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7

2007.10.23

미·중 석유 사재기 유가 폭등 부채질

전략비축유 확보 경쟁 탓 … 이란 핵 등 정치학적 변수도 많아

  • 김현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입력2007-10-17 1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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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중 석유 사재기 유가 폭등 부채질

    국제 유가의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 사진은 원유를 생산 중인 브라질의 한 광구.

    최근 국제 유가가 다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10월 이후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가격은 배럴당 80달러 초반에서, 두바이유 가격은 70달러 중후반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2002년 초반까지 두바이유 기준 배럴당 20달러 전후를 유지하던 국제 유가가 불과 5년 만에 3배 이상 치솟은 것이다.

    “세계경제 성장세 약화 땐 투기성 거품 붕괴” 주장도

    타이트한 석유 수급 상황이 개선되지 못하는 가운데 ‘이란 핵문제’ ‘기타 산유국의 공급 불안’ ‘미국 휘발유 시장의 공급 차질 우려’ 등 3중 악재가 유가 상승에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국제 석유시장으로 몰려든 투기자금이 가격 상승폭을 더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석유시장의 뇌관이라 할 수 있는 이란 사태 같은 지정학적 불안이 악화된다면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리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으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까지도 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지금의 유가 수준은 거품이며, 세계경제의 성장세가 약화돼 투기성 거품이 꺼지면 급락 가능성이 있다는 상반된 견해도 나온다.

    이처럼 석유시장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난무하는 현시점에 석유시장의 향방을 예측하려면, 수급통계의 이면에 숨어 있는 석유시장의 구조 변화 및 석유시장을 움직이는 주요 플레이어들의 전략과 행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석유시장의 주도권 변화에 주의해야 한다. 20세기 석유시장의 주도권은 석유메이저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로, 그 후 소비국으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는 ‘Seven Sisters’로 통칭되던 석유메이저가 시장을 지배해오다 73년 1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주도권이 OPEC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얼마 뒤 산유국 간 증산 경쟁이 가열되면서 OPEC은 분열하고 시장 지배력을 잃었다. 그 결과, 86년 유가 대폭락을 계기로 2000년대 초반까지 15년 이상 배럴당 10~20달러대의 저유가 시대가 지속됐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뚜렷한 주도 세력 없이 소비 측면에서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 에너지 소비국이, 공급 측면에서는 OPEC과 석유메이저가 치열하게 경쟁하며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처럼 특정 시장 지배자가 존재할 경우에는 유가가 이들의 목표와 전략에 의해 결정되지만, 지금 같은 석유시장 구조에서는 국제 유가의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고조돼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국제 유가의 향방을 예측하려면, 이들 주요 플레이어가 국가 안보나 경합자를 견제하기 위해 선택하는 전략과 행태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최근 미국, 중국, OPEC, 석유메이저들의 전략과 행동이 석유시장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첫째, 소비 측면에서는 미국 중국이 석유 확보를 위한 경쟁을 계속해나감으로써 유가 안정이라는 소비국 공통의 이해를 충족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양국 모두 국내의 석유 수급 불균형이 심화되는 데다 대외 의존도도 높아지고 있어, 석유의 안정적 확보를 국가 전략의 최우선 과제로 삼기 때문이다.

    한 예로, 미국은 2001년 9·11테러 이후 2005년까지 국제 유가가 급등하는 와중에도 전략비축유(SPR·Strategy Petroleum Reserve)를 1억 배럴이나 사들여 2005년 8월 모두 7억 배럴까지 확충했다.

    에너지 부족이 심화되고 있는 중국은 정부의 암묵적 합의 아래, 시장가격을 도외시한 채 국영석유회사들을 앞세워 유전 및 가스전을 닥치는 대로 확보 중이다. 이 같은 중국의 사재기로 생산 유전의 경우 불과 몇 년 만에 가격이 3~4배 이상 폭등했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은 국제유가 안정이 모두에게 유리하고 필요함에도 상호간에 불신을 바탕으로 ‘가격’보다 ‘확보’를 우선시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일종의 ‘죄수 딜레마’ 상황으로, 당분간 상호협력을 기대하긴 어려울 듯하다.

