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3

2010.06.28

장순왕후와 자매간 요절에 후손 못 남긴 것도 닮아

성종 비 공혜왕후의 순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06-28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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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순왕후와 자매간 요절에 후손 못 남긴 것도 닮아

    순릉의 능역은 공혜왕후의 품성처럼 포근하고 아름답다.

    순릉(順陵)은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 한씨(韓氏)가 잠든 곳이다. 공혜왕후는 영의정 한명회의 넷째 딸로, 같은 파주 삼릉지구 북서쪽에 있는 공릉의 주인인 장순왕후와 자매간이다. 공혜왕후는 왕비로 책봉된 지 5년 만에 슬하에 자식도 없이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순릉은 한북정맥(漢北正脈·강원과 함남의 도계를 이루는 평강군 추가령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한강과 임진강 입구에 이르는 산줄기의 옛 이름)에서 이어지는 명봉산을 주산으로 하는 파주 삼릉지구에서도 가운데 긴 장룡의 능선 끝자락에 묘좌유향(卯坐酉向·동향에서 서향)을 하고 있다.

    세조 13년(1467) 1월 12일 자을산군(성종)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8남(막내)인 영웅대군의 집에서 한명회의 넷째 딸을 친영했다. 재종친(再宗親)과 상정소(조선시대 국가의 법규·법전을 제정하거나 정책과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가 위요(圍繞·혼인 때 가족 중 신랑이나 신부를 데리고 동행하는 사람)했다.

    한명회 넷째 딸 … 정희왕후 덕에 왕비로

    1469년 11월 28일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즉위한 다음 날, 공혜왕후는 어찌 된 일인지 궁궐을 나가 사가에 한참 머물다가 1월 19일에야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로 책봉됐다. 임신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왕비 책봉 때 책문에 “그대 한씨는 선을 쌓은 명문 원훈벌족으로 부지런하고 검소한 덕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유순하며, 성품이 타고나고 부도의 예를 갖추었다”고 했다. 왕비가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죄인을 용서하는 것)를 했다.

    사실 공혜왕후는 왕비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예종의 원손이 있었으며, 의경세자와 인수대비 사이에 손위의 월산대군이 있었으니 자을산군은 왕위 계승 순위에서 한참 밀렸다. 만약 자을산군을 후계자로 지목한 할머니 정희왕후가 아니었다면 왕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혜왕후는 임금에게 “정원(庭園)에 옥책을 펼쳐 남다른 은총을 밝게 보이시어, 중궁의 자리에 있게 되니 실로 저의 분수에 넘치는 일이므로 놀라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으며, 감격함이 참으로 깊습니다”라고 했다. “번저(藩邸·사가)에서 집 안의 빗자루를 들고 오로지 음식 만드는 데만 부지런할 줄 알았지 임금의 짝이 되어 왕가를 다스리는 덕이 부족한데 어찌 적의(翟衣·꿩이 그려진 왕비 옷)를 입는 영광에 응하겠습니까? 주상 전하께서 덕이 하늘과 땅에 화합해 밝음이 해와 달을 아울러 왕화(王化·임금의 덕행으로 감화)하고, 예의 모범을 계명(鷄鳴·시경의 편명, 제나라 현비가 애공에게 정사를 부지런히 할 것을 경계한 노래)에서 본받겠으며, 왕가와 나라를 일으키고 교화해 휘음(徽音·좋은 평판)을 듣게 하고 인지(麟趾·시경의 편명, 훌륭한 자손을 낳기를 기리는 노래)를 잇겠습니다”라고 사은의 전문을 올렸다.

    이때 백관들이 “중궁 전하께서 단정하고 장중하고 정숙하시며, 부드럽고 아름다우시며, 온화하고 공순하시고, 선대왕비(세조비, 덕종비, 예종비)에 효도하고 왕을 도와 본손과 지손이 백세토록 번창하고 화봉(華封)의 삼축(三祝)을 본받아 오래 사시기”를 비는 하례를 올렸다.

    장순왕후와 자매간 요절에 후손 못 남긴 것도 닮아

    참배로가 하나뿐인 순릉의 제향공간. 제대로 된 능이라면 어로와 신로가 따로 있어야 한다.

    왕비 책봉 한 달 후 친정에 거둥(임금이나 왕비의 나들이)했다. 북쪽 마당에 장전(帳殿)을 치고 중궁은 서쪽의 붉은 칠을 한 어상(御床)에 앉고, 친정어머니 민씨는 동쪽의 검은 칠을 한 평교에 앉았다. 친정아버지 한명회는 임금이 내린 선온(宣·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4일 중궁이 선정전에서 백성에게 양로연을 베풀었고, 10월 11일 중궁의 생일을 맞아 의정부와 육조에서 표리(表裏·옷의 겉감과 안감, 즉 선물)를 올리고 임금이 백관을 불러 음식을 대접했다.

    예의 바르고 효성 지극 삼전의 귀여움 받아

    그러나 왕비 책봉 3년 6개월 무렵 중궁이 병석에 눕자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의 매일 왕과 백관이 문안하고, 7월 30일 왕의 생일잔치까지 물리고 중궁을 간호했다. 이후 환궁을 했지만 왕비의 병치레는 계속됐다. 결국 성종 5년(1474) 4월 15일 오전 10시 무렵, 왕비가 구현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불과 19세였다. 왕실 생활에 대한 부담이었을까? 아니면 시할아버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주동했던 아버지 한명회의 죗값을 치른 것일까? 안타깝게도 한명회가 정략적으로 왕비를 만든 두 딸은 모두 요절했고 후손도 남기지 못했다.

