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3

2008.09.16

역탈북자 고청송 기가 막힌 행적

1993년 들어와 안보 강연과 식당 운영 …10년 후 되돌아가 북한판 안보강사 활동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08-09-08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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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탈북자 고청송 기가 막힌 행적

    1996년 9월 일어난 강릉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때 고청송 씨는 속초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위는 고씨가 쓴 저서.

    느슨해져 있던 대북 경각심이 여간첩 원정화 씨 사건으로 고조됐다. 일각에서는 보수정권이 들어선 후 공안정국을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 경찰청 보안국, 기무사 방첩처를 중심으로 한 대공팀의 기강과 능력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원씨 사건이 터졌을 때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지난 정부에서 몇몇 탈북자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역(逆)탈북 사건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역탈북에 초점을 맞춰 추적에 들어간 기자는 1993년 귀순한 탈북자 고청송(47) 씨가 2003년쯤 일본과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되돌아간 사실을 확인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고씨는 최근까지 북한 전역을 돌아다니며 남조선 실상을 강연하는 강사로 활동했다.

    고씨는 함경북도 김책시(과거의 성진시) 출생으로 자강도 강계시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중국으로 넘어와, 중국 모 지역에서 활동하던 우리 측 요원들에게 귀순의사를 밝힘으로써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1990년대 초는 탈북자가 적었기에 우리 측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으나, 고씨는 정보기관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만 소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우리 측은 이후 고씨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지 않았다고 한다.

    1992년 우리 측 정보기관은 위성사진을 통해 자강도 강계에서 대형 폭발이 일어난 사실을 포착했는데, 한국에 온 고씨는 “지하에 있는 군수공장이 폭발한 것인데 이 사고로 북한은 강계시민을 50km 밖으로 소개시켜야 했다”고 밝힘으로써, 우리 측은 이 사고의 원인과 정도를 파악하게 됐다. 고씨는 이런 수준의 첩보만 가진 인물이었다. 정보기관이라면 당연히 아는 정보를 다시 확인해주는 첩보만 갖고 있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고씨는 전국을 다니면서 안보강연을 했다. 그리고 접적(接敵)지역인 문산 파주 속초 등지로 옮겨 다니며 식당을 개점했다. 식당은 단골을 잡는 것이 중요하므로 한자리에서 오래 해야 하는데 고씨는 개점 반 년 만에 식당을 옮기는 일이 잦았다. 고씨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당시에는 별로 의심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러 접적지역에서 우리 군 부대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해석을 하고 있다.



    1996년 9월14일 대한민국은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이 강릉시 안인진리 해안에 좌초하는 사건을 맞아 ‘뒤집어지다’시피 놀란 적이 있다. 상어급 잠수함은 특수요원을 은밀히 침투시키는 수준의 작은 무기가 아니라, 아군 함대에 어뢰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공격 잠수함이기에 한국 사회가 받은 충격은 무척 컸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씨는 속초시 대포항 인근에서 중국음식점을 하고 있었다.

    잠수함 침투 사건과 연계 의혹

    역탈북자 고청송 기가 막힌 행적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김대중 정부는 남북화해 정책을 추진하느라 대북 경각심을 약화시켰고 탈북자 관리도 느슨하게 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때 고씨와 가깝게 지낸 모 인사가 북한 잠수함 좌초 사건이 발생하기 하루 이틀 전 이 음식점을 찾아갔다가 주방에 붙은 한 골방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 둘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남루한 옷차림의 이들은 언뜻 봐서는 밀항한 조선족이거나 체류기간이 끝난 조선족을 연상케 했다. 당황한 이 인사가 골방 문을 닫으며 “누구야? 비자가 만료된 조선족인가?”라고 묻자, 고씨는 더듬거리는 말투로 “맞아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잠수함 사건이 터지자 이 인사는 고씨 식당의 골방에 숨어 있던 청년들을 북한 잠수함이 태우러 온 북한 공작원으로 보고, 이를 대공수사기관에 알렸다. 그러나 이때는 남루한 청년들이 사라진 다음이므로 수사기관은 이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우리 측 기관은 고씨에게 다시 관심을 기울였는데, 잠수함 사건 발생 한 달여 후 고씨는 속초의 중국음식점을 폐업했다.

    1997년 2월12일 북한의 황장엽 비서가 김덕홍 씨와 함께 한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주중 한국 영사관에 머물던 두 사람은 필리핀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날 문산 쪽으로 갔다가 고씨가 운영하는 음식점에 들어가 고씨와 대화를 나눴다. 이때 고씨는 자신의 숙부가 김일성대학의 학부장이라고 하자 황씨는 금방 그 사람 이름을 되뇌며 그를 잘 안다고 했다고 한다.

    고씨에 대한 우리 정보기관의 관심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그때까지 우리 정부는 탈북자들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남북화해를 추구했기에 탈북자들에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뿐 아니라 대공수사기관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자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는데, 이 시기 고씨는 강계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근거로 ‘김정일의 비밀살상무기 공장’이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책을 일본에서 출판하겠다며 여권과 비자를 받아 출국해 1년여 동안 일본에 머물렀다. 일본에 별다른 연고가 없는 고씨가 1년여 동안 일본에 체류하자 관계기관은 그를 더욱 의심했다. 김대중 정부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고씨에 대한 여권 발급에 동의해준 것은 그들인지라, 그들은 입맛만 다시며 고씨가 귀국하기만을 기다렸다.