    완만한 상승으로 경제에 미치는 충격 아직은 크지 않아

    둘째, 공급 측면에서는 OPEC을 비롯한 자원 보유국들을 중심으로 자원 내셔널리즘이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석유메이저 등 외자계 기업의 자국 진출을 엄격히 제한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

    이로 인해 사상 최대의 수익을 기록 중인 석유메이저들은 산유국의 자원민족주의와 지정학적 위험 증가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석유 공급 여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또한 OPEC은 고유가가 선진국 경제에 큰 타격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목표가격대를 상향 조정하고 있다. 이들은 유가 하락의 기미가 보일 경우, 감산을 통해 가격 하락을 저지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초유의 유가 급등에도 세계경제나 우리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국제 유가가 배럴당 40달러, 50달러를 차례로 돌파할 때마다 나왔던 ‘3차 오일쇼크론’은 어느덧 호들갑이 돼버렸다. 지나친 고유가로 인한 석유 소비 감소를 우려하던 OPEC조차 이제 세계경제는 유가 70달러 시대와 공존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과거 1·2차 오일쇼크가 돌발 상황에 따른 공급 충격으로 초단기간에 유가 급등이 이뤄진 경우라면, 최근 유가는 세계 경제성장에 따른 수요 증가로 비교적 시간을 두고 상승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경제가 유가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둘째, 1·2차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경제가 유가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내성을 키웠다는 점이다. 1970년대에 비해 1차 에너지 소비 가운데 석유 의존도가 감소했으며, 에너지 효율도 개선됐다.

    셋째, 실질가격 및 실질실효가격 기준으로 볼 때 최근 국제 유가는 1·2차 오일쇼크에 비해 낮은 수준이라는 점이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가격 기준으로 본다면, 현재 유가 수준은 2차 오일쇼크 대비 30% 정도 낮다. 나아가 물가상승률과 석유 소비 의존도를 함께 반영한 실질실효가격 기준으로 보면, 현재 유가 수준은 1차 오일쇼크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배럴당 100달러 수준의 고유가 시대는 과연 도래할까.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거나 경제제재를 가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이 석유 감산을 단행할 경우, 또는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경우 유가가 단기적으로 배럴당 100달러 이상 오를 수 있다.

    IEA 회원국들 오일쇼크 대비 90일분 이상의 석유 비축

    하지만 위기 대응 측면에서 볼 때 1·2차 오일쇼크에 비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석유 수요국들이 자국의 비축 능력을 바탕으로 공급 측면의 안전망을 일정 수준 확보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일어난 두 차례의 오일쇼크 이후 석유는 군사적 전략물자로서뿐 아니라 경제안정을 위한 필수 재화로서 각국의 전략적 확보 대상이 돼왔다.

    게다가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6개 회원국에 90일분 이상의 석유 비축을 의무화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회원국들은 현재 40억 배럴의 비축분(이중 14억 배럴이 정부 통제)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공급 차질로 인한 유가 급등시, IEA가 비축유를 방출함으로써 패닉에 따른 추가 급등을 억제하고 공급 부족을 상쇄할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21세기형 석유 위기는 20세기의 석유 위기와 달리 세계경제의 급격한 침체를 동반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우리 경제에 만성적인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2010년 OPEC發 위기 오나

    유가 폭락 걱정에 생산시설 투자 외면


    국제 유가 변동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OPEC이 보유한 여유 생산능력이다. OPEC은 비OPEC 산유국이 모두 공급하고도 부족한 부분을 공급하는, 이른바 세계 석유시장의 잔여공급자(residual supplier)다. 그러므로 OPEC이 보유한 생산시설의 여유 능력은 석유의 수급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된다. OPEC의 여유 생산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석유 공급에 차질이 생겼을 때 이를 대체할 여력이 없음을 의미하므로 유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OPEC의 여유 생산능력은 얼마나 될까. 유가 상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인 2002년 OPEC의 하루 여유 생산능력은 700만 배럴 수준이었다. 하지만 2004년 하루 100만 배럴로 최저치를 기록한 이후 다소 증가했다곤 하지만, 아직도 300만 배럴을 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석유 수요가 하루 8500만 배럴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여유 생산능력은 수요 규모의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여유 생산능력 부족은 산유국의 석유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가 부진한 데다, 세계 석유 수요의 급속한 증가가 생산능력의 여유분을 잠식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OPEC이 보유한 여유 생산능력이 증가해 유가가 안정될 수 있을까? 세계 석유 수요 추이와 OPEC 산유국의 투자 행태를 보면, 여유 생산능력이 단기간 내 크게 증가할 것 같지는 않다.

    먼저 산유국들은 유가 상승으로 벌어들인 오일달러를 자국의 석유 생산시설 건설에 투자하는 대신, 해외 금융자산에 쏟아붓고 있다. 게다가 석유 개발 및 생산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생산량 대비 매장량 비율(R/P ratio)이 하락하면서 산유국이 석유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2차 오일쇼크와 1980년대 중반의 유가 폭락을 경험한 OPEC이 같은 현상에 대한 우려로 석유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것도 문제다. OPEC은 오히려 석유에 편중된 산업구조를 지양하고 산업구조의 다원화를 위해 석유산업 이외의 부문에 재정 지출을 확대하고 있다.

    얼마 전 발표된 IEA의 중기 석유시장 전망 보고서는 OPEC의 여유 생산능력이 2010년 이후 더욱 줄어들고, 그에 따라 석유시장의 수급 상황이 악화되리라고 경고했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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