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3

2008.09.16

한국 수의사 젊은 피가 떠난다

낮은 처우와 동물병원 포화로 미국행 러시 … 광우병 등 할 일 많은데 자리는 태부족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08-09-08 16: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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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수의사 젊은 피가 떠난다

    대한수의사회 정영채 회장은 “수의사들이 한국을 떠나지 않도록 적절한 처우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모(33) 씨는 서울대 수의학과를 졸업할 때만 해도 동물을 사랑하는 수의사가 된다는 꿈에 부풀었다. 졸업과 동시에 수의사 면허를 취득한 그는 국내의 한 동물병원에서 인턴으로 2년간 일했지만 한국에서 개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미국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낮은 보수, 불투명한 미래 등 강씨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일하기엔 현실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수의학과 학생들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 대한수의사회에 따르면, 미국 수의사 면허를 취득한 한국 내 수의사는 250명에 이른다. 시험을 준비 중인 학생들까지 감안한다면 그 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네이버, 다음 같은 포털 사이트에는 미국 수의사시험 준비를 위한 카페가 수십 개 개설돼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강씨처럼 수의학과 학생들이 미국행을 택하는 주된 이유는 수의사에 대한 보수와 처우가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좋기 때문이다. 2006년 한국 수의사의 평균 연봉은 2765만원(한국고용정보원 조사)이지만, 미국 개원 수의사의 평균 연봉은 30만~70만 달러(3억~7억원)로 10배 이상 차이가 난다.

    특히 취약한 대상은 수의학과를 갓 졸업한 학생들. 이들은 대부분 취업을 한다. 한 예로 2005년 건국대 수의학과 졸업자 가운데 70% 이상이 취업했고, 그중 72%가 동물병원 등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미국과 10배 이상의 보수 차이



    문제는 인턴 보수가 턱없이 낮다는 것이다. 동물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미국 수의사시험을 준비 중인 김모(28) 씨는 “인턴은 월평균 80만~100만원을 받는다”면서 “똑같이 6년간 공부한 의대, 치대, 한의대와 너무 차이가 난다”고 불만스러워했다.

    1998년을 정점으로 수의 업무 분야가 포화상태를 보이며 국내에서 수의사가 과잉 배출돼 수의사 간 경쟁이 심해진 점도 수의학과 졸업생들이 미국으로 떠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국내에서 수의사는 연간 500명 수준으로 배출되지만 수의사 1인당 가축단위 수는 429마리로, 미국 캐나다 등 주요 국가들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그 결과 유휴 수의사가 1998년 2479명에서 2006년 4481명으로 급증했다.

    그마저도 서울 등 대도시로 몰려 수의사 간 경쟁을 더욱 부추기는 실정이다. 우연철 수의사는 “제주대 수의학과에서 연간 40명의 수의사가 배출되지만 대부분 제주도를 떠난다”며 “그만큼 대도시 동물병원 간의 경쟁은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미국 러시로 인한 또 다른 문제는 올해 상반기 광우병, 조류인플루엔자(AI) 파동 등에서 볼 수 있듯 식품 위생과 안전을 책임질 수의사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데 비해, 이를 담당할 젊은 인재들이 한국을 떠난다는 사실에 있다. 대한수의사회 정영채 회장은 “수의사가 넘친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경우가 많다”며 “광우병, AI 업무를 수의사가 아닌 일반 행정직 공무원이 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인수(人獸) 공통질병이 수백 가지인데 이를 잘 아는 사람은 수의사뿐”이라며 “결국 처우가 낮으면 젊고 유능한 수의사들은 떠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광우병 전문가가 없다 보니 미국산 수입 쇠고기에 대한 위험성이 비전문가들에 의해 증폭돼 사회적 혼란이 야기된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AI가 한창일 때마다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하는 정부당국의 모습도 심심찮게 봐왔다.

    수의사와 수의학과 학생들은 미국으로 수의사들이 떠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적절한 대책이 뒤따르지 않으면 미래 생명공학 발전에 중요한 구실을 할 젊은 인재들이 유출돼 국가경쟁력의 약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미래 생명공학 사회적 인식 제고 시급

    수의사들은 “보수는 어느 한순간에 상승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수의사 수급구조를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한수의사회 박성오 과장은 “수의학 전공을 둔 국내 대학은 총 10개로 재학생이 3297명에 달한다. 전공과정과 수의사 면허 취득자 수가 인구에 비해 과다한 현실을 정책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수의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도 필요한 부분이다. 서울 서대문구의 M동물병원장은 “동물보호에 관한 사회적 배려, 복지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높임으로써 수의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국대 박희명 교수(수의학) 역시 “한국에서 전문의 면허를 가진 사람은 2명에 불과하다”며 “의대, 치대처럼 전문의 제도를 확립하는 등 수의사들의 지위 향상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수의학과 학생들은 “개인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 미국 수의사가 되는 것을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방치할 경우 그들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미국 유학을 떠나는 강씨가 다시 한국에서 동물을 사랑하며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이 하루빨리 조성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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