    이 시기 고씨는 우리 측 모 인사와 국제통화를 하면서 중국에 가겠다고 한 후 일본에서도 사라졌다. 그리고 이후 한국에 온 다른 탈북자를 통해 그가 북한에서 북한판 안보강사로 활동하는 사실이 확인됐다. 소식통들은 북한은 고씨를 통해 한국의 탈북자 관리 시스템과 한국군 부대 배치 상황을 파악한 후 그를 안보강사로 내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탈북자 관리 시스템·군부대 배치 파악 가능성

    고씨가 북한에 알려줬을 것으로 보이는 한국의 탈북자 관리 시스템은 대단한 정보다. 한국의 방첩기관은 북한 전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는 지리정보를 구축해놨다. 번지만 대면 그 집은 물론이고 앞집과 옆집에 사는 사람까지 알 수 있는 자료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 덕에 관계기관은 탈북자나 생포한 북한 공작원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고 위장 탈북을 한 공작원이 있다면 그는 이 시스템의 위력을 간단히 돌파할 수 있다. 그리고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해 황장엽 씨를 비롯한 고위 탈북자의 행적을 추적하고 한국 내에서의 안보강연을 통해 한국군 부대 위치와 분위기 등을 파악하게 된다.

    1983년 북한군 대위 신분으로 귀순해 북한이 판 3, 4호 땅굴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유명한 신중철 씨는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2001년 재산을 처분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소식을 끊어버렸다. 그로 인해 신씨도 북한으로 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으나 현재 신씨가 북한에 있다는 증거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

    남북 화해무드를 만들겠다며 옥석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탈북자에게 여권을 발급해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결정이, 역탈북을 이용하는 북한의 역용(逆用) 공작활동을 도와줬다는 지적이 방첩기관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북한의 ‘투명 간첩’ 전략

    탈북자로 위장 국내 잠입 … 기존 임무와 다른 성격 요주의


    역탈북자 고청송 기가 막힌 행적
    여간첩 원정화(사진) 씨 사건을 계기로, 북측이 직접 간첩을 남파하던 과거와 달리 제3국에서 탈북자로 위장해 사실상의 ‘투명 간첩’ 성격으로 국내에 잠입하는 방법이 시도된다는 점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원씨도 2001년 남한 사업가를 이용하는 전략으로 국내로 입국하면서 위장 자수하고, 직접 관련 기관에서 조사까지 받았다. 입국 구실을 만들기 위해 남한 사업가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탈북자 정착 공식 기관인 하나원의 교육도 거쳤다. 하나원 교육이 끝나자마자 사업가와 협의이혼해 따로 세대주가 되는 등 치밀한 신분세탁도 마쳤다. 누구도 간첩이라고 의심할 수 없는 자유로운 상황을 만들어놓은 뒤 편하게 간첩활동을 벌여온 것이다.

    이처럼 북한당국이 최근 탈북자들을 제3국에서 직접 관리하고 대남요원으로 활용하는 데 적극적이라는 것이 탈북자 관련 단체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피랍탈북연대 도희윤 대표는 “지난해 북한은 공작원 양성 기관인 김일성정치군사대학(전 금성정치군사대학) 출신 여성 500여 명을 중국 남방지역으로 대거 투입했다고 한다”면서 “이들은 대체로 중국 남방지역으로 이동해 남측으로 입국하려는 탈북자들을 관리하는 현지 포섭조라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북한은 이제 순수하게 정예 공작요원을 선발하는 것을 뛰어넘어 탈북자들을 재차 간첩으로 활용하는 고정 전담조직까지 두고 있는 셈이다.

    기존 대남 공작의 주 기지였던 북한 노동당 산하 대외연락부, 통일전선부가 이번 사건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2006년 일심회 사건 때만 해도 주도적으로 관여한 조직이었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원정화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수사에서 자신을 북한 보위부 소속이라 진술했고 남한 인사 살해, 군 장교 포섭, 탈북자 현황 파악 등을 지시한 북한 인사들도 같은 소속으로 드러났다.

    도 대표는 “보위부 소속 간첩이 탈북자들의 인적사항 파악이나 군 장교 포섭 등에 나선 것은 보위부 본연의 임무와는 다른 성격의 행보”라며 “특히 이젠 보위부가 탈북자들을 상대로 그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활동을 위축시키는 임무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따라서 앞으로는 남한 주요 인사 등에 직접 위해를 가하는 식의 큰 임무가 주어지기보다 주요 정보 관계자 혹은 탈북자 등 취약층의 심리나 활동을 간접적으로 교란하는 ‘명목상의 소극적인’ 간첩들이 새롭게 국내에 정착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에 대한 당국의 허술한 대응도 문제다. 탈북자 관련 단체의 한 간부는 “그동안 탈북자 단체 등을 통해 원정화에 대한 이야기는 직간접적으로 정보기관에 전해졌다”며 “그럼에도 군 간부들까지 농락당한 것은 원씨에 대한 관리와 대응 체계에 꽤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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