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척주, 즉 강원도 삼척에 세워진 동해비의 원고본이다. 비석에는 동해비가 세워진 일화가 전해진다. 허목이 삼척 부사로 부임하던 때에 그 지역에 극심한 해일 피해가 있었다. 허목이 ‘동해송’이라는 시를 지어 비석을 세우자 바다가 잠잠해졌다고 한다. 영험한 비석의 글을 쓴 허목은 고전체를 응용해서 떨림이 있는 구불구불한 글자체를 완성했는데, 이를 그의 호를 따 ‘미수체’라고 한다. 당시에는 워낙 기이한 글자체라 비판을 받았으나, 지금은 조선시대의 개성 있는 글씨체로 평가되고 있다.
46. 소상팔경 시첩 조선, 미술1관 서예실

47. 한석봉 증류여장 서첩 조선, 미술1관 서예실, 보물 제1078호

48. 추사필 묵소거사자찬 조선, 미술1관 서예실

49. 강세황 초상 조선, 미술1관 회화실, 보물 제590호

50. 풍속도첩 조선, 미술1관 회화실, 보물 제527호

51. 강산무진도 조선, 미술1관 회화실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의 무덤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 모양 병이다. 고려청자의 기술과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이 청자는 무늬는 없지만 팽팽한 참외 모양의 몸체와 유려한 선이 돋보이는 목 부분, 참외 꽃을 연상시키는 입술 등에서 완벽한 비례와 단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은은하게 발산하는 옥빛은 고려청자의 비색으로 여겨지던 것으로 동시대의 중국 제품을 능가하는 맑고 깊은 담녹색을 띠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청자의 명품이다. 고려청자에서는 드물게 음각, 양각, 투각, 퇴화, 상감, 첩화 등 다양한 청자기법이 절묘하게 집약되어 있다. 섬세한 장식이 많은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잘 잡혀 안정감이 뛰어나다. 연꽃 모양으로 된 부분이 향을 태우는 부분이고, 뚜껑에 있는 칠보무늬 구멍을 통해 향이 빠져나가도록 해놓았다. 받침대에 장식된 앙증맞은 세 마리의 토끼는 고려 도공의 조형적인 감각과 숙련된 기교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주둥이가 작고 몸체가 팽팽한 형상의 청자 매병이다. 병의 몸체에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멋진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그림 자체만으로도 손색없는 훌륭한 작품이다. 대나무와 매화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고,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멀리 하늘을 나는 학은 작게 표현되어 좁은 공간 속에서도 거리감이 잘 살아 있다. 오랜 관찰의 결과인 듯 모든 소재가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성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 새롭게 등장한 분청사기는 소박하고 아름다워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검소한 취향에 잘 맞았다. 특히 거친 듯하면서도 재치가 가득한 무늬가 많아서 서민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항아리는 표면에 무늬를 파서 그 안에 백토(흰 흙)나 주토(붉은 흙)를 넣어 구워내는 상감기법으로 용무늬를 냈다. 윗부분에는 물결무늬와 원무늬가 새겨진 도장으로 촘촘하게 찍는 인화(印花) 기법으로 장식하여 활기찬 미감을 나타냈다.

한쪽 끝의 주둥이와 납작한 몸체가 자라를 닮았다고 하여 자라병이라고 불리는 분청사기다. 주둥이에 끈을 매어 허리춤이나 말안장에 묶으면 휴대하기 편리해서 여행용 물병이나 술병으로 사용한 듯하다. 하얀색 모란꽃 무늬는 바탕에 백토를 바른 뒤 무늬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를 긁어낸 다음 검은색 철화 안료를 바탕에 덧칠해서 완성한 것이다. 백토 분장을 하는 분청사기의 특성을 이용한 독특한 기법이라 하겠다.

작은 국화꽃 무늬로 장식한 분청사기 접시다. 국화꽃 하나하나의 모양이 똑같은 것은 국화 무늬가 새겨진 도장으로 찍어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화기법이라고 하는데 자국이 난 자리에 백토로 메워 그 모양을 드러낸 것이다. 그릇 바닥에는 장흥고라는 글자가 상감되어 있다. 장흥고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대어주거나 관리하던 관청 이름인데 이 그릇의 사용처를 나타낸 것이다.

