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2

2010.02.02

‘표절’은 없다 그러나 ‘무단 사용’은 있다

전여옥 의원 ‘일본…’ 항소심 패소 … 재판부 “취재 내용, 아이디어 등 인용”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10-01-27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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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절’은 없다  그러나       ‘무단 사용’은 있다

    오늘의 전여옥 의원을 만든 ‘일본은 없다’(왼쪽)가 이젠 그의 발목을 잡게 됐다.

    한나라당 전여옥(51) 의원이 자신의 책 ‘일본은 없다’에 대한 표절 의혹 관련 항소심에서도 패소했다. 1월13일 서울고법 민사13부(여상훈 부장판사)는 전 의원이 표절 의혹을 보도한 ‘오마이뉴스’ 기자 등 5명을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2007년 7월 1심에서 패소한 뒤 항소도 기각된 것.

    ‘일본은 없다’는 1993년 11월 출간 이후 120만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이자 전 의원의 대표작. 당시 KBS 기자였던 전 의원은 일본 특파원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이 책을 펴내 유명해졌고, 이는 정계 입문의 발판이 됐다. 이 책에 대한 표절 시비는 출간 직후부터 불거졌다. 2004년 7월 ‘오마이뉴스’는 전 의원이 자기 원고를 표절했다고 주장해온 유재순(52·재일 르포작가, 현 제이피뉴스 발행인) 씨를 인터뷰해 보도했다. 이에 전 의원은 “허위 사실을 게재함으로써 공직에 종사하며 저술활동을 하는 나의 도덕성과 순수성, 작가로서의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며 유씨는 물론, 당시 인터뷰 기사를 작성한 박모 기자, 정치칼럼 사이트에 전 의원에 대한 비판 글을 올린 인터넷 논객 등 5명을 대상으로 5억원의 손해배상금 청구 소송을 냈다.

    과연 전 의원은 ‘일본은 없다’를 저술하면서 유씨의 원고를 표절했을까. 재판부는 어떤 근거로 두 차례나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을까. ‘주간동아’는 이번 항소심의 판결문을 입수, 전문을 꼼꼼히 살펴봤다.

    “초고와 동일” 증인들 구체적 진술

    재판부는 “전여옥 의원이 ‘일본은 없다’ 저술 과정에서 저작권법상의 저작물 내지는 지적재산권 침해를 뜻하는 ‘표절’을 한 것은 아니지만, 유씨의 취재 내용 및 소재, 아이디어 등을 무단 사용하거나 이를 인용해 일부 내용을 쓴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주요 판단 근거는 증인들의 구체적인 진술이었다. 당시 유씨의 자료 수집과 초고 검토를 도왔던 김모 씨는 ‘일본은 없다’ 중 20여 군데의 문단 또는 문장을 지적하면서 “당시 내가 봤던 유재순 씨의 초고, 취재 내용, 생각 등과 거의 동일하고 어떤 것은 문구까지 똑같다”고 진술했다. 특히 이 책 126쪽 ‘객관적인, 너무나 객관적인’의 내용 중 ‘흥분한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이런 책이 나오지 못하게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는 부분은 김씨가 유씨에게 한 이야기라고 했다. 또 김씨는 “유씨가 한국계 일본 가수인 미소라 히바리를 취재한 최초 기록에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한국인인 것으로 잘못 기재했으나, 추후 취재를 통해 그의 아버지가 한국인임을 밝혀냈다. 하지만 ‘일본은 없다’에는 잘못된 이 내용이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기재됐다”고 덧붙였다.

    유씨와 친분 관계가 있던 오모 씨도 “‘일본은 없다’의 일부 글에 유씨가 평소 내게 말하던 일본에 대한 사적인 소감이 그대로 들어 있다”고 진술했다. 특히 그는 “대학원 수업에서 어떤 일본인 교수가 ‘스타카노 가제’(‘치맛바람’이라는 뜻. 오선화라는 사람이 낸, 한국인을 비하하는 내용의 책)를 교재로 한국인 학생들에게 억지 토론을 시켰다는 내용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라면서 “이 내용을 유씨에게는 이야기했지만, 전 의원에게는 전혀 말한 적이 없는데도 그대로 책에 실렸다”고 전했다. 더불어 “책에 나온 한국 여자 오선화에 대한 이야기, 황혼 이혼을 당한 어느 일본 변호사의 이야기 등에 유씨가 취재한 내용이 많이 반영됐다”고 강조했다.

    이에 재판부는 “기사 및 칼럼에 게재된 내용(무단 사용, 인용)이 진실로 여겨지고 당시 국회의원 겸 유명 정당 대변인인 전 의원의 도덕성과 청렴성을 따지는 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기사 및 칼럼이 전 의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해도 위법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또 전 의원이 인터넷 논객 김모 씨가 칼럼을 통해 자신이 뒤에서 기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관련 내용의 취재를 원천 봉쇄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 기술해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칼럼에 전 의원의 명예를 훼손할 만한 사실이 적시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전 의원이 1994년 관련 내용을 보도한 여성신문 김모 기자를 협박했다’는 내용은 1심에선 사실로 인정됐지만, 항소심에선 빠졌다.

    전 의원 측 “부당한 판결, 상고하겠다”

    이번 항소심 판결에 대해 유씨는 1월19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연한 결과다. 다만 인정이 안 된 부분이 꽤 있어 아쉽다”며 “개인적인 실수로 초고를 잃어버렸다. 당시엔 원고를 컴퓨터로 작성한 게 아니라 타이핑했기 때문에 현재 초고를 갖고 있지 않다. 초고만 있었다면 이렇게 동동거리지 않아도 됐는데,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동안 마음고생은 물론 금전적 피해도 1억원 가까이 된다”며 이번 소송에 대한 모든 법적 판결이 끝나면 전 의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전 의원의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바른’은 항소심 판결이 나온 이틀 뒤인 1월15일 보도자료를 통해 “재판부가 취재수첩이나 초고 등 직접적인 증거 자료가 없음에도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바른’ 측은 “이번 판결은 전 의원이 저작권법 위반에 해당하는 표절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취재수첩 등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의미에 불과하다는 전제에서 재판부가 판단한 것”이라며 “판결문에서는 전 의원과 유씨 사이의 ‘표절’ 의혹 공방에 대해 전 의원이 표절한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 의원 측 장환일 비서관도 “피고 유재순 씨가 표절 의혹에 대한 내용으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는 정도의 판단으로 보인다. 손해배상이 아닌 정정보도 청구였다면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렸을 텐데, 금전적 소송이다 보니 기각 판결이 난 것 같다. 재판부에서 표절이라고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표절’은 없다  그러나       ‘무단 사용’은 있다

    재일 르포작가 유재순 씨는 이번 판결에 대해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다. 왼쪽 사진은 ‘주간동아’가 입수한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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