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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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슬한 털, 깎인 털, 뽑힌 털

털털한 남성들의 매너 있는 털관리 이야기

  • 김민경 주간동아 편집위원 holden@donga.com

    입력2008-08-25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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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슬한 털, 깎인 털, 뽑힌 털

    악어가죽 브랜드 ‘콜롬보’에서 올 가을부터 사용할 광고 캠페인. 모델의 무성한 가슴털을 왁싱해 도시적 이미지를 만들었다. 인조 가슴털을 붙여 촬영하던 예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원래 이 유럽 남성 모델들은 털북숭이예요. 촬영에 들어갔는데, 그 모습이 그다지 섹시하거나 남성적으로 보이지 않더군요. 고가의 악어가죽이나 도시적인 화보 이미지와는 맞지 않았어요. 사진작가, 모델, 홍보팀이 급히 상의해 현장에서 왁싱을 하고 브론즈 컬러와 문신으로 보디 메이크업을 한 뒤 촬영했습니다. 결과는 만족스러워요. 이상하죠? 남성의 가슴이나 팔에 무성하게 난 털이 무조건 멋있어 보이진 않더라고요.”

    악어제품 브랜드 ‘콜롬보’의 홍보담당자 김기동 씨는 가을 시즌을 위해 새로운 광고 사진을 촬영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가슴과 팔의 북슬북슬한 털이 세련된 남성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처럼 새 광고 비주얼 속에서 두 명의 깔끔한 꽃미남은 성적인 암시를 명백하게 건넨다.

    요즘 가장 멋진 도시 남성들이 헐크처럼 부풀어 오른 알통과 보노보(bonobo) 같은 털을 가진 모습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그보다는 잔근육으로 이뤄진 단단한 등과 배, 슬림한 몸매에 여드름 한 개, 터럭 한 올 없이 깔끔하게 가꾼 브론즈 컬러의 피부가 선호된다. 털이 필요하다면 윤기 있게 기른 콧수염을 보여주는 편이 나은 모양이다.

    “제모를 원하는 남성들이 확실히 늘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제모 시술이 이뤄지는 부위는 가슴과 복부입니다. 다음이 턱과 뺨, 발가락과 손가락입니다. 가슴과 복부에 난 털은 남성다워 보일 수도 있지만 지나치면 한국 여성들은 징그럽다고 생각하죠. 또 얼굴에 검은색 털이 너무 많으면 면도하기도 힘들고 늘 얼굴이 검게 보이는 등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발가락이나 손가락 위에 길게 솟은 털은 혐오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신발 등에 잘 끼기 때문에 제모를 원합니다.”

    “보기 흉하고 불편” 이유로 제모 원하는 남성 늘어



    북슬한 털, 깎인 털, 뽑힌 털

    병원에서 레이저로 모낭을 파괴해 제모하는 모습. 겨드랑이는 1분, 가슴은 30분 정도 걸린다.

    레이저 제모를 전문으로 하는 박해상(NB클리닉 서울대점) 원장의 말이다. 서부개척 시대의 카우보이나 도끼로 장작을 패는 변강쇠처럼 보일 생각이 아니라면 가슴 위로 침팬지처럼 뻗은 시커먼 털 또는 모공과 거친 피부를 강조하는 굵은 얼굴털은 없애거나 가늘게 만드는 게 좋다는 것을 남성들도 알고 있다는 얘기다.

    또한 이번 올림픽을 통해 박태환과 마이클 펠프스 등 남성 스포츠 스타들의 탄탄한 몸매가 연일 TV를 통해 노출되자 겨드랑이 제모가 자연스러워졌을 뿐 아니라 몸의 근육을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수영선수들이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제모를 하듯 운동을 즐기는 남성들은 필요성을 느껴 털을 ‘밀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동호회에서 농구를 하는 회사원 김모(45) 씨는 “워낙 땀을 많이 흘리는 운동이라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고 냄새가 날 수도 있어 겨드랑이 제모를 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지금은 한두 명씩 ‘제모파’가 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사이클링을 하는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팔과 다리를 말끔하게 제모한다. 박병훈 트라이애슬론 선수는 “고속으로 사이클링을 하다 넘어져 피부가 도로에 마찰되면 털이 타서 모낭염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사이클링 전엔 반드시 제모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여름에도 긴 소매의 드레스셔츠를 입는 서구와 달리 반소매 와이셔츠 차림이 흔한 우리나라에선 남성들도 ‘비키니 라인’처럼 겨드랑이 라인을 왁싱하는 것이 좋다”는 스타일리스트들의 충고도 더해진다.

    가장 간단한 남성 제모법은 역시 면도기를 이용하는 것이지만, 최근엔 반영구적인 레이저 제모 시술이나 가정용 제모기계를 이용하는 방법이 선호된다. 필립스 제모기를 홍보하는 KPR의 최진 씨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노출이 많은 디자인의 옷을 선호하는 추세다. 또한 운동하는 사람이 크게 늘면서 몸의 모든 부위를 잘 가꾸는 것이 필수 매너가 됐다”며 “올 여름이 한국에서 제모기 시장이 크게 확대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가정용 제모기는 면도기처럼 생긴 기계로 털을 콤바인이 벼 수확하듯 ‘뽑아’준다. 피부에 대고 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간편하다.

    레이저 시술은 레이저로 모낭을 파괴해 털을 없애 는 방법이다. 털은 성장기, 휴지기, 퇴행기를 거쳐 생을 마치는데 이 중 성장기의 털과 모낭에만 레이저의 효과가 있다. 따라서 한 달에 한 번씩 5회 시술하면 80~90%의 굵은 털이 사라진다. 10~20%는 가늘어진다. 이듬해부터는 연 1회 정도 시술하면 깔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낭이 영원히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므로 마음이 바뀌거나 트렌드가 ‘북슬형 남성’으로 변하면 다시 길러볼 수도 있겠다.

    한 달에 한 번씩 5회 레이저 시술로 굵은 털 80~90% 말끔

    ‘털 없는 원숭이’의 저자이자 동물학자인 데즈먼드 모리스는 “면도와 제모는 동물의 몸 손질 행위에서 생겨나 과시 기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피부를 손상시키는 행위로 변형됐다. 동물에게 이같이 지나친 몸 손질은 긴장했을 때나 따분할 때 나타난다. 그러나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진 인간은 이 위험하고 해로운 경향을 몸을 꾸미는 과시장치로 활용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털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이 오늘날 가장 진화한 원숭이임을 외적으로 과시하고 남과 차별화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단 얘기다.

    북슬한 털, 깎인 털, 뽑힌 털
    미의 기준이 얼굴에서 전신으로 확대된 지금 ‘문명인’은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은 기본이고 손톱 발톱을 갈고 다듬어야 하며 터럭 하나라도 방치해선 안 된다. 머리털은 빽빽해야 하고, 몸의 털은 정성스럽게 밀거나 예술적으로 가꿔야 한다(‘구찌’ 광고처럼 비키니 라인에 문자나 기호를 만들길 원하는 여성들도 꽤 있다고 한다). 그 덕에 털 없는 원숭이들을 위한 털관리 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아무 죄 없는 털이 혐오 대상이 되고, 레이저로 파괴해야 하는 종양 취급을 받는 건 꽤 으스스하고 억울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끈하고 깔끔한 원숭이들이 이성에게 인기 있는 진정한 이유는 이들이 인간의 몸에 대해-어쩌면-사색하고 있으며, 털을 관리할 수 있는 돈과 정보와 시간을 갖고 있음을 온몸으로 ‘과시’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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