    예조에서 국상의 예를 발표하는데 세종비인 소헌왕후의 예를 따르도록 했다. 이 기간에는 혼례를 금하고 음악을 쓰지 않으며, 도살을 금하고 5일간 시장을 열지 않았다. 신하들이 시호를 올릴 때 공경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의 ‘공(恭)’과,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의 ‘혜(惠)’라고 했다. 능호는 순릉이라 했다. 그의 시숙모였던 친언니 장순왕후가 13년 전 안장된 공릉 부근을 정인지, 신숙주, 정창손, 서거정 등이 살피고 공릉 도국 안의 을방(乙方)으로 내려온 묘좌유향에 터를 잡았다.

    병조판서인 한명회가 늙음을 이유로 사면(辭免·맡아보던 자리를 물러남)을 요청하나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한명회를 좌의정에 제수했다. 한명회는 딸의 빈전에 진향하고 장례를 치렀다. 순릉의 조영 감독은 아버지 한명회가 했다.

    공혜왕후는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삼전(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 착한 공혜왕후는 성종이 연산의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궁에 들여도 개의치 않고 투기의 기색도 없이 직접 옷을 지어주고 패옥을 하사하는 등 덕을 보였다 한다. 그러나 중궁으로서 자식을 낳지 못한 것이 마음의 짐이 된 데다 삼전을 모시는 과중한 업무까지 더해진 것이 요절의 원인이었을지 모른다.

    공혜왕후릉에는 병풍석은 없고 난간석만 둘러쳐 있다. 전체적인 상설제도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이므로 공릉에 비해 구성물이 많고 정교하다. 정자각 오른쪽에 있는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공혜왕후의 비가 있다. 비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 쓰여 있다. 순릉의 비각은 공릉과 같이 순조 17년(1817)에 세운 것이다.

    순릉의 장명등은 공릉의 것과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옥개석을 제외하고는 화사석(火舍石)과 대석(臺石)이 한 돌로 돼 있다. 대석과 화사석은 복련(伏蓮)과 앙련(仰蓮)이 표시돼 있고, 화사석에는 4각창이 뚫려 있다. 순릉의 장명등은 공릉의 것처럼 8각으로 돼 있어 조선 전반기 장명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난간석주의 원수(員首)나 동자석주의 형태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을 따랐으며, 고석의 나어문두(羅魚文頭)도 비슷하다. 문무석인은 좌우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능침에서 문석인은 중계(中階)에, 무석인은 하계(下階)에 세워지는 구성 요소다. 순릉의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근엄하고 수염이 팔자형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이다.

    장순왕후와 자매간 요절에 후손 못 남긴 것도 닮아

    1 능에서 공혜왕후의 효의 정신을 공부하는 어린이들. 2 순릉의 고석. 3 일반 능원보다 투박하고 작은 배위(절을 하는 자리).

    100여m 거리 두고 시숙모와 조카며느리 관계

    성종 때 능역 주변에서 사냥을 하니 노사신이 선왕, 선후의 체백을 간직한 능원에서 타위(打圍·사냥)함은 상례로서 배알하고 돌아서서 짐승을 쫓는 것이니 의리에 부끄러운 일이라며, 당나라 때 전쟁하다 포위돼 위급한데도 건릉(고종과 측천무후릉)을 지날 때 능침이 놀랄까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어 능역에서 사냥을 금하도록 제청해 그대로 했다. 이런 연유에서 조선시대 왕릉의 능침 공간은 선왕의 절대적 성역의 공간으로 현세의 왕도 함부로 진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문화재청에서는 능침 공간의 보존을 이유로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최근 능침의 봉분과 석물을 감상하기 위한 개방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재로서 보존 가치가 높고, 많은 석물 조각이 노후하고 산화돼 훼손됐음을 고려할 때 제한적 입장이나 영상 감상으로의 대체와 같은 대책이 필요하다. 세계문화유산이 됐으니 더욱 보존 대책을 세워야 한다.

    순릉의 정자각 앞에는 일반 능역에 있는 신로와 어로가 아닌 한 개의 참배로만 있다. 원형이 아닌 듯하다. 이 역시 원형 보존이 필요하다. 배위석도 규모가 작다. 흔적이 있는 수복방과 수라간도 복원해야 한다.

    ‘춘관통고’(1788)에 재실과 연지가 능원의 오른쪽 언덕 너머에 있다고 기록됐으나 고증과 발굴 복원이 아쉽다. ‘춘관통고’에 따르면 공릉과 순릉은 주변 둘레가 24리에 이른다고 하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왕실 재산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많은 면적을 상실했다. 1930년경 공릉과 순릉 도면을 보면 공릉이 三町八反七苗六步(3만4268평·11만3280여㎡)이며, 순릉과 영릉은 七町六反四步(2만2900평·7만5700여㎡)로 축소하고, 이 밖의 지역을 동양척식회사(大賢農林部)에 임대해 조선시대 내내 잘 가꿔온 송림을 남벌했다. 이 송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숲이 됐을 것이다.

    자매였던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궁에 들어가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 관계로 살다가 죽어서는 500년간 100여m 거리를 두고 각기 다른 언덕에서 지내왔다. 그러나 두 자매 능인 공릉과 순릉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능선 사이에 관통도로가 생겨 끊어지고 말았다. 이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복원이 절실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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