한가위 보름달처럼 둥근 모양이라고 해서 달항아리라는 정겨운 이름으로 부르는 백자 항아리다. 은은한 색과 함께 덜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넉넉한 곡선이 감상 포인트다. 가운데를 자세히 보면 가느다란 선이 보이는데, 이는 그릇의 몸체가 너무 커서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이어 붙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원형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진 모양이지만 오히려 푸근하고 자연스러운 멋이 풍긴다.

하얀 백자에 푸른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백자 항아리다. 둥그런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조선 전기의 청화백자 문양은 한 폭의 회화 작품을 보는 듯 자연스럽고 빼어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이는 푸른색을 내는 코발트 안료가 멀리 아라비아에서 수입해온 귀한 것이라 능숙한 솜씨의 화원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던 까닭이다. 대나무, 매화, 새의 모습이 사실적이면서도 입체적으로 보인다.

흑갈색 무늬가 돋보이는 철화백자 항아리다. 철화백자는 산화철 안료로 무늬를 그린 것인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청화 안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17세기에 가장 유행했다. 항아리에는 포도 덩굴 사이를 잽싸게 뛰어넘는 원숭이가 그려져 재미를 더해준다. 원래 원숭이는 지혜를, 포도는 풍요로움을 의미하는데 조선시대 백자의 문양으로 자주 등장하곤 한다. 생동감 넘치는 붓자국, 세련된 공간감이 돋보이는 조선시대 철화 백자의 걸작이다.

조선 후기의 대화가 정선이 그린 금강산 풍경이다. 36세 되던 1711년에 백석공이라는 사람과 함께 금강산을 처음 여행하고 그 풍경을 담은 것이다. 이 풍악도첩에는 내금강·외금강·해금강 등 명승의 특징과 형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당시에 유행했던 지도처럼 산봉우리마다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 경치를 관찰하고 그렸지만 자신의 머릿속에서 창의적으로 재구성하여 중심이 되는 것을 부각해놓았다. 이는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내는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53. 유압도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유압도(좌), 맹호도
54. 맹호도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조선 말기에 그려진 맹호도다. 예로부터 한반도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던 까닭인지 호랑이는 한국화의 소재로 큰 인기를 끌었다. 심사정이나 김홍도 같은 대가들이 그린 맹호도에서부터 아마추어 화가들이 그린 익살스런 모습의 호랑이 민화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려졌다. 이 맹호도는 바늘보다 가는 선으로 촘촘히 털을 그려넣는 등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사실적으로 표현된 수작이다.

