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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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 이명재 자유기고가

    입력2009-01-07 18: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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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영화 ‘버드가의 섬’(위)과 ‘쉰들러 리스트’의 한 장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거주구역. ‘게토’라고 불리는 이곳에 독일군을 피해 홀로 숨어 사는 열한 살 사내아이가 있다. 가족이 모두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고 폐허가 돼버린 집에 혼자 남겨진 알렉스. “꼭 다시 돌아올 테니 살아남아 있어라”는 아버지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버티지만 언제 나치에게 들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혼자 고립된 아이가 매 순간 감당해야 할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알렉스는 결국 전쟁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훗날 작가가 돼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책으로 써낸다. 1990년대 말 영국과 독일 등이 합작한 영화 ‘버드가의 섬’은 알렉스의 이 책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그 자신이 유대인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을 꼽으라면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끌려가는 가운데 나치가 여자아이 하나를 쫓는 장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는 이 소녀의 뒤를 계속 따라가는데, 흑백 화면 속에서 이 소녀의 자주색 옷 색깔만 선명하게 두드러진다. 카메라는, 또 그 카메라를 따라가는 관객은 자주색 옷의 소녀만은 살아남기를 간절히 기원하게 되지만 결국 소녀의 운명은 시체 리어카에 내던져지는 장면으로 끝나고 만다.

    유대인 소년 알렉스의 유년의 기억이나 ‘쉰들러 리스트’에서 소녀의 죽음은 유대 민족의 수난을 특히 절절하게 보여준다. 어린이에게 닥친 재난과 비극은 다른 어느 불행보다 큰 슬픔과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그것은 단지 슬픔이나 연민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슬픔 이상의 것, 예컨대 어른이라면 자신에게 직접적인 책임은 없더라도 그 자신이 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 자체가 깊은 죄책감을 갖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으로 희생자가 대거 발생하는 가운데 어린이들의 희생이 잇따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 그로 인한 어린 생명들의 죽음은 비운의 민족 유대인이 세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새삼 생각게 한다. 민간인과 어린이들이 무고하게 죽는 상황에도 이스라엘 국민의 81%가 가자지구 공습을 지지했다는 뉴스까지 겹치면 그 생각은 더욱 착잡해진다.

    한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숨진 세 어린이의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는 사진이 외신을 타고 어느 신문에 실렸다.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압축하는 장면이었다. 죽은 ‘어린이들’이나 그 어린이들의 친구일지 모르는 ‘살아 있는 어린이’ 모두 알렉스, 자주색 옷의 소녀와 무엇이 다를까.



    그러나 81%가 공습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국민의 눈에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눈물,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오열과 비탄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영토분쟁 중인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의 희생자에서 이제 가해자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또 다른 알렉스, 팔레스타인 아이의 눈망울이 그렇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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