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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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길을 잃다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1-07-04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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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던 젊은 여인이 사장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우연히 이를 목격한 여인의 남편은 분노하지만, 아내가 임신하자 자녀가 없는 사장에게 아이를 낳아주겠다며 거액을 요구하죠. 아이를 얻기로 결심한 사장은 애지중지 임신부를 보살피고, 그사이 사장 아내는 임신부의 남편과 바람을 피웁니다. 마침내 태어난 아기는 과연 누구의 아이일까요.

    주말 저녁 본 ‘로스트 인 베이징(Lost in Beijing)’이라는 영화에서 압권은 단연 홍콩배우 량자후이(梁家輝)의 놀라온 연기였습니다. 금목걸이를 매달고 원색 와이셔츠를 풀어헤친 전형적인 중국 졸부. 1992년 영화 ‘연인(L’amant)’에서 뭇 여성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기품 넘치는 청년 부호라는 사실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량자후이의 그 비루하면서도 오만한 연기는 1999년 한국 영화 ‘세기말’에 출연한 배우 이호재의 그것과 닮아 있습니다. 성(性)과 도박을 팔아 일군 풍요로 욕망의 끝을 향해 달리는, 도덕률 따위는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선언하는 바로 그 얼굴 말입니다.

    10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차를 두고 한국과 중국에서 만든 영화의 이러한 기시감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자본주의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사회라면 피할 수 없는 이미지라고나 할까요. ‘로스트 인 베이징’에 등장하는 가난한 노동자 부부의 슬럼가 아파트와 사장의 벤츠 승용차가 이를 단번에 보여줍니다. 그 부(富)를 아무런 정당성 없이 쌓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기시감의 가장 첨예한 리얼리즘이겠죠.

    베이징에서 길을 잃다
    많은 이가 ‘중국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를 말합니다. 다른 이는 중국의 국내 문제가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는 중국이 ‘졸부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계속 번영을 구가하는 것입니다. 대륙 미래에 한반도 미래가 긴박하게 엮여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니까요. 서울은 이제 ‘세기말’의 그 비린내 나는 얼굴을 벗어던진 걸까요. 중국은 ‘로스트 인 베이징’의 아이러니한 절망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 모습 그대로를 물려받은 아이는 과연 누구의 아이고,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영화를 보는 짧은 시간, 생각은 한없이 번져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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