미원은 사간원을 부르는 별칭으로, 사간원의 문인들이 친목을 다지기 위해 가진 모임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모임을 소재로 한 계회도이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자연의 풍광을 표현하는 데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자연을 중요하게 여겼던 당시의 풍조가 반영된 것이다. 그림 위에는 성세창이 그림을 본 느낌을 써놓은 글이 있고, 아래에는 유인숙·이황 등 계회에 참석한 관리의 이름·관직·본관 등을 써놓았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경계가 모호한 문자도다. 조선시대에는 좋은 뜻을 담은 한자를 그림처럼 그려서 늘 마음에 새기도록 했는데, 화려한 기교로 다듬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소망과 감정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표현했다. 이 문자도는 유교적 윤리관에 따라 군자가 행해야 할 실천덕목을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 형제간의 우애, 나라에 대한 충성, 친구 간의 믿음, 예절, 의리, 검소, 겸손의 뜻을 담은 효, 제, 충, 신, 예, 의, 염, 치를 쓰고 각 글자의 뜻과 관련된 상징물을 곁들여놓았다.
57. 곽분양의 즐거운 잔치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조선 후기의 화가 이암이 그린 동물화다. 조선시대에는 생활 주변의 살아 있는 생물을 통해 자연의 흥취를 느끼게 하는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새와 꽃을 다룬 화조화, 동물을 다룬 영모화 등이 그것인데 이러한 그림에는 인간의 삶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벽사와 길상의 의미가 담겨지기도 해서 더욱 큰 사랑을 받았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특히 잘 그렸던 이암은 젖을 먹기 위해 어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강아지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진찬도라고 하는데 대왕·왕대비·대왕대비의 생신이나, 왕위에 오른 해를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무신년진찬도’는 1848년에 순원 왕후가 예순 살이 된 것을 기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궁궐 안에는 신하들이 다 같이 모여 있지만 정작 주인공인 왕비의 의자는 비어 있다. 이는 신성하고 위엄을 지닌 왕비의 존재를 감히 그리지 못하고 의자로 표시만 해둔 것이다.
60. 신윤복 여속도첩 조선, 미술1관 회화실
혜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다. 서민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다루었던 김홍도와는 달리 신윤복은 주로 기녀와 벼슬 없이 지내는 한량의 사랑을 소재로 하여 당시의 풍류와 사회상을 표현했다. 그는 한껏 멋을 부린 남녀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가늘고 부드러운 필선과 선명한 채색을 가하였고, 구성의 묘가 배인 배경에서 회화적 역량을 펼치고 있다. 남녀유별의 유교사회에서 노골적인 사랑을 다룬 신윤복의 풍속화는 조선시대의 또 다른 사회상을 전해준다.
61. 청룡도 조선, 미술1관 회화실 전시예정
정월 초에 궁궐이나 관청의 대문에 붙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궁중 장식화다. 십장생·모란·용 등은 평안과 번영, 장수를 상징하는 궁중 장식화의 주요한 소재였다. 특히 용은 귀신과 재앙을 막는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천자를 상징하기도 해 임금이 앉는 자리, 수레, 옷의 장식 문양으로 많이 쓰였다. 조선시대의 용 그림은 구름이나 물속을 배경으로 그려지거나 호랑이와 힘을 겨루는 장면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그림 속의 청룡은 먹구름 사이로 몸을 틀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는 모습인데 활달하고 섬세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이 어우러져 힘찬 웅혼과 생명력이 전해지는 듯하다.
62. 감지금니 화엄경 그림 고려, 미술1관 불교회화실

63.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해냄(감로도 甘露圖) 조선, 미술1관 불교회화실

64. 야외의식용 괘불 조선, 미술1관 불교회화실
야외에서 열린 불교 법회 의식에 걸렸던 거대한 불화다. 조선시대의 사찰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을 겪으면서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기 위한 의식을 자주 열었다. 불상을 대신해서 예불의 대상으로 봉안된 이 괘불에는 인도의 영취산에서 부처가 처음으로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영산회 장면이 그려져 있다. 영산회란 현실 세계를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 즉 부처님이 사시는 깨끗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65. 사자도 조선, 미술1관 불교회화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먼저 저승의 왕들에게 불려간다고 믿는다. 저승사자는 왕들의 심부름꾼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한 일들을 적은 책을 저승의 왕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한다. 말에서 막 내린 저승사자는 무표정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사자 뒤의 말 또한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이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이와 같이 불화는 불교 경전의 어려운 내용을 좀더 쉽게 설명할 수 있어서 사람들에게 부처의 말씀을 전하는 좋은 교재가 되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세계에 있는 열 명의 왕을 차례로 만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이 일은 극락이나 지옥에 가기 전인 명부라는 곳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곳에 있는 열 명의 대왕을 그린 그림을 시왕도라고 한다. 시왕도의 윗부분에는 왕이 심판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아랫부분에는 끔찍한 지옥이 묘사된다. 그림 속의 대왕은 맨 처음 만나는 진광대왕으로 불효와 같은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칼산에 가두는 벌을 내린다. 시왕도는 경각심을 통해 중생이 현생에서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그림이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의 반가사유상이다. 금동으로 만든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큰 이 상은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살진 얼굴, 꿈틀거릴 것만 같은 오른손, 얇은 옷으로 인해 드러난 인체의 아름다움 등은 삼국시대 조각가의 빼어난 솜씨로 탄생되었다. 특히 일본 국보 제1호인 교토 고류지의 반가사유상은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과 매우 닮아 있는데, 녹나무를 짜맞추는 방식의 일본 조각상과 달리 붉은 소나무에 직접 조각한 방식으로 보아 한반도의 전래품으로 여겨진다.

