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진 주택은행 수표 사용했다고 주장
‘스폰서’ 검사를 고발한 건축업자 정용재 씨가 인터뷰 중에 다양한 자료들을 펼쳐 보이고 있다.
문제는 정씨가 한결같이 “거짓이 없다”고 주장하는 진정서 내용의 진위 여부다. 이 문건은 당시 부산지검에 근무한 검사 명단과 직위, 전화번호를 적은 부분이 주를 이루고, 수표번호와 향응 접대 장소 및 일시 등이 구체적으로 적시된 것은 10여 개에 불과하다. 창원지검 진주지청의 경우 1984년부터 90년까지 근무한 검사 모두가 향응과 접대를 받았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가장 큰 의문은 정씨가 2003년 접대에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수표가 당시 존재하지 않던 은행이 발행했다는 점.
‘2003년 6월 13일 부장검사 전원회식, 금요일 ○○○식당, ○○○술집, ○○○룸살롱. 당시 주택은행 수표 10만 원권 200만 원 사용. 50XXX~700, 6월 30일 ○○검사들 회식, 100만 원, 주택은행 수표 65XXXX-090.’
진정서에서 정씨는 2003년 6월 검사 접대에 ‘주택은행 수표를 사용했다’고 적시했으나 주택은행은 2001년 11월 국민은행과 통합한 뒤 더 이상 그 상호를 쓰지 않았다. 즉, 주택은행 발행 수표는 그 당시 통용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씨가 작성한 진정서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또 하나의 의문은 전체적으로 접대의 진실을 확인할 근거가 부족하며, 등장하는 검사 가운데 당시 접대를 받을 수 없는 곳에 있었거나 한 차례 회식에 참가해 밥만 먹고 나온 사람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정씨는 진정서에서 부산지검 산하의 한 지청의 검사장, 검사, 사무과장에게 1984년 3월부터 90년 12월까지 6년 10개월(82개월)간 6억2000만 원 상당의 뇌물과 향응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누구에게 얼마를 언제 제공했는지는 전혀 쓰지 않았다. 지청장에 82개월 동안 월 2회 100만 원을 줬으니 도합 1억6400만 원, 지청에 검사가 5명인데 82개월 동안 월 2회씩 30만 원을 줬으니 2억4600만 원… 이런 식이다. 당시 그 지청에 있던 모든 사람이 정기적으로 돈을 받거나 향응을 받았다는 게 정씨의 주장인 것.
또한 2004년 회식에 참가한 것으로 나오는 K검사의 경우 아예 부산지검 근처에서조차 근무한 적이 없으며, G검사는 1999년 단 6개월간 부산지검에 근무했는데도 이름이 포함됐다. 2003년 6개월간 근무했는데도 이름이 들어 있는 P검사는 “정말 황당하다. 이런 식이라면 부산지검에 근무기록이 있는 모든 검사의 이름이 올라가야 할 것”이라며 발끈했다. G검사의 경우 야당과 진보인사들이 표적수사라고 비난하는 굵직굵직한 수사에 참여해온 인물이다.
‘PD수첩’과 일부 언론에 이름이 공개되고, 정씨의 스폰서 리스트에 구체적인 접대 장소와 내용이 공개된 H검사장은 한 일간지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해 3월 30일 나는 창원에 있었지 부산에 가지 않았다. 알리바이도 있다”고 말했다. 즉, 정씨가 말한 접대 장소는 부산인데 자신은 그곳에 있지 않았으며, 증거도 있다는 이야기다.
검찰 결백 밝혀져도 개혁 태풍
부산지검 재직 당시 윗사람이 주재하는 회식에 영문도 모르고 참가했다가 정씨의 스폰서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전·현직 검사들은 ‘이게 웬 날벼락이냐’는 반응이다. “검찰 자체 회식에 참가했는데 접대는 무슨 접대냐”며 발끈하는 이들도 있다. 리스트에 유일하게 오른 여검사 3명이 대표적인 경우. 한 여검사는 “부 소속 검사 전체회식에 참여한 기억은 있지만 정씨가 누구인지 정말 모른다. 윗사람이 돈을 내는 게 관행이기 때문에 밥값을 누가 냈는지 관심이 없다. 내 이름이 리스트에 들어가 있다니 정말 황당하다”며 허탈해했다.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 접대 장소와 지불금액만 있고, 사람 이름이 없는 무책임한 고발내용도 있다. 정씨는 진정서 곳곳에 “그때 근무했던 사람을 찾아 대질신문하면 다 알 수 있다”는 식으로 써놓았다. 특히 부산지역 검사들은 정씨의 리스트 중 비교적 접대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는 2003년의 경우 접대 날짜가 금요일, 토요일에 집중된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부산지검 검사들은 서울에 집이 있는 주말부부가 대부분이라 금요일 밤 회식은 금기사항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이 밖에도 리스트에는 글씨체가 일반인도 알 수 있을 만큼 서로 다른 부분이 많고, 검사의 이름과 직책이 맞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실패한 브로커’ 정씨의 스폰서 검사 리스트 파동이 검찰 전체에 대한 질타와 개혁 요구로 확산되자 일선 검사들은 ‘유구무언’ ‘벙어리 냉가슴’이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다. 서슬 퍼런 여론 앞에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일각에서는 “일부 지역, 일부 검사의 문제를 전체 검사의 문제로 확대하는 것 아니냐. 정치권이 침소봉대해 이 기회에 검찰을 손보려고 한다”는 주장도 고개를 든다.
검찰의 한 고위 간부는 “‘보도내용이 사실이라면’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총장이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자신의 부하직원에 대해 ‘부끄럽다’는 표현을 썼다. 전후 상황을 파악하고 진상조사 결과가 나온 다음에 시시비비를 가렸어도 늦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진상조사를 통해 향응과 촌지를 받은 정황이 밝혀지더라도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으면 해당 검사에 대한 처벌은 힘들 전망이다.
과연 검찰의 스폰서 검사 리스트 진상조사는 어떻게 결론 날까. 비록 대부분의 내용이 ‘실패한 브로커’의 보복성 허위 주장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검찰개혁 태풍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스폰서 검사 리스트가 공개된 이후 정부와 국민은 검찰보다 정씨의 말을 더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 평검사는 “리스트에 오른 검사가 100명에 달한다는 보도보다 진위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은 채 검찰개혁론이 나오는 현실에 더 놀랐다. 뭔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좌) ‘검사 향응·접대 의혹’을 제기한 정모 씨의 휴대전화 음성 녹음함 목록. (우) 시민단체는 ‘스폰서 검사’ 파동을 검찰 전체의 모습으로 해석하지만 검찰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