정부 각 기관장의 예산서상 판공비(기관장을 비롯한 각 직급의 업무추진비 및 특수활동비 등) 관련 명세 전체를 증빙과 함께 공개할 것을 요구하는 정보공개 청구를 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시를 비롯한 각 기관에서는 결코 이에 응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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