만들어진 때를 알 수 있는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불꽃 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광배의 뒷면에 4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불상 발원의 배경이 밝혀져 있다. 즉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 동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539년에 1000개의 불상을 만들었고 이 불상은 스물아홉 번째라고 한다. 그런데 불상이 발견된 곳은 신라의 땅이었다. 이는 불교를 널리 알리겠다는 고구려 사람들의 불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69. 경주 구황동 삼층 석탑 출토 부처와 아미타불좌상 통일신라, 미술1관 불교조각실, 국보 제80호, 국보 제79호


70. 감산사 미륵보살입상, 아미타불입상 통일신라, 미술1관 불교조각실, 국보 제81호, 제82호
경주 감산사 터에 있던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이다. 명문에 의하면 당시 최고의 행정기구인 집사성의 시랑 김지성이 719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전 재산을 내놓아 감산사를 짓고 두 불상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어머니를 위해 발원한 미륵보살상은 이전의 보살상에 비해 장식이 훨씬 화려하고 관능적인 모습인데, 이는 당대에 유행했던 인도의 굽타양식을 수용한 결과다. 이러한 사실적인 표현과 능숙한 석조기술은 50년 뒤 석굴암의 조성으로 이어진다.

철로 만든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 가장 큰 상이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시 춘궁리 절터에 있던 불상인데 겉옷의 표현이나 손 모양 등 석굴암의 본존불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부처의 손 모습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편하게 손을 내려놓은 것 같지만 이 손 모양은 부처가 보리수 밑에 앉아 명상을 할 때 악마가 나타나 방해를 하자 땅에 있는 신을 불러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했던 순간을 나타낸다. 이 손 모양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불상의 손은 불교의 사상을 형상으로 보여주는 구실을 한다.

감은사는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이 마지막 유언으로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호국정신을 기려 만든 절이다. 현재는 서탑과 동탑만이 남아 있는데 동탑에서 이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 사리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화장했을 때 몸에서 나온 구슬로, 불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예배 대상이다. 그래서 소중한 사리를 보관하는 사리기들은 정성을 다해 아름답게 만들고 보호를 위해 여러 겹으로 제작되었다. 감은사 동탑 사리기는 사리를 넣은 수정병을 호리병에 넣고, 다시 사천왕이 지키는 사리 외함에 넣어 보관했는데 우리나라 사리기의 최대 걸작으로 꼽힌다.

절에서 부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쓰이는 의식구로, 맑은 물을 담는 병이다. 날씨가 더운 인도 승려들이 물병을 휴대하는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정병은 승려가 지니는 18가지의 필수품 중 하나가 되었고 불화에서 관세음보살이 지니는 용기로 그려진다. 겉에는 고려인의 자연관에 따라 흐드러진 버드나무와 물결 따라 노를 젓는 어부, 한가롭게 노니는 물오리들이 아주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이러한 무늬는 표면에 홈을 파고 은실을 박아넣은 상감기법으로 만들어졌다.

현종 1년인 1010년에 천흥사에서 만든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범종이다. 범종은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또 의식을 진행할 때 쓰인다. 불교에서는 범종을 울리면 장엄하고 청명한 소리가 먼 지옥까지 닿아 참회의 마음을 갖게 한다고 여겼다. 천흥사 범종은 으뜸으로 꼽히는 신라의 범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여의주를 문 용뉴, 비천상 등 새로운 고려의 감각을 발휘한 뛰어난 작품이다.
75. 문갑 조선, 미술1관 목칠공예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사방탁자는 전통 가구 중에서 높이가 높은 가구에 속한다. 책을 올려놓거나 장식품을 진열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 보통 3단이나 4단으로 만들어 키는 크지만 사방이 네모나게 트여 있어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맨 아래층에는 문이나 서랍을 달아 중요한 물건을 보관했다. 기둥과 널판만으로 이루어진 모던한 조형미는 간결하고 소박한 멋을 추구했던 조선시대 선비의 감각과 잘 어울린다.
77. 나전대모 칠 국화 당초무늬 불자 고려, 미술1관 목칠공예실

주간동아 511호 (p41~72)