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말 서울에서는 새삼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 화두가 됐다. ‘아시아적 가치’의 강력한 주창자인 리콴유(李光耀) 전싱가포르총리가 서울을 찾은 게 계기였다.
하지만 논쟁의 대척점에 서있는 김대중대통령(DJ)과 리콴유의 청와대 면담에서 직접 논전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러나 서로 다른 자리(아태민주지도자회의와 전경련국제자문단회의)를 통해 논쟁을 이어갔다. 세계적 논쟁거리인 ‘아시아적 가치’는 숱한 별명을 갖고 있다. ‘권총’ ‘카멜레온’이라 하기도 하고 ‘마법의 주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담론 주체에 따라 너무나 극단적인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논쟁의 역사는 극단을 오가는 반전(反轉)의 연속이었다. 20세기초 제국주의 시기 서양인들은 아시아가 지닌 문화적 특성 때문에 아시아에서는 서양과 같은 경제발전이 일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해 왔다. 막스 베버는 ‘유교는 반자본주의적’이라 단언했다.
리콴유 전총리 방한으로 다시 화두
70, 80년대 동아시아국가들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자 시각이 180도 달라졌다. 허만 칸, 에즈라 보겔 같은 학자들은 유교적 가치가 이 지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해석했다. 유교문화에 내재한 강한 리더십, 높은 교육열, 근검절약 정신 등을 높이 평가한 것.
그러나 97년 아시아에 경제위기가 몰아닥치자 ‘아시아적 가치’는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정경유착, 정실인사, 연고주의, 불투명한 기업운영 등 ‘아시아적 특징’이 위기의 주범이 아니냐는 것.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공동체 중심주의와 권위주의적 위계질서는 합리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 마련을 방해한 독재의 근원”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한국 말레이시아 등이 불과 2년만에 ‘기적적 생환’의 조짐을 보이자 평가는 또다시 달라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아시아적 가치’ 논쟁은 ‘과거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며 21세기 벽두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서구식을 모델로 한 DJ의 경제정책이나 마하티르 말레이시아총리의 권위주의적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찬반론도 이 논쟁의 범주에 속한다. 얼마 전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식 공방전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논쟁이 일반의 관심까지 끌게 된 것은 DJ와 리콴유의 논쟁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설전은 리콴유의 ‘효율적 국가관리론’을 DJ가 ‘독재정권 합리화론’이라 비판하는 양상으로 전개돼 왔다.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94년 3, 4월호에 실린 리콴유와 이 잡지 편집장과의 대담은 ‘아시아적 가치’ 주장자들의 ‘고전’이 돼버렸다. 리콴유는 “문화는 숙명”이라며 “서양식 민주주의와 인권은 문화가 다른 동아시아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동아시아의 정치경제체제를 긍정 평가하면서 서구적 가치관의 위선과 체제의 한계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 DJ(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는 ‘문화는 숙명인가’라는 기고문(‘포린 어페어스’ 94년 11, 12월호)을 통해 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한마디로 “리콴유의 그릇된 주장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DJ의 논지는 이랬다. “동양의 전통사상은 민주주의 이념을 담고 있다. 서양의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은 존 로크보다 2000년이나 앞선 맹자의 주권재민 사상이나 동학의 인내천 사상 등이 그것이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애는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 저항이다.”
이들의 논쟁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리콴유는 98년 2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IMF가 부과한 ‘미국식 조건’을 한국이 무조건 따르는 것은 문제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 전경련국제자문단회의 (10월22일)에서도 재벌의 선단식 경영은 문제나 미국식 처방이 능사는 아니라는 요지로 발언했다.
이에 DJ는 10월25일 아태민주지도자회의 기조연설에서 아시아의 민주주의 사상과 전통을 거듭 강조하면서 권위주의적 통치를 또한번 비판했다(기조연설문 요지 참조).
하지만 논쟁의 대척점에 서있는 김대중대통령(DJ)과 리콴유의 청와대 면담에서 직접 논전은 없었다. 두 사람은 그러나 서로 다른 자리(아태민주지도자회의와 전경련국제자문단회의)를 통해 논쟁을 이어갔다. 세계적 논쟁거리인 ‘아시아적 가치’는 숱한 별명을 갖고 있다. ‘권총’ ‘카멜레온’이라 하기도 하고 ‘마법의 주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담론 주체에 따라 너무나 극단적인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논쟁의 역사는 극단을 오가는 반전(反轉)의 연속이었다. 20세기초 제국주의 시기 서양인들은 아시아가 지닌 문화적 특성 때문에 아시아에서는 서양과 같은 경제발전이 일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해 왔다. 막스 베버는 ‘유교는 반자본주의적’이라 단언했다.
리콴유 전총리 방한으로 다시 화두
70, 80년대 동아시아국가들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자 시각이 180도 달라졌다. 허만 칸, 에즈라 보겔 같은 학자들은 유교적 가치가 이 지역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됐다고 해석했다. 유교문화에 내재한 강한 리더십, 높은 교육열, 근검절약 정신 등을 높이 평가한 것.
그러나 97년 아시아에 경제위기가 몰아닥치자 ‘아시아적 가치’는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정경유착, 정실인사, 연고주의, 불투명한 기업운영 등 ‘아시아적 특징’이 위기의 주범이 아니냐는 것.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공동체 중심주의와 권위주의적 위계질서는 합리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 마련을 방해한 독재의 근원”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한국 말레이시아 등이 불과 2년만에 ‘기적적 생환’의 조짐을 보이자 평가는 또다시 달라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아시아적 가치’ 논쟁은 ‘과거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며 21세기 벽두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서구식을 모델로 한 DJ의 경제정책이나 마하티르 말레이시아총리의 권위주의적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찬반론도 이 논쟁의 범주에 속한다. 얼마 전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식 공방전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논쟁이 일반의 관심까지 끌게 된 것은 DJ와 리콴유의 논쟁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설전은 리콴유의 ‘효율적 국가관리론’을 DJ가 ‘독재정권 합리화론’이라 비판하는 양상으로 전개돼 왔다.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94년 3, 4월호에 실린 리콴유와 이 잡지 편집장과의 대담은 ‘아시아적 가치’ 주장자들의 ‘고전’이 돼버렸다. 리콴유는 “문화는 숙명”이라며 “서양식 민주주의와 인권은 문화가 다른 동아시아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동아시아의 정치경제체제를 긍정 평가하면서 서구적 가치관의 위선과 체제의 한계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 DJ(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는 ‘문화는 숙명인가’라는 기고문(‘포린 어페어스’ 94년 11, 12월호)을 통해 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한마디로 “리콴유의 그릇된 주장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DJ의 논지는 이랬다. “동양의 전통사상은 민주주의 이념을 담고 있다. 서양의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은 존 로크보다 2000년이나 앞선 맹자의 주권재민 사상이나 동학의 인내천 사상 등이 그것이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애는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 저항이다.”
이들의 논쟁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리콴유는 98년 2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IMF가 부과한 ‘미국식 조건’을 한국이 무조건 따르는 것은 문제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 전경련국제자문단회의 (10월22일)에서도 재벌의 선단식 경영은 문제나 미국식 처방이 능사는 아니라는 요지로 발언했다.
이에 DJ는 10월25일 아태민주지도자회의 기조연설에서 아시아의 민주주의 사상과 전통을 거듭 강조하면서 권위주의적 통치를 또한번 비판했다(기조연설문 요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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