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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Asia 주간동아 특약

“日 보수층 여전히 득세 우향우 멈추기 쉽지 않다”

일본 학자가 본 우경화 행보 “국제사회 신뢰 회복 노력 기회 올 것”

  • 소에야 요시히데 일본 게이오대 교수·우드로윌슨센터 일본지역 연구원 번역·강찬구 동아시아재단 간사 ckkang@keaf.org

“日 보수층 여전히 득세 우향우 멈추기 쉽지 않다”

냉전이 끝난 직후인 1990년대 초반 일본은 침략 역사가 지역 내 국가들에게 남긴 불신을 해소하려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2000년대 이후 일본 정계를 장악한 보수정파와 국가주의 진영에 의해 모두 과거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연일 뚜렷해지는 일본의 우경화 행보는 과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영문계간지 ‘글로벌아시아’ 2013년 가을호는 일본의 저명한 전문가 기고를 통해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돌이켜보면 1991년 걸프전은 일본 외교의 전환점이었다. 탈냉전기라는 새로운 시대 질서가 과제로 주어졌다. 당시 일본은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몰아내려고 뛰어든 다국적군에 130억 달러 상당의 금전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그 외에는 의미 있는 수준의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강한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소외감과 무력감을 절실히 느껴야 했고, 재정 문제 외에는 어떤 수단도 택할 줄 모르는 ‘장부 외교’라는 조롱을 감수해야 했다.

‘국제주의적 관점’의 시대

“日 보수층 여전히 득세 우향우 멈추기 쉽지 않다”

2001년 11월 25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기지에서 해상자위대 소속 난민구호 소해모함(5650t) ‘우라가’가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도우려고 인도양을 향해 출항하고 있다.

이때의 이른바 ‘걸프 쇼크’ 이후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1992년 6월 통과된 국제평화협력법이었고, 이후 유엔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를 시작으로 국제평화유지활동(PKO)에 일본 자위대를 참여시킬 수 있게 됐다. 자위대 해외파병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일본 사회 내부에서 전후 헌법, 특히 전쟁 포기를 선언한 이른바 ‘평화헌법 9조’ 개정 문제가 공공연히 거론되는 도화선 구실을 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이때까지만 해도 평화헌법 문제에 대한 일본 국민의 생각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차원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변화는 오히려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의 기여를 늘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1995년 ‘요미우리신문’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평화헌법 9조 개정에 대한 찬성 의견은 86년 22.6%였던 것에 비해, 50.4%로 나타나 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이들 찬성 의견 가운데 59.6%는 지지 이유로 ‘평화헌법 9조가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의 기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같은 시기 탈냉전 이후 동북아와 세계 안보질서에 대한 우려는 1990년대 후반 들어 미·일 동맹이 강화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특히 1993~94년 1차 북핵 위기는 78년 작성된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의 결정적 구실 노릇을 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정밀타격을 고려하며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했고, 그 과정에서 유사시 일본 자위대가 미군을 도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눈여겨보게 됐다. 이렇게 이뤄진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정은 미·일 동맹을 더 효율적으로 운영해 유사시 한반도 안보에 기여하기 위한 시도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일본은 이 시기 인접 국가와 얽힌 역사의 짐을 덜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불신의 벽을 허물어야만 냉전시기 일본이 가졌던 소극적 평화주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더욱 적극적인 국제사회 일원이 되리라는 게 당시 일본 정계 지도자들의 명확한 인식이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와 무력침공으로 대표되는 과거사 문제를 받아들이고 “깊은 후회와 진심 어린 사죄”를 담은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하게 된다. ‘위안부 여성’ 문제에 관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1993년 8월 4일),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의 합동기자회견(1993년 11월 7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 기념식 연설(1995년 8월 15일),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위안부 여성’에게 보낸 서신들(1996년부터 시작),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한일 공동성명(1998년 10월 8일) 등이 그것이다.

특히 무라야마 담화의 경우 (식민지배와 무력침공이라는) “반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고 “깊은 후회”와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한다는 문구가 보여주듯 고심을 거듭한 결과물이었다.

보수 세력의 대대적 반격

“日 보수층 여전히 득세 우향우 멈추기 쉽지 않다”

2001년 8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왼쪽).

