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7

2010.05.17

욕망의 서스펜스? 현대판 궁중사극?

임상수 감독의 ‘하녀’

  •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chinablue9@hanmail.net

    입력2010-05-17 11: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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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서스펜스? 현대판 궁중사극?

    영화 ‘하녀’는 극중 인물들의 욕망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그렸다.

    하녀는 주인이 남긴 음식을 먹는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 그러나 음식을 담은 접시는 밥찌꺼기가 아니라, 와인의 붉은빛과 스테이크의 기름기로 번들거린다. 하녀들의 신상도 ‘막장’은 아니어서 늙은 하녀는 검사 아들을 뒀고, 젊은 하녀는 대학을 중퇴했다. 다만 한 가지, 부자는 더 부자가 됐다. 높다란 샹들리에, 대리석 욕조, 비싼 외제차, 고급 와인, 성채 같은 집. 대한민국 1%에 속하는, 모든 것을 소유한 왕벌 훈과 그의 여자들은 더 많이 갖기 위해 혹은 간신히 가진 하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의 암투를 벌인다. 이제 하녀로 대표되는 신흥도시 주변에 포진한 노동 계층의 신분상승 욕망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1960년대 걸작 ‘하녀’를 리메이크할 감독으로 임상수가 선정됐다고 했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포스 작렬하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그러나 임상수 감독은 오히려 세상과 한 걸음 떨어져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냉대할 때 가장 잘 어울리는데, 과연 어떤 작품이 나올까 싶었다. 전작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아무리 봐도 임 감독은 김 감독을 숭배하는 영화광의 느낌으로 전작을 대하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하녀’보다 조셉 로지의 ‘하인’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신작 ‘하녀’에서 서스펜스에 앞서는 것은 관능이다. 이를 부각하기 위해 감독은 배우 전도연의 뒤태를 유난히 강조한다. 그러나 하녀 은이와 아내 해라가 훈과 하는 정사는 파격적이긴 한데 섹시하지는 않다. 훈은 늘 와인을 들고 성적인 세례를 하듯 은이에게 따라준다. 또한 이불을 활짝 들춰 그녀의 전신을 짐승처럼 탐한다. 롱 테이크로 찍은 첫 정사신에서 드러나는 훈과 은이의 관계는 훈과 해라의 관계와 하등 다를 바 없다. 명령조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며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훈의 태도는 저잣거리의 몸 파는 여성을 대할 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훈의 행각을 훔쳐보며 늙은 하녀 병식은 ‘아더메치유’를 연발한다.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한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치정에 관해서는 등을 돌린다.

    무엇보다 장르적 관성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하녀’의 서스펜스적 장악력은 많이 떨어진다. 은이는 훈과 몸을 섞은 뒤부터 파란 아이섀도와 빨간 립스틱을 바른다. 비주얼은 음습한 욕망이 쩍쩍 달라붙는 그 옛날 ‘하녀’의 화장발인데, 화면 속 은이는 맹하고 다소 어수룩한 색채로 덧칠됐다. 문제는 감독이 여성 캐릭터 여럿에 골고루 시선을 주다 보니 간판 캐릭터인 은이의 동력이 뒤로 갈수록 떨어진다는 것이다. 다소 레즈비언적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고 다리에 화상 자국이 있는 은이는 그녀의 과거, 성 정체성, 욕망의 양태 모두 모호하다. 그러나 감독이 무대 인사에서 밝혔듯 서스펜스에 신경을 많이 썼으면 서스펜스 주체인 은이의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지닌 전복성에 또렷한 선을 그어야 했다. 모성애로 작동하는 보호 본능은 너무 여리고, 여주인이 출산하러 간 사이 기껏 여주인의 욕조나 차지하는 은이의 소극성과 피학성은 장르적 쾌감을 주기에 역부족이다.

    그래서 ‘하녀’는 에로틱 서스펜스 스릴러라기보다 초호화 저택을 배경으로 한 현대판 궁중사극의 느낌이 더 난다. 여자들의 암투, 왕의 허세와 무기력,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최상류 권력의 두터움. 감독은 첫 장면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이 사회의 무수한 중년여성 노동자를 비추며 “우리 모두는 하녀”라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발언이 가슴에 사무치기엔 ‘하녀’는 너무 우화적이다. 검디검은 질량과 밀도로 눈을 반짝이며 숨겨진 욕망을 갉아먹던 쥐들의 집,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예전 ‘하녀’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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