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ambition)이냐, 영혼(soul)이냐.민주당의 정치 초년생들인 하원 초선 의원들은 요즘 고민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앨 고어 부통령과 빌 브래들리 전 상원의원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지지할 것인지를 놓고 한창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앨 고어가 초선 의원들에게 접근하면서 내놓은 화두는 ‘야망’이다. 야망의 21세기를 뛸 정치 초년생들의 귀에는 솔깃한 화두다. 반면 빌 브래들리는 ‘혼’을 내세우면서 신입생들에게 다가간다. 닳을 대로 닳아빠진 정치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연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브래들리가 내놓은 브래들리다운 또 하나의 역작이다.
고어와 브래들리의 각축전은 점입가경이다.
출발부터 고어는 삐걱거렸다. 부자연스럽고 딱딱한 대중연설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홍보 참모들이 묘수를 짜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포기했다. ‘막대기를 고치려 하다가는 부러지고 만다. 딱딱한 것이 가장 고어답다. 그대로 가자’고 했다. 브래들리가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나긋나긋하지만 신념에 찬 말솜씨와 부드러운 행동거지가 유권자들에게 먹혀들었다.
미국 선거의 알파요, 오메가인 자금조달에서도 고어는 초반부터 브래들리에게 멱살을 잡혔다. 고어는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펑펑 써댔지만, 브래들리는 차곡차곡 모아놓은 돈을 야금야금 썼다.
게다가 고어는 줄곧 클린턴 부부의 악몽에 시달렸다. 여기저기 지방을 누비고 다녔지만 언론은 늘 고어의 나들이보다는 힐러리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고어가 분통 터지는 나날을 보내는 동안 브래들리는 별 부담 없이 차근차근 전진을 계속했다.
고어는 결국 클린턴과의 작별을 고했다. 더이상 머뭇거렸다가는 이른바 ‘클린턴 후유증’으로 그대로 주저앉고 말 판국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선거 진영 내부의 인사문제로 곤욕도 치렀다. 선거 본부를 고향으로 옮겼지만 여론을 반전시키기에는 역부족.
결국 브래들리가 앞섰다는 여론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민주당 내부에서는 동요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고어는 반전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민주당의 최대 지지 기반인 미 노동 연맹 산업계 회의 (AFL-CIO)의 지지를 받아낸 것이다. 브래들리가 주춤할 수밖에 없다.
엎치락뒤치락하는 고어와 브래들리의 민주당 내 각축전은 초선 의원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들의 어깨 위에 놓인 짐은 고어의 야망이냐, 브래들리의 영혼이냐의 양자택일이다. 살고 싶으면 나를 따르라는 식 의 정치판과는 최소한 겉모양새부터가 다르긴 하지만, 현실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민주당 하원의 초선 의원은 23명. 이 가운데 오로지 7명만이 자신의 의사를 밝혔을 뿐이다. 그만큼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증거다. 의사를 밝힌 7명은 초지일관 앨 고어 편을 드는 사람들이다. 일반 여론과는 달리, 브래들리를 지지하고 나선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워싱턴에 발을 들여놓은지 얼마 안되는 정치 초년생들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극도로 몸을 사린다.
뉴욕 웨체스터에서 민주당 언론 자문역을 맡고 있는 피터 버넘은 “그들은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지 그걸 지켜보는 중”이라고 평한다. 버넘은 요즘 조언을 구하기 위해 자기를 찾아오는 민주당 정치 초년생들에게 자문해 주고 있다. 그가 살펴본 민주당의 정치 초년생들은 대부분 ‘가만히 제자리에 선 채로 안개가 걷히기만을 기다리는 관망자’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지도자의 분노를 자초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들로서는 어려운 선택일 수밖에 없다.”
콜로라도 주 출신 마크 유댈 의원의 경우 역시 진퇴양난의 기로에 서 있다. 애리조나 주의 민주당 하원의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40년대 후반에 코트를 누비던 농구선수였다. 같은 농구 선수였던 브래들리와 유댈 의원 부자는 거의 한가족처럼 지냈던 사이. 유댈 의원은 고어와 브래들리 양쪽으로부터 지지요청을 받았다. 브래들리는 아주 부드러웠고, 고어는 완곡했다. 두 사람 모두 자기에게 이렇다 할 압력을 행사하지는 않았고, 그 점을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그러나 유댈은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입장이다. “때가 오면 선택하겠다. 잠시 시간을 갖고 뒤로 물러서서 경중을 재볼 참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색채의 미시시피 주 출신인 로니 쇼 의원은 보수적인 지역 라디오 방송의 토크쇼 에서 진땀을 흘렸다. 대통령으로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을 그는 이렇게 피해 나갔다. “나는 내 지역구 선거에만 신경쓸 뿐이다.”
그는 정치판에 뛰어든지 20년이 넘는다. 그동안 배운 게 있다면 다른 사람의 선거에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미시시피는 보수적인 곳이다. 누가 내 지역구의 관심사에 근접하는지 보고 나서 판단할 것이다.”
민주당 선거 진영의 한 참모는 “지역구를 가진 하원 의원 개개인은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먼저 구축하려고 한다. 더구나 정치 초년생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 확립이 우선 과제다. 함부로 나서서 정치를 논했다가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기도 전에 다치고 만다”고 지적한다.
뉴저지의 루시 홀트 의원도 이런 불문율을 충실하게 따르는 정치 초년생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의 수석 보좌관인 스티븐 마빌지리오는 “우리 지역구에서의 경쟁이 더 치열하다. 지역구에서는 가능하면 워싱턴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워싱턴 주의 브리안 배어드 의원 역시 고어나 브래들리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를 자제하고 있다.
“내가 해야 할 가장 큰 임무는 내 지역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이며, 그것이 나의 최대 관심사다.” 자칫 후보자에 대해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정치적 재앙을 가져오기가 일쑤라고 지적하는 배어드 의원은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확립시킬 필요가 있다. 누구를 지지하는지는 여기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공화당 강세 지역의 지역구를 가진 민주당 초년생들은 더욱 조심스럽다. 민주당 지도부도 정치 초년생 들의 이런 고민을 십분 이해한다. 그러기에 ‘부드럽게’ 혹은 ‘완곡’하게 이들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고어냐, 브래들리냐를 놓고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는 이들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정치적 생존의 법칙은 아주 간단하다. ‘지역구 대의원에게 표를 던져라. 그리고 너의 양심에 투표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선택해야 한다. 그러기에 민주당 정치 초년생들이 마치 대통령선거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