이 시기 이미 고노 담화와 총리 명의의 서신을 통해 위안부 창설과 운영, 위안부 여성 모집을 통한 매춘 강요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도 했다. 1993년 호소카와 총리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창씨개명과 한국어 사용 금지 사실을 언급했고, 경주에서 TV로 생중계된 기자회견 자리에서 깊은 후회와 사죄를 표했다. 98년 한일공동성명 발표 당시에는 사과 문구를 삽입하자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건의를 오부치 총리가 받아들이면서 한일 관계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들이 완벽하거나 완전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양심적 의도에 의해 마련됐고, 대중적이면서도 공개적인 방식으로 실행됐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일본 사회와 정치권의 보수 세력으로부터 심각한 반대 및 위협에 시달려왔다는 사실도 함께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전후 일본과 과거사 사이의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 지점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부터 2010년까지 상황은 급반전했다. 일본의 보수적 국가주의 세력이 이전 시기 일본 사회의 주류 담론이던 국제주의 기조를 사실상 ‘납치’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2006년 9월부터 2007년 9월까지 이어진 아베 신조 총리 집권기간에 평화헌법 개정 논쟁을 주도했던 것이 바로 이들 국가주의 세력이다. 더불어 이들은 집단자위권을 비롯한 미·일 동맹 강화를 안보정책의 핵심 의제로 내걸었다. 국가주의 세력이 국제주의 세력의 역사 해석과 대응 태도에 대해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 이와 밀접하게 관련됐음은 불문가지다. ‘자기비하 사관(史觀)’이라는 보수파의 대대적 공세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복기해보면 고이즈미 총리의 집권 5년(2001년 4월~2006년 9월)이야말로 아시아 외교의 결정적 시기였다. 그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의 위패가 다른 전몰자들과 함께 봉안된 야스쿠니 신사를 매년 참배한 일이 주변국과의 외교문제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총리, 외무성 장관, 관방장관을 제외한 다른 일본 정부 관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을 용인한다는 일종의 ‘신사협정’을 지켜왔지만, 그의 행동으로 이 협정은 백지화됐다. 이후 야스쿠니 신사는 중국과 한국이 과거사에 대한 일본 측 태도를 가늠하는 하나의 상징이자 리트머스시험지로 자리매김했다. 감정은 격화됐고, 그 와중에 역사문제에 대한 일본 보수 진영의 목소리는 한층 커졌다. 이들이 일본 정계와 사회에서 차지하는 입지도 더욱 강해졌다.

기름을 부은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2002년 9월 당시 고이즈미 총리는 평양을 방문해 외교 관계 정상화의 기초를 마련하는 이른바 ‘평양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 커다란 외교적 성과는 그러나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8명이 이미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발표가 나오면서 일거에 뒤집어졌다. 북한과의 관계에 관한 일본 내 분위기는 극도로 냉각됐고,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은 대북(對北) 강경 주장을 연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고이즈미 총리의 후임으로 그보다 보수적인 아베 총리가 당선될 수 있는 국내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중·일 관계도 하락세를 이어갔다. 1995년 대만해협 위기 발발로 일본의 보수파 정치인들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거론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탈냉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미·일 동맹을 정당화하는 한편, 대만과 중국은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려 애썼다. 쉽게 말해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고 대만이 민주주의 국가이며, 일본이 지켜야 할 것은 민주주의 수호라는 원칙 자체라는 기조였다. 이는 결국 아베 정부 1기 때 고안된 이른바 ‘가치외교’, 즉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수호하고 전파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 외교정책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모두 암묵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려는 수단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중국 내 반일 감정이 절정에 달했다. 2005년 유엔 창설 60주년을 맞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으려는 일본의 노력에 대해 중국 도시 곳곳에서 대규모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거꾸로 적잖은 일본 국민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중국 현대화를 위한 일본의 노력이나 과거사 문제에 대한 화해 제스처가 모두 부질없는 짓에 불과했다는 보수 세력의 주장에 공감을 표하는 유권자가 늘기 시작한 것이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한 일본 고위관료는 필자에게 “중국이나 한국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정작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은 이들 나라가 아니라 일본 내 보수층을 설득하는 일이다. 등 뒤에서 빗발치는 아군의 총알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일본을 상대하는 중국과 한국의 외교 관료들에게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악순환 고리를 끊는 법

현재 동북아 세 나라는 이 악순환의 결과로 심각한 신뢰 부재 상태에 봉착했다. 과연 이를 타개할 방법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일본 내부에서도 당연히 이에 관한 논의를 지속하겠지만, 일본 처지에서 말하자면 중국과 한국의 정책 지도자나 여론선도층 또한 그간의 자세가 일본을 무조건 악마화하거나 모든 것을 일본에게 뒤집어씌우는 태도는 아니었는지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중국, 한국 모두가 원치 않는 일본 보수 세력과 국가주의 진영이 더 활개 치는 결과만 낳기 때문이다.

많은 한계에도 일본은 여전히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국가이고, 과거사에 대한 국내 정치싸움은 그 논쟁의 틀 안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은 특히 중국이 인식해야 할 부분이다.

1990년대 일본이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으려고 기울였던 노력은 아직 폐기처분된 것이 아니다. 국제주의를 기초로 이웃 국가들과 신뢰를 회복하는 문제, 평화헌법 개정 문제, 미·일 동맹의 틀 안에서 집단자위권을 포함한 많은 안보정책 이슈를 어떻게 결정해야 옳을지 등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논의가 이뤄질 날이 조만간 다시 올 것이라 믿는다. 다만 그날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지도층의 접근방식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염두에 뒀으면 한다.

(영어원문은 www.globalasia.org/Issue/ArticleDetail/471/a-view-from-the-inside-on-japans-perpetual-trust-gap.html 참조)

*‘Global Asia’는 동아시아재단이 발간하는 국제문제 전문 계간 영문저널이다. ‘21세기 아시아가 열어가는 세계적 변화의 형성 과정에 주목한다’는 기조 하에 아시아 지역 주요 현안에 관한 각국 전문가와 정책결정자의 공론장 구실을 담당한다.



주간동아 908호 (p56~58)

소에야 요시히데 일본 게이오대 교수·우드로윌슨센터 일본지역 연구원 번역·강찬구 동아시아재단 간사 ckkang@kea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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